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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하고, 올레

올레 걷기 부록 : #1 영실

by HONEY

새벽 네 시에 호텔을 나섰다. 목적지는 한라산 영실(靈室). 제주를 사랑했던 어떤 이는 그곳에 “봄에 진달래꽃이 피면 미쳐 버리고 싶어 진다”라고 했다.* 사람을 홀리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고 출발했다. 유월이었지만 아침 기온은 9도로 쌀쌀했다. 설렘과 함께 싸늘한 중산간의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첫새벽에 일어나 몽롱했던 기분이 싹 가시었다. 산 위에서 일출을 보려고 새벽 세 시반에 도착해서 기다렸다는 대구 아재도 네 시 오십 분에 도착한 서울 아저씨도 같은 시각에 산을 오를 수밖에 없었다. 주차장 차단기가 다섯 시가 되어서야 올라간 때문이었다. 남보다 먼저 출발하면 더 일찍 도착할 수 있겠다고 생각할 때가 많지만 인생은 쉬지 않고 가는 자가 먼저 도착하는 법이다.

조금씩 밝아지는 산길을 천천히 올랐다. 해발 1,700미터에 있는 윗세오름 휴게소가 최종 목표였다. 산을 오를수록 어두움도 물러났다. 아래에서는 실루엣으로만 보이던 바위들이 눈에 들어왔다. 설문대할망의 아들들인 오백 장군이 늠름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철쭉제가 끝난 바로 다음 날이라 TV 화면에서 보았던 분홍빛의 파도를 기대했다. 기상 이변은 한라산이라고 피해 갈 수 없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작은 꽃봉오리들이 피지도 못하고 얼어버린 것 같았다. 싸늘한 바람이 계곡에서 끊임없이 올라와 구상나무를 흔들고 철쭉을 사정없이 후려치며 지나갔다. 작고 약한 꽃이 이런 추위를 견디기는 힘들었을 것 같았다. 등산객들의 얼굴도 때아닌 차가운 바람에 얼어붙고 코끝은 빨개졌다. 보이지 않는 꽃을 아쉬워하며 셔터만 눌러대다가 계속 올랐다. 숨이 차다고 느낄 때쯤 산지 위에 너른 평원이 펼쳐졌다. 1,700의 고지 위에 그렇게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다니. 그것만으로도 놀라움 그 자체였다. 게다가, 그곳에서 올려다보이던 백록담 봉우리 절벽은 경이로웠다. 검은색의 절벽은 해가 완전히 올라오기 전 그늘이 드리워져 신령스럽기까지 했다. 우람한 사내의 모습이었다. 백록담 절벽 위로 떠오른 햇무리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거기까지 오른 등산객의 수고에 대한 보상으로 충분했다.

윗세오름 휴게소에서 새벽 등산의 즐거움을 마음껏 즐기고 내려가며 넓게 펼쳐진 선작지왓을 다시 보았다. 세찬 바람을 오래 받아서인지 나무들도 납작 엎드려 있었고 구부러지고 서로 얽혀 위로 쭈욱 뻗은 나무는 볼 수 없었다. 저들의 살아남는 방식이었을 터였다. 생각해 보니, 나도 그렇게 세상에 적응하며 살았다.

* 오름 나그네 - 김종철


백록담 절벽위로 햇무리가 졌다. 영실의 고사목과 철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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