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의 낯선 문화 1
아이가 혼신의 힘을 다해 운다.
어른이 옆에 있지만 눈길한번 주지 않고, 차분하게 대화를 한다.
내가 도쿄에서 맞딱드린 장면 중 가장 낯선 일이다.
하루에도 몇번이나 이런 장면을 마주하게 된다.
우는 아이 엄마가 평온하게 있거나, 산책 나오는 어린이집 카트에 탄 4명의 어린 아이 모두 울어도 선생님은 묵묵히 카트를 밀며 어딘가 가야할 곳에 열심히 간다.
전혀 그 일이 본인의 일이라는 생각이나 느낌은 그 얼굴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왜 우는 아이를 달래지 않는 걸까?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이들이 아이의 울음에 대해서는 예외라고 생각하는 걸까?
프랑스 육아에서 떼쓰거나 우는 아이에 대한 일관된 무시로 아이가 떼쓰지 않도록 성장하게 한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다. 그러나, 내가 아는 프렌치는 모두 수다스럽고, 논쟁 자체를 지리도록 즐긴다. 오죽하면, 한명의 대통령과 6천만명의 왕이 사는 나라라고 표현되었을까! 어떤 형태로든 아이의 표현이 묵살되지 않은 문화임이 분명하다.
아들을 출산한 직후, 베이비 위스퍼라는 당시 교과서 같았던 책을 보고 나 또한 잠시 그랬던 적이 있었다. 배고프거나, 기저귀의 문제가 없거나, 아픈것, 이 세가지의 경우가 아니라면 아이가 울어도 그냥 두라는 내용을 인상적으로 보았다. 그래서 밤마다 우는 아들은 그대로 보고 있으면, 당시 산후 조리를 위해 함께 머물던 친정 부모님이 잠을 깨어 오셔서는 아이 좀 제발 안아주라는 말씀을 하시곤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여전히 밤의 어두움에 대한 간헐적 깊은 공포가 있는 아들은 아무도 오지 않는 그 상황이 얼마나 당황스럽고 무서웠을까? 헤아려보다 가끔 다 커버린 자식에게 사과하곤 한다. 그 마저 아이마다 다른 해결책이 있었을텐데 너무 일괄적 결론을 받아들였던 엄마의 실수라고.
무엇이 우월하고, 무엇이 맞는지 특히 육아에 있어서 간결한 해답은 없다.
동양 문화권, 그것도 가장 가까운 바로 옆 나라는 아이의 울음에 대해 우리가 대응하는 방식과 가장 먼 방식을 취하고 있는 이런 장면을 마주할때마다 그저 낯설고 신기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