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 지침서
너무 당연하게도 우리는 인생의 모든 것을 내 입장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사소한 점심 메뉴부터 뉴스로 접하는 지구 반대편 소식까지 나와 관련이 있든 없든 항상 1인칭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제3자, 관찰자로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소개받는 것은 언제나 환영할 일이다. 내가 일말의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들을 당연하지 않게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귀한 통찰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정신과 면담의 한 측면을 소개하자면 무의식적인 것과 3인칭 관점을 내면화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1인칭 중심에서 3인칭 관점으로 확장하는 과정의 긴 마라톤인 셈이다.
치료를 종결할 때쯤에는 환자가 스스로 면담을 진행하듯, 내적인 질문과 대화를 통해 자신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다룰 수 있게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렇다면 3인칭 관점으로 뭐가 달라지나?
자신의 과거에 대한 고정된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
면담을 하다 보면 도무지 믿기 어려운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듣게 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진위여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게다가 시시비비를 가리고 증인을 데려와서 사실여부를 알아낼 수 있다 하더라도 큰 가치는 없다. 환자의 관점과 내면에서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에 일어난 일을 해석해서 아동기에 재작업하고, 청소년기에 재작업하고, 성인기에 재작업한다. 환자에게 진짜로 일어났던 일이지만, 기억은 진짜로 일어났던 일을 바라본 많은 가공된 시각들 중 하나일 뿐이기도 하다. 이는 긴 마라톤을 통해 변화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시각을 바꿔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고통을 덜어낼 수 있다.
가끔은 의식적으로 나를 멀리서 바라보자.
내가 당연하게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도 한 번쯤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이라면 당연하게 느끼는 외로움에 대해서도 제3자가 되어 생각해보자. 내가 나에게 자문을 구해볼 수도 있다.
나는 많은 친구들보다는 적은 수의 깊은 관계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왁자지껄한 자리보다는 소규모의 모임을 선호하며, 그 소규모 모임에는 나만의 고요한 시간이 포함된다.
그런데도 가끔은 할일없이 침대에 누워 친구들의 활발하고 화려한 sns를 보고 있노라면 외롭다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외로움에 대해 입 밖으로 꺼내본 적은 없다. 언제부터인가 외로움은 부끄러운 증상이 되었다. 외톨이임을 인정하는 것은 친구들이 따를 만큼 매력적이지도 않고 친구들을 모을 만큼 능동적이지도 못한 비적응적인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꼴이 되었다.
'존재의 고독'이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외로움을 느낀다.
그런데 언제부터 외로움이 부끄러운 감정이 되었나?
이게 당연한 것인가?
19세기까지만 해도 고독은 중요한 덕목이자 강인함의 원천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19세기경 산업화를 겪고 도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사교활동이 늘어났고, 역설적이게도 외로움이 심해졌다. 도시에서의 생활은 사교활동에 대한 강박과 환상을 심어줬지만,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을 때 외로움이 깊어진 것이다. 고독이라는 개념이 큰 변화를 맞으며 결핍, 부끄러운 외로움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전화기가 세상에 나올 때쯤에는 연결되기 위해 전화기가 필요하다는 광고로 외로움에 대한 공포를 이용하기도 했다.
비슷한 맥락으로 요즈음의 sns는 연결이라기보다는 FOMO(fear of missing out)를 공유할 뿐이지 않나?
즐거운 고독을 의미하는 'solitude'라는 용어의 사용빈도가 감소하며, 외로움을 뜻하는 'loneliness'라는 용어의 사용빈도가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고독과 외로움을 구분하는 능력이 점점 퇴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쩌다 찾아오는 고독과 고요함을 즐거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나만의 시간을 1인칭으로만 바라본다면 부정적인 외로움, 개선해야 할 문제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관찰자가 되어 3인칭으로 바라본다면 나만의 소중한 시간, 어떤 방식으로든 활용할 수 있는 무궁무진한 기회가 될 것이다.
고독의 긍정적 의미를 회복하려면 관찰자가 되어 나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