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한다 잘한다 말해줘야 잘할 수 있게 된다
'아이들은 믿어주는 만큼 자랍니다'
육아 전문가들에게서 한 번은 들어봤음직한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의 뜻이 무엇인지,
뭘 어떻게 얼마나 믿으라는 말인지 영 긴가민가하다.
아직 한 자릿수이지만 그래도 학령기에 잘 적응한 것으로 보이는
아이를 키우는 입장으로서는 어느 정도 믿을 수 있는- 그리고 믿어야 하는 말이다.
유아기 때의 아이는 부모가 세상이고 하늘이기에,
의심할 여지없이 부모가 하는 말을 따른다.
말을 잘 듣고 안 듣고 와 상관없이 부모의 말이 곧 세상인 시기이다.
하지만, 학교에 들어가면 아이들만의 세계가 생기고
조금씩 저마다의 속도는 다르겠지만 그들만의 생각이 자란다.
'정말 엄마 아빠가 말한 게 맞아?' 하는 시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가 육아 갈등의 시작인 것 같다.
나 역시 예민하지만 순한 편의 아이를 키우면서
7세까지의 아이의 행동이 서툴긴 하지만 이해는 가는 정도의 행동이 다였다.
어른인 내 눈으로 보았을 때,
'왜 저러지' 싶거나 '저게 어렵나'하는 것도
조금만 아이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쉽사리 그 이유를 알아낼 수 있었다.
그래서 기관에서의 일을 조잘대지 않는 아이였지만
잘 지낸다는 선생님의 말과 한 번씩 올라오는 사진에서의 아이 표정으로
말이 업다는 게 별다른 문제없이 잘 지낸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아이의 세상은 예측 가능했다.
그런데 학교에 들어가며 그 단순하던 세상은 180도 변화했다.
학교는 유치원에서처럼 아이의 단순한 일상을 내게 알려주지 않았고,
물론 아이의 일상 사진도 학교생활에서는 어쩌다 가는 체험 활동 사진 외에는 볼 수 없었다.
나는 최대한 나만의 조급함을 누르고 아이에게
"오늘 하루 어땠어?" 라든가 "학교에서 재미있는 일 있었어?"라고 물으면
"몰라", "어" 정도의 단답으로 돌아왔다.
답답했다.
하지만 더 이상 캐물을 수는 없었다.
내가 학교 생활에 대해 캐물으려 할수록, 내 불안을 나타낼 것 같았고
그 불안이 학교에 적응하는 시기의 아이에게 전가될 것 같았다.
나는 아이가 학교에 별 탈없이 잘 적응하길 바랐고,
이전의 기관생활에서 늘 초반에는 낯을 가리고 조용한 편이었지만
1-2주만 지나도 생기를 찾고 곧잘 적응해 왔던 아이를 믿어주기로 했다.
잠시 이야기를 전환하여,
나는 아이에게 큰 욕심을 갖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당연히 아이는 나와는 다른 존재고 내 소유물이 아니며
육아의 목적지는 아이의 완전한 독립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언제나 나의 관점과는 다른 아이가 좋아하는 길을 찾길 본인이 행복한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고 있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나보다는 나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어릴 적의 가족 불화로 인한 쪼그라든 자존감과
학교생활에서도 잘 적응하지 못하여 튕겨져 나온 과거로 인해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결핍이 있다.
살면서 결핍이 없는 사람은 없겠지만,
가끔은 불쑥 튀어나오는 나의 찌그러진 인격체를 마주할 때마다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고 숨고 싶어진다.
특히 어릴 적 주변 어른들과 집안 사정에 의해서
끊임없이 '너는 안돼'라는 말을 들으며 자라와서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안돼.
세상엔 넘을 수 없는 벽이라는 게 있어.
너 같은 사람은 그냥 '꿈'도 꾸지 마.
그리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다.
내가 20대 중반까지도 쭉 가지고 있던 신념 같은 말 중 하나가
'오르지 못할 나무'였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도 보지 말라.
그래서 정말 꿈도 꾸지 않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불똥을 맞을 것 같이,
그렇게 세뇌당하여 자라왔기 때문이다.
그랬던 내가 육아를 하면서 나의 세상이 바뀌었다.
아이에 대해 공부하면서,
육아를 계속 알아가면서,
내가 자라왔던 환경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의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세상에 가질 수 없는 '꿈'은 없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가 이룰 수 있다.
이런 시각을 갖게 되면서 나의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고,
너무 늦게 깨달은 것에 대한 아쉬움은 있지만
나는 젊을 적 이루지 못했던 꿈들을 앞으로는 천천히 이뤄나갈 예정이다.
그래서 내 아이에게도 하나 바라는 것이 있다면,
'넌 무엇이든 꿈꾸면 해낼 수 있는 사람이야'
라는 것을 마음속 깊이 새기고 자랄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재산의 유무, 성별의 차이, 신체조건 등등 모든 것을 떠나서
인간은 정말 간절히 꿈꾸고 바라며 정진하면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존재라고 믿는다.
이와 동일선상에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은, '감히'라는 말이다.
가끔 영화나 드라마에서 '네가 감히, '라는 대사를 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신분제와 계급제가 존재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같은 인간에게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갑자기 생각났는데, '감히'라는 말은 나에겐 어떤 욕보다도 더 모욕적인 말로
악질의 범죄자에게나 사용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아이에게는 '잘한다, 잘한다'하면 잘하고
'못한다, 망한다'하면 정말 못하고 망한다.
이건 일종의 말로 하는 저주와 같은 것이다.
아이들의 행동은 서툴고,
특히 어른인 우리의 눈으로 보면 못마땅하기 그지없다.
왜 그 쉬운 과자 봉지 하나를 못 까고
자기 입으로 가는 숟가락도 똑바로 못 쥐고 밥을 질질 흘리고,
못하면서 이거 할래 저거 할래 끼어들기나 하고,
뭐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실수투성이쟁이이다.
하지만 그것이 당연하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첫 시도이고,
아직 연습 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완성된' 어른이 '연습생'인 아이를 자꾸 지적질하면
아이가 잘하게 될 수가 없다.
서툰 꼴을 못 봐서 대신해주는 것 역시 그렇다.
아이가 혼자 우유갑을 열겠다고 그 꼬질한 손으로 우유팩 입구를
쥐어뜯어놓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 '하지 마, 이리 줘'하고 뺏어버리는 건
아이들이 연습할 기회를 빼앗는 것이다.
아이들이 집 아니면 어디서 그렇게 덤벙대고 실수하며 연습해 볼 것인가.
아이가 클 때까지 영원히 쫓아다니며 대신해 줄 생각인가.
물론, 아이라서 아직은 힘이 모자라고
어른의 도움 없이는 해낼 수 없는 일들도 있다.
그래도 한번 시도해 볼 수 있게는 해 줄 수 있지 않은가.
직접 해보고 안 되는 것을 알면, 아이들도 '도와주세요'라는 말을 꺼낼 수 있게 된다.
본인들 생각엔 자기도 할 수 있는데 어른들이 막고 방해한다고 생각하면,
아이는 내내 떼를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은 웬만하면 그냥 해보게 내버려둔다.
정말 위험한 것, 사회에서 금지되는 것이 아닌 이상 일단 해보게 하는 것이 나의 육아 원칙이다.
다행히 아이는 예민하고 눈치가 빠른 편이라,
한번 해보고 안될 것 같은 것은 바로 도움을 청했고
오히려 도전의식이 약해서 나는 아이가 잘 못하는 것도 여러 번 도전해 볼 수 있게 더 부추겼다.
집에서는 물론 놀이터를 나가도 여기저기서
'위험해' '이리 와' '안돼'라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온다.
아이가 흙을 만지면 더러워서 안되고, 정글짐에 올라가면 위험해서 안되고,
뛰어다니면 넘어져서 안되고. 안 되는 것 투성이이다.
나는 그런 소리를 제치고 그냥 아이가 철푸덕 흙장난을 하게 놔두고,
정글짐에 올라갈 수 있게 엉덩이를 받쳐주고,
다른 사람과 부딪히지 않는 넓은 공간에서 실컷 같이 뛰며 놀아주었다.
놀이터에서 놀다가 크게 다쳐봤자 다른 아이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만 아니라면,
어딘가 부러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도 아이가 다치는 것은 싫지만
다칠 것이 겁이 나 제대로 놀지도 못하는 것이 더 싫다.
어차피 대부분 공공주택에서 사는 아이들이 놀이터가 아니면 어디서 뛰어논다는 것인지,
물론 걱정되는 마음으로 그러는 어른들 생각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어차피 조금만 더 크면 죄다 학원에 있는 친구들 탓에
놀이터에서 놀 수도 없는 아이들을 맘껏 놀 수 있는 나이엔 그냥 놔뒀으면 싶었다.
이것은 조금 개구쟁이였던 내 어린 시절이 떠올라서이기도 하다.
나는 크면서는 얌전하고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자랐지만,
어릴 적 그 골목길 주택에 살던 시절에는 일명 '골목대장'이었다.
내가 특별나게 대장 기질이 있거나 힘이 세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고
내 기억엔 그 골목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아이여서 동생들을 몰고 다녔던 것 같다.
그래도 '어린 시절'이라고 회상하면 그 골목길에서 동생들과 잡기놀이를 하며
골목대장으로 놀았던 그 시절이 손에 꼽히는 가장 행복한 기억 중 하나이다.
나의 아이도 지금 철부지처럼 놀이터에서 신나게 뛰어노는 이 시절이
어른이 된 언젠가 떠오르는 행복한 기억이길 바라고 있다.
오늘 이 주제가 떠오른 것은 바로 전 날 있었던 아이와 남편의 갈등 때문이다.
남편의 육아에 대해서는,
다 털어놓으면 끝없는 한풀이가 될 것 같지만 대충 표현하면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고 고쳐주지 않아, 너무 큰 흠만 메워주고 있다..
전 날 아이가 갑자기 햄스터가 키우고 싶다고 해서 가족회의를 했는데,
아이는 이전부터 동물을 좋아하지만 이전까지는
아무래도 본인 스스로를 챙기는 것도 서투르기에 이래저래 미뤄왔었다.
하지만 한 살 더 먹은 아이는 예전의 내가 햄스터를 처음 키워봤을 때처럼은 자랐고,
또 계속 동물을 키우고 싶어 했기에 내 생각으론 아이에게 새로운 경험으로서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남편은 내내 아이를 불신하고 있었는데,
어제 기어코 '네 방도 못 치우면서', '용돈은 다 펑펑 쓰면서'라는 말로
제 몸 하나 못 챙기는 네가 동물을 키울 수 있겠냐는 입장을 고집했다.
남편의 단점으로는 한 가지 생각이 꽂히면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해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는데, 어제도 그랬다.
내가 아이가 실행할 수 있는 계획을 짜주고,
아이에게 다시 확인시켜 주고 아이가 살피고 다시 조율해서
본인이 할 수 있다는 의지를 내비쳤는데-물론 이렇게 말만 하고 아이가 못 지킨 적도 많긴 하다-
아이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아빠는 널 못 믿는다'는 입장을 고집하다 아이를 울렸다.
아빠가 못 믿으면,
엄마가 못 믿으면,
집에 있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아이를 못 믿으면
밖에 있는 그 누가 아이를 믿어주겠냐고 내가 남편을 설득했다.
아직 믿음이 안 갈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아이에게
아직 해보지도 않은 일을 '못할 텐데'라고 누르지 말자고 했다.
하물며 그냥 장난감이 아니라, 생명을 데려오는 일이라 무엇보다도 책임감이 필요한 일이고
나 역시 아이의 이번 약속은 철저히 지켜지도록 관리할 거라고 그렇게 타협했다.
나도 그냥 무조건적으로 아이를 믿는 것만은 아니다.
특히 아이가 아직 조절이 안 되는 미디어 사용과 돈의 소비에 대해선,
몇 번을 자율에 맡겨보았지만 지금 나이로는 판단력이 떨어지는 것이 확인돼서
적절히 옆에서 조절해주고 있다.
다만 경계하는 것은 아이가 지금까지 못했으니 앞으로도 '못할 거다'라고 속단하는 것이다.
아이는 앞으로 점점 잘하게 될 일만 남아있다.
아이들은 모두 0에서부터 배워가는 단계이니 당연한 것이 아닐까.
부모는 옆에서 아이들의 속도를 보고 그 단계를 파악하고 조절만 해주면 된다고 생각한다.
아이는 부모가 믿는 만큼 자란다.
나는 우리 아이가 본인이 마음먹은 것은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으로 자랄 것이라고 무조건 믿는다.
갂나의 찌그러진 인격체가 불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