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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d eye Apr 23. 2016

하늘나무에 별이 열리다

풋풋한 20대 초에 누구나 있는 일

나무는 봄이 되면 아름다운 눈을 갖게 된다. 눈은 새 생명을 잉태한 고귀한 상징이 되기도 한다. 여름에는 수많은 잎을 가지고 위엄을 가지고 서 있다. 그 천연의 녹색은 아름다움과 더불어 위엄까지 가지기도 한다. 가을에는 그 간의 결실인 열매를 맺기도 하고, 노랗게 혹은 빨갛게 단품으로 물을 들여 미적인 감각까지 보여준다. 하지만 겨울에는 그 많은 잎을 거름으로 내주고 인고의 시간을 지내게 된다. 하지만 그 긴 겨울의 나무는 얼마나 괴로울까? 나는 겨울에 나무가 외롭고 괴로울 거라고 항상 생각했었다. 수많던 잎을 떠나보내고 앙상하게 뼈만 남긴 나무는 우리들은 언제나 슬픈 모습으로 기억해 왔을 것이다.

 “여보세요? 아, 나야. 잘 지냈어?”

 “응……. 너는?”

 목소리에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단지 마른나무 가지에 잎이 하나도 없는 쓸쓸함만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두 남녀, 서로가 보이지 않는 벽에 그저 소리만 내는 거 같았다.

 “응. 잘 있었어. 뭐해?”

 “지금 뒤풀이 중이야. 이제 노래방 갈 거 같아.”

 “그래?”

 잠시의 침묵은 대화를 더욱더 건조하게 만들었다.

 “할 말 없으면 끊는다.”

  여자는 전화를 끊고 싶었다. 아니 전화를 받는 것이 귀찮아 보였다.

 “응?”

 “끊는다……. 끊는다. 안녕.”

 여자 쪽에서 전화를 끊었다.

 딸깍 소리와 함께 이렇게 짧은 대화는 끝이 났다. 수화기를 잡은 까맣고 거친 손은 떨리고 있었다. 손을 따라 어깨로 올라가 옷깃 위의 까맣게 타버린 목덜미 위 그리고 그 옆으로 수화기의 처량한 모스 부호만 듣고 있는 그의 귀, 마지막으로 아주 미세하게 공기의 흐름을 만들어 내는 그의 눈썹 끝.

 '끝인가? 정말 끝인가?‘

 남자는 내심 생각하였다. 어떻게 이렇게 된 거지?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좋겠다. 두 눈을 질끈 감고 다시 뜨면 모든 것이 다시 돌아오리라. 하지만 공중전화 유리 뒤로 줄 서 있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팔짱을  끼고 안을 자꾸 살펴보는 모습은 절대 꿈이 아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싸늘한 겨울 공기가 얼굴을 감싸 않았다. 아까의 미세한 떨림은 더욱더 커지고 있었다. 그는 가슴 한구석이 더욱더 차가워짐을 느끼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들었던 ‘끊는다’라는 말이 더욱더 그를 얼음동굴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의 힘없는 발걸음과는 달리 다음 차례의 사람은 잽싸게 전화박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도대체 무엇부터 잘못된 것이지? ’

 남자는 후회하기 시작했다.

 ‘맞아. 그때……. 나가지 말아야 했어. 그때 그 휴가를 나가지 말았어야 했어.’

 머릿속이 점점 깊은 바닷속으로 잠겨 갔다.


 “신고합니다. 일병 박남신은 20△△년 11월 16일부터 동년 동월 20일까지 포상휴가를 명 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남신은 군생활 9개월에 접어들고 있었다. 마침 배치받은 부대에서 훈련을 나가 뜻하지 않은 포상을 받았다. 게다가 늦가을, 초겨울은 군부대를 바쁘게 만든다. 10월이 지나고 11월이 되면 군부대는 정신이 없을 정도로 작업이 한창이다. 부대 내외로 추계 진지 공사를 비롯하여 동계 물품 준비, 혹한기 훈련 준비, 전투 지휘 검열, 사단 및 군단 검열로 모두가 피곤에 지친다. 장교인 중대장과 소대장들은 중대 행정병들과 각종 계획과 추후 결과 보고를 위하여 몇일씩 밤을 새우며 일을 하고, 행정보급관 이하 부사관들은 일반 기간병들과 함께 야근을 해가면서 육체적으로 시달려야 했다.

 가장 바쁘고 지친 이때에 남신은 휴가를 가기로 결심하였다. 비록 자신의 선임병들에게 눈치는 보이지만, 힘든 일을 피해 보고도 싶고, 휴가란 생겼을 때 빨리 써야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병사에게 휴가가 밀리게 될 것 같아 휴가를 사용하였다. 가장 큰 이유는 여자 친구가 보고 싶었다. 근래에 들어 편지도 줄고, 전화도 잘 받지 않았다. 게다가 어느새 전화번호도 바뀌어서 친구를 통해 그녀의 번호를 알게 되었다. 바뀐 전화번호로 통화할 때 그저 미안하다며 알려주려고 했다고 말할 뿐이었다. 그런 것들이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부대 밖으로 나오자 날아갈 것 같았다.

 ‘연주야! 기다려라. 금방 간다.’

 전날 밤에 통화를 할 때는 집으로 간다고 하였지만, 가는 길에 들려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었다. 부모님에게는 미안하지만 지금은 애인에게 달려가고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기차를 타고 2시간 동안 앉아 뒷머리가 눌렸고, 만원 버스에서 숨도 못 쉬고, 선임병이 정성껏 잡아 주었던 전투복의 줄은 뭉개지고, 얼굴이 비칠 정도로 닦았던 전투화가 밟혀도 가는 길은 즐겁기만 하였다.

 사회의 햇볕은 달랐다. 부대 안에서는 자신의 살만 태우고, 뜨겁기만 했던 그 빛이 부대 밖을 나오자 너무나 따뜻하게 느껴졌다. 공기도 달랐다. 캠퍼스의 학생들도 무척 활기차 보였다. 모든 것이 다 남신을 기쁘게 만들었다. 이제 그녀를 찾아야 한다는 목적은 눈을 밝게 만들고 걸음을 힘차게 만들었다. 아무리 먼 곳이라도 그녀를 찾아낼 수 있으리라. 남신의 입가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저 멀리에서 조그마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리라. 그 빛이 점점 커지더니 광원이 보이기 시작했다. 환한 빛으로 둘러싸인 사람이 보였다. 남신은 그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1중 대원, 막사 앞으로 집합!”

 남신은 정신이 들었다.

 ‘아, 집합인가?’

 남신은 막사 앞으로 황급히 뛰어갔다. 하나둘씩 모이던 병들은 어느새 4열로 줄을 맞추어 서고, 아직 줄을 서지 않고 무리 앞에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는 병들도 보였다. 남신은 4열 속에 줄을 맞추어 섰다. 병사들 앞으로 빨간 줄 하나가 그어져 있는 완장을 찬 다른 병사 한 명이 왔다. 줄을 보고 인원수를 세어 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오른손에 들고 있는 체크리스트판에 무언가를 적어 넣었다. 군부대에서는 항시 인원을 정비한다. 탈영에 대한 염려도 있지만 일거리가 생길 시 작업에 참여하지 않는 병사가 없도록 하기 위하여 하는 일이다. 하지만 줄 앞에서 담배를 피우던 그 무리들은 아마도 다시 막사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빗자루와 싸리비를 들고, 부대 내 주도로 낙엽을 쓸고 와라. 깨끗이 쓸어라.”

 병사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빨리 움직이는 병사도 있고 그 자리에 그냥 서있는 병사도 있다. 그리고 느긋하게 움직이는 병사도 있다. 남신은 빨리 움직이는 병사 중 한 명이다. 이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 그들의 서열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렇다면 아까 막사 안으로 들어가 버린 무리들의 서열은 두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한나, 둘, 셋, 넷. 번호 붙여갔!”

 특이한 발음으로 번호를 붙이며 인솔을 하는 병사의 지시에 따라 무리의 병사들은 부대 내 도로에 쌓인 낙엽을 쓸어야 한다. 그 무리들 가운데 남신이도 있다. 남신은 빗자루를 들고 천천히 도로의 낙엽을 쓸어내려 갔다. 군부대는 사계절 증 봄을 제외한 모든 계절에 거쳐야 할 자연과의 싸움이 있다. 여름에는 장마에 대비한 배수로 작업, 가을에는 낙엽 쓸기, 겨울에는 제설작업이다. 아무래도 가을의 낙엽 쓸기가 가장 편할 것 같지만, 막상 그 낙엽의 양을 보면 누구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군부대는 주로 산 가운데 둘러싸여 있다. 지리적으로 적에게 잘 발견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서도 있지만 민가에 피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하여 그렇게 배치되어 있다. 주위가 다 산이다 보니 한번 떨어진 낙엽의 양은 2톤 트럭으로 3번 정도는 실어 날라야 하는 어마어마한 양의 낙엽이다.

 낙엽을 쓸어 내려가던 남신은 침묵에 잠겼다. 다시 환한 빛 사이로 연주가 보이기 시작했다.


 “연주야!”

 “……!”

 연주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집에 안 갔어?”

 “그러게? 이 놈의 발이 참 이상하단 말이야. 하하……. 너무 보고 싶어서…….”

 연주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뽀얀 볼 사이로 들어간 보조개, 물끄러미 쳐다보는 눈은 어떻게 형용할 수 없었다. 이곳에 오기 전 계속 마음에 걸렸던 그녀에 대한 의심은 날아가 버리고, 살짝이라도 의심했던 자신이 한심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는 심장이 방망이질하고,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지금 이곳에서 그녀를 꽉 껴안아 주고 싶었다. 하지만 남아 있는 최소의 이성이 그를 힘겹게 잡고 있었다.

 ‘그래, 나는 이 모습을 보기 위해 나온 거야. 정말 잘한 거야.‘

 남신은 스스로가 너무 대견스러웠다. 휴가를 나오기로 결정한 것부터, 그녀에게 알리지 않고 이곳에 오기로 한 것까지 사실 그녀의 미소와 전혀 상관이 없을 수도 있지만, 그는 그녀의 미소 이 하나만으로 스스로가 칭찬받을 만한 대상이 되었다.

 “밥 먹었어?”

 “아직, 밥 먹을까?”

 “그래, 잠깐만…….”

 그녀는 같이 있던 친구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친구들과 인사를 했다. 남신은 그녀와 함께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점심 식사를 하게 될 것에 다시 한번 감격에 벅차올랐다. 어디를 가던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새벽에 부대를 나오면서 한 끼도 먹지 않았어도 그녀 생각에 계속 배가 불렀는데.

 

 “박남신이 뭐해?”

 “일병 박남신.”

 환한 빛이 순식간에 깨지며 남신은 습관적으로 관등성명(계급과 이름)을 대고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어느새 수북했던 낙엽은 다 사라지고 병사들 모두 줄을 서고 있었다. 분명히 낙엽을 쓸고 옮기고 잠시 휴식의 담배도 피웠을 터인데. 홀딱 벗은 플라타너스 옆에서 계속 빗자루 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신 못 차려? 빨리 안 튀어와?”

 일병 박남신은 뛰어야 했다.

 “너 정신을 어디에 놓고 온 거야? 휴가 갔다 온 이후에 계속 그러고 있잖아. 정신 차려 인마. 만약에 정비 중에 그러면 너 사고 난다.”

 무리를 인솔하던 병사가 조용히 한마디 하고는 다시 구호를 붙이며 막사로 병사들을 이끌기 시작했다. 주도로를 쭈욱 타고 올라가면 1중대의 막사에 도착한다. 남신이는 주도로의 나무들이 자신에게 혀를 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름에 그렇게 울창하게 잎을 가지고 있었던 그 나무들이 이제는 홀딱 벗겨져서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그 초라한 나무들이 자신에게 혀를 차고 있으니.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라는 건가? 하지만 남신은 알고 있었다. 나무에게는 보장받은 미래가 있었다. 다시 봄이 올 것이고 분명 새잎이 돋아나고 다시 늠름한 초록이 되겠지. 하지만 자신에게는 보장받은 미래가 전혀 없었다. 특히 그녀와의 관계에 미래라는 것은 아주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은 그저 오지 않을 봄만을 바라보는 겨울나무 그 자체라는 것을, 평생을 아마도 그렇게 지내야 할지도 모를 그런 나무라는 것을.

 “그녀의 웃는 모습은 활짝 핀 목련 꽃 같네. 그녀만 바라보면 언제나 따뜻한 봄날이었지. 그녀가 처음 울던 날 난 너무 깜짝 놀랐네. 그녀의 고운 얼굴 가득히 눈물로 얼룩이 졌네. 아무리 괴로워도 웃던 그녀가 처음으로 눈물 흘리던 날 내 가슴 한꺼번에 무너지는 듯 내 가슴 답답했는데. 이젠 더 볼 수가 없네, 그녀의 웃는 모습을 그녀가 처음으로 울던 날 내 곁을 떠나갔다네.”

- 김광석, 그녀가 처음 울던 날-


 그녀와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영화도 봤다. 그리고 지금은 공원을 걷고 있다. 하지만 무엇을 먹었는지 무엇을 보았는지, 지금 걷고 있는 공원은 무슨 공원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머릿속에는 그녀를 꼭 안고 싶은 생각뿐이었고, 눈은 계속 그녀의 입 주위를 맴돌았다. 연주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손을 올렸다. 무엇인가 머릿속에 반짝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그녀의 손에 반지가 없었다. 물론 항상 반지를 하고 다니지는 않겠지라고 스스로 안심을 시켰다. 그런데 스스로를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녀의 한쪽 어깨부터 소리 없이 그의 팔 바깥쪽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뱀도 그렇게 매끄럽게 빠져나가지 못하리라.

 ‘내가 전투복 차림이라 창피한가? 그럴 수도 있지. 미안한 걸 옷이라도 갈아입고 올걸 그랬나?’

 약간의 섭섭한 마음도 들기는 했지만, 사실 자신도 입대 전에는 군인을 군바리라고 놀리며 우습게 봤던 시절이 있었으니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팔짱 정도라도 해 주었어야 할 그녀가 손조차 잡지 않다는 생각이 드니 섭섭하면서도 씁쓸했다. 얼음 날 같은 매서운 바람이 귀를 스쳐갔다.

 ‘바람? 바람인가? 아니 바람이 아니다.’

 “역시 힘드네. 나 너를 봐도 옛날처럼 그런 감정이 생기지 않아. 안 보면 멀어진다는 말 믿지 않았는데. 그래서 너를 직접 보면 다시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구나. 미안해. 남신아.”

 ‘바람?’

 바람이라고 우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를 보고야 말았다. 그녀의 눈에서 무언가 흘렀다. 자기에게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그녀가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다. 남신은 갑자기 김광석이 원망스러워졌다. 가장 좋아하던 가수였는데 갑자기 너무도 싫어졌다.

 가끔 살아갈 때 이유가 뭔지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특히 사람의 마음이란 정확히 알 수 없을 때가 대부분이다. 연주가 왜 남신과 헤어지고자 했는지 알 수 없다. 연주가 말한 이유는 아마도 남신이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요약하자면 좋아하는 감정이 사라져서 애인관계로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인데, 그것은 그가 납득할 수 없는 이유였을 것이다. 아니, 그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 였을 수도 있다. 단지 그가 납득할 수 있었던 것은 유행가의 노랫말처럼 그녀의 흐르는 눈물뿐이었다. 그가 납득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그녀의 눈물과 자신이 좋아하던 가수의 유행 가뿐이었다.

 

 “자. 이거 받아. 너 화나면 아무것도 못 먹잖아.”

 “됐어.”

 위장약이다. 남신은 무척 화가 나거나 슬프거나 그럴 때면 전혀 소화를 시키지 못한다. 그래서 며칠씩 식사를 하지 못 할 때도 있었다. 연주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약이 필요할 것이라는 것도 미리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 귓밥 좀 파주라.”

 ‘내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허리도 아픈데 우리 집에 가서 좀 주물러 줄래?”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피하지 말자 박남신.’

 피하고 있다. 남신은 피하고 있었다. 헤어짐을 계속 부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본 눈물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 약봉지를 잡자.’

 남신은 약봉지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야상 전투복 우측 주머니에 살며시 넣었다.

 “잘 먹을게. 들어가라.”

 “아니야. 차 타는 모습 보고 들어 갈게.”

 그녀는 끝까지 착했다. 아니면 착하게 보이려고 하는 것일까? 동정일 수도 있다. 고무신 거꾸로 신은 애인에게 받는 동정. 버스가 오고 있었다.

 “남신아 버스 왔다. 안타?”

 “난 ○○번만 타.”

 남신은 항상 같은 버스와 길을 사용한다. 약간 더 멀더라도 항상 그 길을 원했다. 다른 노선을 가는 버스 밖의 풍경은 낯설다. 남신이 원하는 길은 익숙한 길이었다. 버스조차 가려서 타고 가는 길을 잘 바꾸지 못하는 그가 사람에 대하여서는 얼마나 두려움이 많겠는가? 그리고 현재는 버스가 오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렇지만, 결국 그는 그가 항상 타고 다니던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4일의 휴가 동안 그는 한 끼도 먹지 못하였다. 물론 그가 약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스스로 먹기를 거부했다. 밥을 먹는 것은 그녀와 헤어진 것이 슬프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약을 먹게 되면 식사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많이 슬프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에게는 정말 소중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 그녀의 배웅을 받으며 오른쪽 주머니의 소화제를 넣은 채 부대에 복귀했다. 그가 계획했던 것처럼 휴가기간 내 부대의 모든 바쁜 일이 마무리되고 혹한기 훈련만이 남게 되었다. 물론 계획에도 없던 사건이 휴가 첫날 있었기는 했지만 말이다.


 군대에서 한 가지 추억으로 남는 것이 바로 혹한기 훈련이다. 실제로 전쟁이 난다면 영하의 추위에도 전투에 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인 훈련이다. 그리고 많은 예비군들의 입담에서 가장 과장이 심한 훈련도 혹한기 훈련이다. 영하 20도에 체감 온도는 영하 50도라는 둥 손이 얼어서 자를 뻔했다는 둥 추위와 관련된 다양한 과장 섞인 에피소드들이 많은 예비역 장병들의 입을 간질이고 있다. 그리고 박남신 일병도 혹한기 훈련을 준비하고 있다. 이 훈련만 지나면 따뜻한 봄이 금방 오리라.

 “야, 거기 뭐 하고 있어 빨리빨리 군장 확인하란 말이야!”

 “예, 알겠습니다.”

 

 새벽 2시. 여기저기에서 전차의 시동소리가 들려온다. 모두들 내복을 2중으로 껴입고 깔깔이(방상내피)를 입어서 몸이 무거워 보인다. 모두들 전차가 있는 주차장으로 군장을 옮기고 있다. 사실 군장 중에는 야식만 꽉 채워 놓은 것도 있다. 가끔 야식 군장을 깜빡하고 놓고 와서 선임병의 쓴소리를 훈련 내내 들어야 할 때도 있다. 어쨌든 훈련 전 전차 승무원들은 매우 바쁘다. 전 차장들은 중대장과 함께 부대이동 순서를 지도를 보며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중이고, 조종수들은 모두 해치를 열고 시동을 걸어 엔진을 가열시키고, 포수는 조준대 앞에 앉아 졸 준비를 끝내고, 탄약수는 무전기를 개방하고 수기를 꽂는다.

 “자, 무전기 개방하고 차량 이동 순서는 101, 102, 그리고 111 ……이다.”

 일반인들은 전차라는 말에 무척 생소해한다. 전차는 영어로 탱크(Tank)라고 한다. 거대한 궤도를 양옆으로 달고 마치 불구덩이 굴러가듯이 움직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탱크와 장갑차, 그리고 자주포를 구별하지 못한다. 특히 전차와 자주포는 같이 있어도 어느 것이 전차이고 어느 것이 자주포인지 모른다. 둘 다 거대한 포신과 양옆으로 달고 있는 궤도 때문에 외형이 비슷해 보이기 때문이다. 외형적으로 두 차량을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은 아마도 승무원 경험이 있는 사람이거나 전투 장비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전차는 지상의 왕자라고 불린다. 전차 1대는 일개 보병 1개 중대를 능가하는 전투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라도 광주의 상무대 기갑학교에서 전차 승무원의 후방기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기갑학교의 8주 정규 코스를 수료한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자부심들을 가지고 있다. 일반 복장은 다른 일반 병사들과 다를 바 없지만, 전투 복장은 승무원 복이라는 원피스를 입고, 방탄모 대신 베레모를 사용한다. 또한 기갑부대의 왕관 모양의 표식을 달고 다닌다. 승무원들은 권총과 K-1이란 기관소총을 사용하기 때문에 다른 부대의 병사들이 전차병을 간부로 오인하기도 한다. 이곳 ○사단 전차대대도 마찬가지로 상무대 기갑학교 출신의 장병들이 배치된 곳이다. 하지만 군인은 군인. 이곳 생활에서 장병들이 겪는 모든 경험도 다른 부대와 그리 다르지는 않다. 애인과 헤어진다거나 하는…….

 

 혹한기 훈련 첫날. 일단 숙영지를 준비해야 했다. 박남신 일병에게 주어진 임무는 바로 야외화장실을 만드는 일이었다. 겨울의 땅은 정말 딱딱하다. 곡괭이나 삽의 끝이 부러지기도 할 정도로 정말 단단하다. 하지만 남신은 이제 고작 9개월의 군생활을 했을 뿐이라 그 위에 많은 선임병들이 힘든 일을 하지 않을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결국 1미터의 이상의 구더기를 파는 데, 2시간이나 걸리고 말았다. 담배 한 가치를 입에 물고 구덩이 앞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을 깊게 들이쉬고 고개를 들어 연기를 뱉어냈다. 하얀 연기는 입김과 함께 머리 위로 날아가 나뭇가지를 타고 사라져 갔다.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겨울 하늘은 투명한 푸른 유리 같았다.

 ‘잎이 없으니깐 파란 하늘이 보이는구나. 잎이 시들어 다 떨어져도 나뭇가지에 하늘이 걸려있구나. 초라해 보이던 겨울나무도 사실은 파란 하늘을 가지고 있었구나. 훗. 오히려 여름 때보다 더 꽉 차 보이는 구나. ……. 하늘.. 나무.. 하늘나무? 훗……. 유치한데.‘

 남신은 스스로의 유치한 발상을 비웃으면서도, 솔직히 오히려 여름철의 녹수보다 더 아름답다고 느껴고 있었다..

 ‘하늘 나무라……. 하지만……. 분명 밤이 오겠지. 밤……. 깜깜한 하늘 오히려 더 쓸쓸하겠지. 하늘 나무는 밤이 고통스럽겠군. ’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다시 입김과 담배 연기가 나뭇가지를 타고 하늘로 사라져 갔다.

 어느새 밤은 오고 말았다. 텐트 안에는 조그마한 파티가 벌어졌다. 야식 군장을 풀어 배고픔을 달래는 시간이 된 것이다. 물론 그 속에는 소량의 알코올도 포함되어 있다. 혹한기 훈련을 힘들어 하지만 또 기다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날씨가 춥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술은 암묵적으로 허락되고 있었다.

 “어이, 팩 하나씩만 먹고 얼른 자자.”

 “네, 알겠습니다.”

 “건배!”

 “쉬……! 조심히 먹자고.”

 장병들의 얼굴은 겨울 햇빛으로 여름과 다를 바 없이 까맣게 타 있었다. 하지만 이 한잔의 소주에 모두들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남신도 한 손에 소주 팩을 잡고 조금씩 마시며 추위를 달래고 있었다.

 “남신아. 너 애인이랑 헤어졌다고 그랬지?”

 “예.”

 선임병들의 위로의 말이 한 마디씩 던져졌다. 하지만 그 말에 남신은 할 말이 많았지만 꾹 참고 듣기만 했다. 아마 군대에서 애인이랑 헤어지고 가장 많이 듣는 위로의 말일 것이다.

 “야, 여자 하나 가지고 그러냐. 제대하면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하지만 연주는 세상에서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한……. 한 달이면 잊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녀의 존재가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다른 애 만나봐.”

 하지만 그녀의 그림자가 반드시 따라다닐 것이다.

 “더 이쁜 애 많으니깐 걱정 마.”

 하지만 그녀의 아름다움과 같지 않으리라. 한마디 한마디 들을수록 그녀가 더욱 간절해졌다. 앉아 있기가 괴로웠다.

 “치아라. 자식들아. 마, 고마해라. 아가 얼마나 괴롭겠니? 퍼뜩 자라. 내 화장실 갔다 올 동안 자리 정리해놓기라. 남신이, 아야, 렌턴 들고 따라오기라.”

 “예.”

 분대장이 무척이나 고마웠다. 남신은 렌턴을 들고 분대장의 화장실 가는 길에 동행했다. 화장실에서 분대장이 일을 볼 동안 랜턴을 비추고 있어야 했다. 남신은 무심코 화장실 앞 하늘 나무에 눈길을 돌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분명히 밤의 하늘 나무는 외롭고 쓸쓸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남신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밤하늘의 하늘나무는 지금까지 보았던 그 어떤 나무 열매보다, 그 어떤 잎보다 아름다운 것을 맺고 있었다. 앙상한 가지 위로 뿌려놓은 빛나는 가루들. 크리스마스트리라 해도 이렇게 아름다운 빛을 만들 수 없으리라. 하늘 나무는 이렇게 어두운 밤하늘에 이렇게 아름다운 열매들을 숨겨놓고 있었던 것이다. 남신의 두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이 많은 별들을 얻기 위해 그 많은 잎을 버린 하늘나무가 너무나 기특했다.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다. 이 아름답고 고귀한 하늘 나무의 행동을.

 “분대장님!”

 “와! 그라노. 누구 왔나? 급한 일 아니면 말 시키지 마라. 안 나온다.”

 “분대장님!”

 “아 새끼. 와 불러대 쌌니. 누구 왔나?‘

 “분대장님! 하늘나무에 별이 열렸습니다.”

 “……. 무신 개소리가? 이 새끼 내일은 술 안 줘야 될라 갑네. 취해갔고 햇소리나 하고 자빠졌네. 렌턴이나 잘 비치기라. 니가 말시키갔고 안나온다!”


 1년 하고 3개월 후. 5월의 따뜻한 봄 햇살에 남신은 전역신고를 하고 부대 앞 주도로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수많은 하늘나무들에게 인사를 하면서, 그 간 고마웠다며.

그때를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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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li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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