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봐야 아는 것들
하지만 이상하게 들뜬 마음과는 달리 몸에서 열이 출국 3일 전부터 내려가지 않는다.
지난달에도 열이 있었던지라 당분간 아플 일 없겠다 했는데.
그렇게 고열에 땀을 흘리며 14시간 만에 공항에 도착했고
집에 와서 반가운 인사도 잘 못했다.
요 며칠 아팠다고 건강이 이렇게 중요하구나를 다시 배운다.
한국으로 가는 공항 게이트서부터 모든 일들이 척척 일사천리다.
모두가 빠르고 모두가 손발이 잘 맞는 이 신기함.
저녁을 먹다가도 내가 소고기를 집으면 어느새 냉장고에서 내 앞까지 고추장이 배달 돼 있다.
택시를 탈 때도, 수속을 밟을 때도, 승무원과도, 가족들과도
뭐가 없으면 없다고 말하기도 전에 모든 것이 해결되어 있는 이 편안함.
세상에 두려움 따위는 없이 내가 뭐가 되고 싶은지 그것만 중요하게 여겨주는 부모님의 교육관.
그게 뭐든 최대한 멀리 넓게 크게 가라고.
밤늦게 갑자기 서울 구경 간다고 중고등학생 딸들이 말해도 보내주시고
걱정보다는 얼마나 즐거웠는지, 평범한 동네를 떠나 서울시내는 어땠는지 궁금해하신다.
어느 날 갑자기 '나 내일 제주도 놀러 가' '나 다음 주에 프랑스가'라고 해도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30대가 넘어 집에 언제 돌아오는지 카톡을 받을 때면
'아 내가 좀 무심하구나' 하고 늦을 거 같으면 미리 문자를 남기곤 한다. 이제야.
모든 게 빠르고 모든 게 자유로운 환경에서 살다가 정반대의 사람과 결혼을 하고 새로운 나라에 사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사실 쉽지 않다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냥 말도 안 되는 바보 같은 나라에 바보 같은 사람에 바보 같은 남편이라고 그냥 혼자 열폭 급행을 타곤 했다.
모든 조건이 안 맞고 어렵고, 매일 향수병에 포기를 고민하는 이 결혼이었지만 반대로 그 누구보다 잘 완성시키고 싶은 이 마음은 뭘까.
열이 식느라 다시 몸에서 땀이 폭포처럼 나기 시작한다.
내일은 일요일이지만 열린 병원은 왠만한 도보거리에 있다. 이것마저 편하다. 내일은 병원 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