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각선생 Aug 03. 2023

언니 저 맘에 안 들죠? 2탄

유종의 미는 일단 접어두고 얻은 깨달음

집에 돌아오는 내내 멍청하단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언니? 멍청?

내가 너무 만만했나?

이 일을 하면서 아직까지도 나를 언니라 부르는고객님은 없

언니는 넘기고  멍청은 심하게 선 넘은 거 같은데


다시 또 그 집을 가고 싶지 않았다

밤새 고민하다 고객님께 문자를 보냈다

여태껏 일한 건 안 받을 테니 다른 업체 구하시라고 했다

내가 부족해서 고객님이 오늘 고생이 많았단 말과 함께 ~


그 자리에서 바로 언짢은 티를 안 냈기 때문에 고객님은 내가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른다

고객님으로부터 답장이 왔다

내가 꼭 마무리해 주길 원한다고 했다

예의상은 아님이 느껴졌다

지나고 보니 그날은 고객님도 많이 피곤해서 짜증이 났을 수도 있겠다 싶다

그리고 고객한테 그런 말 한 번 들었다고 하네 못하네 하는 것도 어딘가 쪼잔해 보여 혼자 쿨하게 잊기로 했다

그래 ~ 시작했으니 마무리까지 유종의 미를 거두자


어쩐 일인지 한 만큼 속도가 나질 않는다

다시 찾은 고객의 집은 여전히 할 일 투성이다

직접 하면 금방 끝날 일도 남이 하면 훨씬 오래 걸리는 것들이 있다

본인만 아는 각종 서류나 추억의 물건은  직접 정리하는 게 좋다

그런 것까지 다 내 손을 거치다 보니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간다

게다가 고객님은 반나절 집을 비우기도 했다

운전 중이라 아무 때나 전화해서 물어보기가 불편한 상황이다

일 하다 보면 내 맘대로 결정할 수 없는 것들도 많다

고객님 부재로 바로 해결할 수 없는 물건들은  일단 따로 뺐다

불필요한 시간낭비가 한번 더 생긴 셈이다


원룸정리의 기본은 잘 쓰는 물건과 자주 쓰지 않는 물건을 적절하게 분리시는 거다

버릴지 말지, 잘 쓸지 말지, 여부에 따라 들어가는 위치가 달아진다

공간 제한이 많은 원룸에선 적절한 위치에, 적합한 물건만, 적당히 두는 작업이 생명이다

단순히 보기 좋게 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작업이라 볼 수 있다

제 아무리 호텔급 정돈을 마쳤다 해도 모델하우스가 아닌 이상 생활하면 다시 흐트러지게 마련이다

효율적인 공간분배를 위해 이 작업이 대충 되면 전문가를 부르는 의미가 사라진다


외출 후 돌아온 고객님은 새끼강아지를 데려 왔다

강아지에 정신이 팔려 컨펌은 하는 둥 마는 둥이다

강아지는 오자마자 내 작업 시트에 영역표시 한번 시원하게 해 주고, 그야 말고 개판이다

어째 어째 정리를 마치고 집을 나서는데, 문 앞에 버릴 걸 모아 둔 옷과 신발이 놓여 있다

마지막까지 유종의 미를 생각하며 의류수거함이 어딨냐 물으니 모른단 건조한 답변이 돌아온다

밖에 가다 보면 어딘가 있겠지 싶어 일단 들고 나왔는데 밤이라 그런가 눈에 안 띈다

쫌 찾다 결국 우리 동네 의류 수거함까지 와서야 버릴 수 있었다

무거웠지만 부피가 있어 아무 데다 버리고 올 수가 없었다

집까지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열심히 환승해 가며 이게 머라고 손에 고이 들린 내 모습이 참 초라하다

마지막 신발 한 짝을 수거함에 마저 넣으며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었단 그거 하나로  만족 하기로 했다


그렇게 잘 마무리되었나 싶었지만 결국 유종의 미는 거두지 못했다

서로에게 상처만 남긴 채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별거 아닌 사소한 거였지만 그간 꾹꾹 눌렀던 감정이 나도 모르게 올라왔던 탓일까?

그렇게 고객과의 첫 컴플레인이 발생하고 당분간 나는 일 자체가 하기 싫어졌다

" 내 그릇이 이것밖에 안돼 결과가 이런가? 만약 다른 업체였다면 어땠을까?

일 한만큼 돈이라도 남았다면 기분이 덜 나빴으려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따지고 보면 고객님은 내게 비싸니 깎아달라 말한 적도 없고 몸이 아프니 일을 시키지 말라 부탁한 적도 없다

나 혼자 지레 짐작해서 내 맘대로 선의를 베푼 것들이다

난 이렇게 많은 혜택을 주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서운함을 가진 내가 어찌 보면 질했다고 본다

장사하는 사람이 수지타산도 고려하지 않고 감정에 휘둘려 견적을 내질 않나

일방적인 선심을 쓰고 생색을 내질 않나

사장 그릇을 키워야겠다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일할 땐 나만의 작업 매뉴얼이 있다

1.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의 경계를 확실히 한다

2. 작업 능률을 위해 하루 8시간만 일한다

3. 주먹구구식으로 일하지 않는다

4. 체력이 바닥나지 않게 조심한다

5. 전문분야를 최우선으로 한다 자신 없는 일에 시간낭비 하지 않는다

6. 고객을 희망고문하지 않는다(예: 내가 다 알아서 해줄게요)

7. 불필요한 완벽주의를 버린다 시간 내에 마치는 것도 실력이다

8. 감정에 휘둘려 견적 내지 않는다


당시 속은 좀 쓰렸지만 지나고 보니 제대로 공부했다

그때 유종의 미로 아름답게 마무리 됐더라면 아직도

정신 못차렸을 듯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언니 저 맘에 안 들죠? 1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