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동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소리 없는 외침
요즘 아이를 한 명만 키우는 집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동네는 아니다.
그리고 내 주변 지인들도 아니다.
나는 아직 기사와 온라인에서만 접해보는 외동아이가 많은 동네가 그리울 정도로
보통 둘, 셋의 아이를 키우는 집이 많은 동네에서
꿋꿋이 버티며 살아가는 나는 엄마들 사이에선 조금 외롭다.
나는 처음부터 둘째를 낳을 생각이 없었다.
누군가는 처음부터 아이는 둘 이상을 계획했던 것처럼 말이다.
구구절절 다른 엄마들에게 터놓을 수는 없었지만,
이곳에서 대나무숲으로 얘기를 꺼내보자면 나는 동생을 매우 미워하며 자랐다.
나의 주보호자인 엄마는 나의 기억속에서 끊임없이 동생을 나와 비교했다.
동생이 무언가 뛰어나고 특별한 아이였다면,
나 역시 그런 동생을 부러워하고 동경하며 자랐을텐데
객관적인 수치로 보았을 때 그렇게 뛰어난 것 없던 동생의 장점 하나는
나의 단점 열 개로 되었고, 나의 장점 하나는 동생에게 비교하면 그냥 별거 아닌 것이 되었다.
자라면서 그게 늘 마음아팠고 속상했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 가정을 꾸렸을 땐 그 아픈 기억이 되살아나
나는 둘을 사랑할 자신이 없었다.
태어났을때부터 사랑하게 된 나의 아이를
존재하지도 않는 동생이라는 존재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싫었고,
그렇다고 또 동생이라는 존재를 외면하며 키울거면 굳이 낳을 필요가 있나 싶었다.
그런 나의 굳은 의지는 둘 이상은 키우고 싶다는 남편이 육아에 매우매우 소극적이면서 더 굳어졌고,
그 와중에 나는 임신 기간 내내 입덧을 하며 괴로웠던 기억이 불쑥 살아났으며
또 중간에 공황장애 진단으로 약을 1년 이상 복용하며 둘째를 가질 타이밍을 영영 놓쳤다.
큰 나이터울을 감안한다면 지금도 가능은 하겠지만,
원래도 원치 않던 둘째를 이제와서 키울 생각은 더더욱 들지 않기에 우리 아이는 외동으로 확정되었다.
아이가 어릴 땐 "동생 안 낳아요? 둘째 없어요?"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리고 "힘들어서요. 아직은요."라고 허허실실 웃으며 넘어가곤 했다.
다행히고 아이가 한참 동생이 생길 나이이던 3-4살 즈음엔 코로나 시기가 겹쳐
다른 사람과의 접촉이 많지 않을 때라 더이상의 뒷말 없이 잘 넘어갔던 것 같다.
오히려 아이가 꽤 자란 7, 8살이 되고
다른 아이 친구의 엄마들과 혹은 친구들과의 만남이 잦아지면서 이 질문은 무시와 배척으로 변질되었다.
아이를 한 명 키운다고 말하며 여러가지 반응이 있는데,
호의적으로 "요즘 한 명도 키우기 힘들죠."라는 반응은 열 명 중 한 명으로 가장 고마운 반응이다.
당황스럽게도 열 명 중 절반의 반응은 이렇다.
"하나니까 쉽겠네요."
나는 이런 반응이 같은 엄마들에게서 나온다는 것이 놀랍다.
심지어 이런 말을 가장 처음 내게 했던 사람은,
첫째 아이가 태어나서부터 매우 예민하고 잠도 안자서 불편하다고 토로했던 지인이었다.
지인은 애초의 자녀 계획이 둘이었기에 첫째의 까탈스러움과는 별개로 둘째도 강행했지만,
만날 때마다 여전히 첫째 양육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반대로 묻고싶었다. "첫째만 키울 때 쉬웠어?"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둘이라고 딱히 어려울 게 뭐냐는 말이 아니다.
나는 비유로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며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한 마리를 더 들여 키워본 적 있다. 처음 키우던 강아지가 무던하고 키우는데 큰 문제 없었기에
둘을 키우는 것도 어렵지 않을거라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예쁜 강아지라도 둘을 돌보는 것은 노력이 두 배가 아니라 한 다섯 배는 드는 일이었다.
강아지라는 종을 제외하고 완전히 다른 개체인 두 마리는 하는 행동, 식성, 성격 모두 달랐기에
맞춰야 하는 것과 생각해야 하는 것, 나의 마음 고생이 다섯 배 이상으로 들었다.
다만 둘을 키우며 느낀 것은 두 마리가 집에 남게 되었을 때 서로 의지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
단지 그것이었다.
나는 그것만을 위해 둘을 키우고 싶진 않았다.
피보다 진한 우정은 없다는 말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때문에 둘을 키우기엔 내 체력과 마음이 넉넉하지 않아서이다.
그리고 나는 당연히 둘 이상의 자녀를 키우는 엄마들의 고충도 이해한다.
또 한편으로는 그 길을 선택한 것이 그들이니까 책임도 그들이 져야한다고 생각한다.
본인들이 선택한 길이, 다른 외동아이를 키우는 길을 선택한 나를 무시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이 하나 키운다고 그냥 쉽게 방치하며 키웠다면 그냥 그런가보다 했겠지만,
나는 나의 마지막 아이일 이 아이 하나를 키우느라 나의 모든 노력을 다하고있다.
이 아이의 성격과 기질을 파악하려고 끊임없이 아이를 관찰해왔고,
아이에게 어려움이 있을 땐 비슷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수십 건 이상의 해결방안을 찾아왔다.
아이가 혼자 어엿한 어른으로 자라길, 본인의 존재만으로도 자긍심을 갖고
어디서나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길 바라며 그렇게 키우고 있다.
아이가 하나라서 아이가 원하는 것 모든 것을 우쭈쭈 하는 게 아니라,
둘, 셋 키우며 쓸 여러 노력을 그냥 이 아이 하나에게 올인하며
하루하루 열심히 아이와 함께 성장하는 것을 보람으로 삼고있다.
그런데 단지 그 대상이 한 명이라고 내 노력을 가볍게 여기는것은,
그 동안 내가 들인 노력과 눈물을 돌이켜 봤을 때 나에겐 너무 속상한 일이다.
아이가 둘이라고요?
그 아이들 모두 최선을 다해 키우시고 계신거 맞죠?
본인이 둘 낳기를 선택했으니 그만큼 책임지고 열심히 키우신거 맞죠?
아이를 한 명만 키우든,
심지어 여러가지 또 다른 이유로 결혼을 했지만 자녀를 키우지 않든.
그냥 같은 엄마인데 응원해줄 수는 없는걸까?
지금은 학생이라는 신분을 얻을만큼 자랐지만
나는 아직도 매일 아이가 사랑스럽다.
그리고 위에도 언급했던 것처럼 처음봤을 때부터 그 작고 쭈글쭈글한 아이가 사랑스러웠다.
신생아 때 한창 그 하찮은 데시벨로 울어대는 소리도 정말 귀여웠고
우유밖에 못먹고 싸는 그 푸르딩딩한 변마저도 귀여웠다.(물론 콩깍지도 크게 씌어있었다.)
순간순간 자라는게 아쉬워서 사진도 동영상도 저장 용량 추가를 거듭할정도로 쟁여놓고도
예뻐서 안아지고 뽀뽀해주고 그렇게 키웠다.
주변에서 둘째를 낳으면 하는 소리가 있었다.
"다시 아기 냄새를 맡으니 참 좋다"
"큰 애가 한참 떼쓰는데, 응애 우는 아기보니까 귀엽다"
이렇게 아기라서 예쁘다는 말들을 하고, 반대로 아직 어린이인 첫째는 좀 크게 느껴진다고들 했다.
난 둘째도 언젠가 어린이가 되고 또 학생이 되고 어른이 될 거란걸 알고있기에,
그 잠깐인 기간동안 아기를 또 보고 싶어서 둘째를 낳을 순 없었다.
그리고 그런 아기가 궁금하지 않을정도로
난 현재 귀여운 내 아이가 또 어떤 청소년으로, 어른으로 자랄지가 궁금하다.
과거를 크게 뒤돌아보지 않는 성격의 영향인지,
아이의 아기때가 그리우면 그냥 저장해둔 동영상을 살펴본다.
그리고 매 순간 열심히 사랑해왔기에 우리의 과거에 후회는 없다.
아이를 무한정 낳을 수는 없으니까,
아이가 둘, 셋인 지비도 언젠가 아이들은 모두 자란다.
나는 엄마들이 "어릴 때가 좋았지. 그땐 귀여웠지."라고 말하면
아이들 입장에선 참 속상할 것 같다.
자라는 것은 그저 자연의 순리일 뿐이지 본인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그저 부모 눈엔 언제까지나 사랑받아야 할 존재이다.
어리고 귀여울 때만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당연히 아이가 어렸을 때의 그 귀여운 모습이 그립고
그 아이와 함께 젊었던 시절의 내가 그리울 수는 있지만,
그리울 땐 옛날을 추억하고 다시 현실에서의 아이도 듬뿍 사랑해주면 좋겠다.
아이들은 모두 사랑받아야 하니까.
그 집에 아이가 하나든, 둘이든, 셋이든 그게 중요한다.
요즘 같이 아이가 귀할 때에 모두 사랑받으며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 좋은 거 아닐까.
누구네는 어떻더라, 눈 흘기지 말고 그냥 모두 예쁘더라, 하는 눈으로 바라보면 좋겠다.
그냥 손잡고 잘 키우고 싶다.
우린 적이 아니고 동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