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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킴 Jun 29. 2024

딱 두 배 오른 연봉.

영국에 오고 4년 만에 드디어 정규직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작년 3월부터 풀타임, 매달 롤링 컨트랙트로 재택근무 하고 있는 현재 게임회사는 다음 주 금요일까지 일하기로 하고 어제 퇴사 의사를 밝혔다. 급여며, 모니터링이며 여러 가지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있으니 이직 준비를 열심히 했지만 막상 이별을 고하니 아쉬움만 남는다. 외국이라고 그래도 성질이 많이 순해진 거 같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냥 "내 길은 이거야!" 라며 인종도 종교도 다른 프랑스인 남자 친구와 결혼하겠다고. 브렉시트 전에 허겁지겁 영국으로 넘어왔다. 사실 겉으로는 안보였겠지만 속으로는 이 년 전부터 매일 울었다. 그냥 이렇게 사서 고생하며 사는 게 내 운명인 거 같아서. 


중산층에 행복한 삼 남매에 부모님도 헌신적이고 집도 넓고 여행도 자주 다니고 어디 가도 존중받는 그런 삶이었다. 셋 다 속 안 썩이고 활동적이고 진취적인 와중에 나는 왠지 뻔하게 사는 건 싫어서 적당히 특이하고 적당히 안정적인 미술을 공부했다. 대학 다니며 사춘기가 왔는지 자취도 하고 신나게 멋있게 놀고 하고 싶은 공부도 하고 술도 왕창 마셨지. 그리고 졸업하고 벽화 하며 여행 다닐 때가 제일 좋았다. 그때 사진 보면 표정부터가 다르다. 

 제주도에서 일 년 정도 살다가 갑자기 남아공에 영어공부를 하러 가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다음 해 육 개월 어학원 끊고 가버렸다. 아니 그때 남아공에서가 제일 좋았던 것 같다.


 그리고 거기서 지금 남편을 만났다.

1부터 10까지 나와 다른 그 남자. 온 친척 식구들이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내 성격을 아니, 아무 말하지 않았다. 외할머니만이 대놓고 말렸다. 

그리고 기어이 7년 만에 결혼을 했다. 하고 싶은 건 하고야 만다.

그전부터 나는 "얘랑 결혼하려면 외국에 나가 살 테고, 그러면 나는 기술이 있어야 돼"라고 아무도 동의하지 않은 (그 당시 내 남자 친구이었던 지금 내 남편조차) 시나리오에 혼자 3D를 배웠다. 어차피 자유로운 인생에서 벗어나고 책임을 져야 할 나이긴 했다. 스물일곱.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 강남 학원에 가서 공부하고 저녁 여덟 시 넘어 집에 왔다. 힘들게 해서 남들 6개월 배울 동안 나는 3개월 만에 취업해 버렸다. 

 능력인지 운인지 첫회사도 내가 생각했던 취향의 회사였다. 스타트업이라 임원들, 팀장들이 모두 선하고 같이 하고자 하며 텃세 없고 배우기 좋고 재밌게 다닐 수 있는 그런 곳. 2년을 5시간 왕복 출퇴근하다 때가 된 것 같아서 그만뒀다. 그리고 자유롭고 편하지만 마음 무거운 프리랜서로 4년. 그때는 불안함만 가득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최상의 시나리오였다. 

 회사 다닐 때보다 덜 일하고 더 벌었고 내가 하고 싶은 시간에 일할 수 있었다. 엄마 아빠 있는 포근한 집에서 퇴화하는 느낌이 간혹 드는 것 말곤 완벽했다. 그냥 즐길걸.

그 상태로 2020년 12월 휘리릭 영국으로 떠났다.

나는 불안함에 가득 찼었는데 세상 걱정 없는 남편모습에 정말 많이 싸웠다. 아무튼 심하게.

나는 매일매일 현지에 직업을 구해야 한다고 애를 썼다.  한 달 만에 면접도 봤다. 물론 떨어졌지만 감이 왔다.


감이 오긴 무슨 그러고 2년 만에 첫 풀타임 계약을 하게 되었다. 정규직은 아니었다. 오퍼 받기 한 달 전 부산 전화 사주 아저씨가 완전히 마음에 드는 직업은 아니지만 다음 달에 뭐가 들어오니 꼭 잡으라고 했었다. 안 좋은 조건이 붙는다던데 급여와 계약형태였나. 운명이라고 재밌다고 다 갖다 붙여본다.


구인글 볼 때만 해도 조건이 별로 안 좋아서 망설였던 롤이었는데 막상 수많은 탈락 이메일 속에서 나를 알아봐 주고, 받아주는 그 이메일이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다. 진짜 개인적인 감사 러브레터라도 쓰고 싶은 마음이다. 아직까지도.


당사자인 나는 내가 이 일을 잘할 수 있을까. 정규직으로 넘어갈 수 있을까. 일하며 계속 이직 준비 해야겠다. 생각이 많았지만 남편과 가족들은 마음이 많이 놓였나 보다.


그렇게 또 지겹고도 험난한 이력서 전송의 세월을 일 년 더 보냈다. 출근 시간은 7-10시 사이고 기차역 옆 카페는 일찍 문을 여니 일어나자마자 잠도 깰 겸 커피 마시며 무조건 하나 이상은 지원서를 보냈다. 


중간에 남편과 사이가 안 좋아져서 한국에서도 한번 오퍼를 받긴 했지만. 지독한 인연의 끊을 놓지 못하고 다시 영국에 돌아왔다.


두 번째 세 번째 인터뷰까지 갔다가도 떨어져 보고, 아무것도 아닌 스크리닝 인터뷰부터 긴장해서 실수도 해보고, 헤드헌터에게 위로도 받아보고, 거절만 몇 년 받다 보면 나를 의심하게 된다.


진짜 나는 아닌가 보다 하는 순간에 올해 5월 갑자기 여기저기 인터뷰가 몰려왔고 드디어... 나도 정규직 오퍼를 받았다. 지금 급여가 너무 낮아 양심 가책 느끼며 올려서 부른 연봉보다 3k 더 받으니 딱 두 배가 되더라.

기쁨과 좌절이 같이 왔다. 나름 기술직인데 최저시급에 근접한 급여를 받으며 있었던 게 씁쓸하기도 하고. 그러나 여기저기 문 닫는 스튜디오에 대규모 정리 해고 뉴스만 나오는 유럽 게임업계 현실을 깨달으며 '그래도 이거라도 잡고 있는 게 어디야'라며 거지근성과 겸손의 중간을 왔다 갔다 하곤 했었다.


이직하게 된 회사는 내가 하던 업무와는 너무 달라서 중간에 두 번을 그냥 전화를 끊으려고 했었다. 

한국시장으로 진출을 해야 된다더니 내가 한국인이라 뽑은 것 같다. 역시 결국 운인가.


근심을 놓지 못하거나 책임감 없던 허술한 인생 경영이었던 것 같은데. 사실 나는 다 가졌다.

매일 집을 그리워하는 것도 내가 다 가졌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여행도 좋아해서 가보고 싶은 데는 다 가 봤고 하고 싶은 공부도 했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도 했고, 그냥 딱 안정적인 직업 가지고 싶었다. 근데 또 가졌다. 가지고 보니 막 좋지만은 않은 인생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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