산책길, 벤치 그늘에 꼼짝 않고 앉아 얌전히 주인을 기다리는 운동화를 본다. 주름진 양말을 품고 이제나 저제나 주인이 오기만을 온몸으로 기다리는 운동화. 주인의 발에서 분리된 운동화는 조막만 한 새들이 초록 잎새 사이로 숨었다가, 재재거리다가는 포로롱대며 하늘로 솟구치는 양을 보며 지루함을 달래고 있지는 않을까. 지구 한 바퀴 돌고도 남을 그 시간(그만큼 길게 느껴질 것 같다)을 기다림으로 채우려면, 열 지어 지나가는 개미의 숫자라도 헤아리지 않고는 못 배길 듯싶은데, 기다려, 명령을 들은 반려동물처럼 얌전히도 제 자리를 지키는 운동화.
'누가 신발을 벗어 놓은 채 잊고 간 것일까?'
예전 같았으면 그리 생각했을 것이다. 맨발 걷기 열풍을 몰랐을 때의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신발을 찾아 헤맬지도 모르는 주인을 제멋대로 동정했었다. 인적도 드문 대로변에 운동화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으니 그런 착각도 할 만하지 않겠는가. 비록 가까운 곳에 야트막한 산이 있어도 맨발로 오르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는 까닭으로, 그려지는 그림은 제한적일 수밖에.
이후로 맨발로 걷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오고, 드문드문 눈에 띄던 '맨발의 청춘들'은 어느 순간부터 점점 늘어, 운동화를 신고 걷는 사람이 무색해 보일 정도까지 이르렀다. 그제야 방치된 듯 보였던 운동화의 내막을 깨닫던 나. 이것 참, 너무 아둔한 것 아닌가!
'그런데 말입니다, 운동화를 저렇게 놔두면 분실이 안 될까, 너무 궁금하다 이 말입니다!'
졸지에 쓸데없는 걱정을 해 보는 것이지만, 맨발로 걷는 것이 건강에 좋은가 보다고 지레짐작만 했을 뿐, 한 번도 신발 벗고 양말도 벗고 걸어볼 용기는 내지 못했다.
맨발바닥을 지구의 피부에 맞대고 걷는다는 것(earthing), 흙내음을 맞고 땅의 기운을 정수리까지 길어 올린다는 것은 분명 건강에 유익한 일일 것이다. 신발과 양말을 벗었다가 신었다가 하는 번거로움, 물티슈로 대충 닦은 발에 양말과 신발을 다시 꿰어야 하는 찝찝함을 상쇄할 만한 이로움이 과연 무얼까.
면역력 강화, 풋 코어 근육의 발달, 심혈관 질환 예방 외에 다이어트, 혈액순환 개선, 불면증 치료, 골다공증 예방, 족저근막염 예방, 뇌 건강, 치매 예방까지. 이건 거의 만병통치약 수준 아닌가! 맨발 걷기 후 암이 완치되었다는 얘기도 들리는 판국이니, 맨발 걷기의 효과를 맹신하여도 무리가 없을 듯도 하다. 하지만 맨발 걷기라 해서 무턱대고 시작해서는 안 된다는 전문가의 조언도 있다.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파상풍 주사를 맞아야 하고, 발의 감염과 상처에 유의하고, 명현 반응도 올 수 있으니 처음엔 짧은 시간부터 발의 적응도를 높이고 점차 시간을 늘려가는 게 좋다고 한다.
'그렇잖아도 골다공증 수치가 낮아 고민인데 이걸 해 봐야 되나, 말아야 되나. 가뜩이나 넙데데한 마당발을 드러내놓고 걷기를 해 봐? 안 돼, 안 돼, 그건 안 될 말! 절대, 내놓을 수 없어......
발 틈에 모래 한 알만 끼어 있어도 피부가 따갑고 불쾌하던데, 아무리 입자가 고와도 흙 알갱이들이 발의 여기저기에 묻어 돌아다닌다 생각하면? 여름 같으면 약수터에서 씻는다지만, 이른 봄이나 늦가을 같은 때는?'
한 여름만 빼고 항상 발이 시린 나로선 상상만 하다 고개를 젓고 만다.
신을 신고 걸어도 발이 시린 늦가을, 맨발로 걷는 사람들을 자주 보았었다. 보는 사람이 더 춥게 느껴지는 차가운 날씨임에도 그들은 태연히 건강을 추구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발 시리지 않냐고 묻고 싶은 걸 꾹 참아야 했다. 괜찮으니 걱정 붙들어 매슈, 퉁명스러운 대답이라도 들으면 피차 뻘쭘하므로.
흙으로 조성된 산책로는 맨발의 인류들이 다져 놓아 반들반들하다. 지구의 숨결을 느껴볼 수 있는 흙길이 흔하지 않은 도시의 삶! 흙길에 열광하는 사람들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말없이 콘크리트에 지친 사람들을 품어주고 위로해 주는 산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윤기가 촤르르르 흐르는 산책로를 맨발은 아니어도, 발에 땀이 나도록 걸어 만 보를 채우려 애쓴다. 굳이 이런 길, 저런 길 가릴 필요 있나 싶지만, 모르겠다, 나중에라도 맨발의 청춘이 될 용기를 내어, 산책로를 반드르르 다지는 데 일조할지도.
그날이 오면, 한적한 곳 벤치 그늘 삼아, 신발과 양말 가지런히 벗어 두고, 나지막이 속삭여 봐야지.
'잠시만 기다려, 지구 한 바퀴 돌고 올 테니. 해 그림자 기울거든 데리러 오마. 너희도 산들바람 쏘이며 나비잠에라도 들려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