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hool Life1 5화 열사,의사,매국노

부제: 슬기로운 학교 생활, 본격 초딩 교사 성장 로망 소설

by Red eye

조금 늦은 ^^ 업로드 양해 부탁드려요~~! ^^


스쿨라이프1 제 5화 열사, 의사 그리고 매국노


S1. 6월 6일


6월 5일, 교실

칠판에는 굵은 분필 글씨로 〈호국보훈의 달〉이라 적혀 있었다. 글자 아래로 하얀 분필가루가 가늘게 흩날렸다. 남도윤은 교탁 앞에 바르게 서 있었다. 어깨가 단단히 올라가 있었고,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여러분, 내일은 현충일입니다. 단순히 공휴일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을 기리는 날이에요. 여기서 중요한 건 단어입니다. ‘열사’라는 말, 들어본 적 있죠?”

아이들이 어렴풋이 고개를 끄덕였다.


“열사란, 뜨거운 뜻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예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기 몸과 삶을 내던진 분들입니다. 자신의 안위보다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고, 미래 세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사람들이죠. 반면 ‘의사’라는 말도 있습니다. ‘의사(義士)’는 옳은 뜻, 곧 의(義)를 실천한 사람을 말합니다. 무력으로 싸우거나 직접 전쟁터에 나서지 않았더라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저항하고 옳은 일을 위해 싸운 분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열사는 뜨거운 피로 나라를 지킨 사람이고, 의사는 굳은 뜻으로 정의를 세운 사람이에요.”


남도윤은 잠시 숨을 고르며 학생들의 얼굴을 살폈다. 앞줄의 몇몇은 여전히 눈망울을 반짝였지만, 뒤쪽에서는 책상 밑으로 연필을 굴리거나 하품을 참는 아이들이 보였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목소리를 더욱 단단히 했다.


“현충일은 왜 필요할까요? 단순히 기념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 일상은 그냥 주어진 게 아니에요. 교실에 앉아 수업을 듣고, 집에 가면 편히 밥을 먹고, 자유롭게 친구들과 놀 수 있는 이 평범함이 바로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진 겁니다. 만약 그분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이렇게 앉아 있지도 못했을 거예요.”

아이들 몇몇이 등을 곧게 세우며 시선을 맞추려 애썼다. 그러나 교실 공기는 여전히 무겁고, 조금은 숨 막히게 고요했다.

남도윤은 분필을 다시 쥐고 칠판 옆에 ‘열사’와 ‘의사’라는 두 단어를 또박또박 적었다.


“여러분, 기억하세요. 이름을 불러주는 것, 뜻을 되새기는 것이 남은 우리가 할 일입니다. 우리가 그분들을 잊는 순간, 희생은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현충일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나라의 역사와 뿌리를 잊지 않겠다는 약속이고,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비장해졌고, 교실은 한순간 무대처럼 정적에 잠겼다. 아이들은 더 이상 소곤대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에는 긴장과 지루함이 뒤섞여 있었다. 단호한 목소리만이 교실 공기를 지배했다.


S2. 운동장 만세운동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 교실 문이 활짝 열렸다. 아이들이 우르르 운동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매미가 일찍 울음을 터뜨린 듯한 여름의 초입, 햇볕은 따갑게 내리쬐고 운동장 흙바닥은 햇살에 반짝였다.

그런데 4학년 3반 아이들은 평소처럼 뛰어놀지 않았다. 교실 안에서부터 분주하게 뭔가를 준비하더니, 종이로 오려 붙인 태극기를 몇 장 들고 줄을 맞춰 운동장 모퉁이로 모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얘들아, 준비됐지?”

“자, 큐 사인 하면 달린다!”

“태극기 높이 들어! 흔들어, 흔들어!”


그 순간, 선두에 선 아이가 두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대한 독립 만세!”


뒤를 따르던 아이들이 일제히 호응했다.


“대한 독립 만세!”


아이들은 줄지어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어가기 시작했다. 태극기가 바람을 받아 펄럭이고, 아이들의 목청은 운동장 전체를 울릴 만큼 우렁찼다. 흙먼지가 발끝에서 일었고,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누구도 멈추지 않았다.


“우리가 열사다!”

“우리가 의사다!”


아이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장난기 어린 웃음과 함께 더 많은 아이들이 그 대열에 합류했다. 구경하던 다른 반 아이들도 호기심에 태극기를 빌려 흔들며 따라 붙었다. 불과 몇 초 만에 운동장은 작은 만세운동 시위 현장처럼 변했다. 멀리서 이 광경을 본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저게 뭐야?”

“4학년 애들 미쳤나 봐.”

“근데 재밌겠다. 나도 할래!”


운동장 주변을 지나가던 교사들도 걸음을 멈췄다. 체육복 차림의 체육 선생님은 휘슬을 불려다 말고 입술을 씰룩이며 웃음을 참았다. 다른 여교사들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킥킥댔다. 결국 몇몇은 아예 배를 움켜쥐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 한가운데에는 정수학이 있었다.

교탁 대신 운동장 한켠에 서 있던 그는 손에 아직 분필 가루가 묻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 아이들에게 ‘열사’와 ‘의사’의 차이를 설명하다 말았는데, 아이들이 이렇게 현실판 ‘퍼포먼스’를 펼칠 줄은 몰랐다. 그는 당황스러운 듯 입을 반쯤 벌린 채 아이들의 행렬을 바라봤다.


“선생님, 저희 제대로 했죠? 만세 삼창이요!”


앞줄에서 뛰던 한 아이가 소리쳤다.

정수학은 웃음을 터뜨릴까 말까 하는 표정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야야, 됐다, 됐어. 이제 그만….”


그러나 아이들은 멈추지 않았다.


“대한 독립 만세!”

“만세!”


목청은 더 커졌고, 운동장은 놀이판으로 바뀌었다. 아이들의 태극기는 누군가 던진 종이비행기와 뒤섞여 허공을 날았다.

그때였다.

‘딩동댕—’ 학교 전체에 울려 퍼지는 방송 알람이 울렸다.

교장 선생님의 낮고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수학 선생님, 빨리 교무실로 오세요.”


정수학의 얼굴은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 아이들 사이에서는 폭소가 터졌다.


“선생님 못봤다고 해, 아니, 그냥 없다고 해.”


정수학은 재빨리 구령대 아래 체육창고로 몸을 피했다.

다시 ‘딩동댕-’하고 알람이 울렸다.


“체육창고로 들어간 정수학 선생님, 교무실로 빨로 올라오세요.”

“헐, 우리 담임 불려간다!”

“선생님, 파이팅!”


운동장은 한순간 정적에 휩싸였다가, 이내 폭소로 가득 찼다.


“헐, 선생님 불려가신다!”

“아, 걸렸다, 걸렸어!”


정수학은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눈은 동그랗게 떠지고, 입술은 굳게 닫혔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며 아이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아이들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손뼉을 치며 뒤를 따라 외쳤다.


“선생님, 파이팅! 파이팅!”


주변에 서 있던 교사들마저 웃음을 삼키지 못했다.


“아, 저 분 또 사고 치셨네.”

“정수학 선생님은 늘 애들하고 잘 놀긴하는데, 이번엔 크게 걸리셨네.”


정수학은 힘없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천천히 운동장을 건넜다. 뒷모습은 마치 군대에서 영창 끌려가는 이등병 같았다. 아이들이 그 모습을 보고는 또 폭소를 터뜨렸다.

그런데, 불과 5초 뒤.

방송이 다시 울려 퍼졌다.


“정수학 선생님, ‘빨리’라고 했습니다.”


정수학은 깜짝 놀라 바짝 몸을 움츠리더니, 허리를 숙여 크게 대답했다.


“네에!”


그리고는 두 손을 흔들며 전력 질주로 교무실 쪽으로 달려갔다. 허겁지겁 뛰는 그의 모습은 코미디 무대의 한 장면 같았다. 아이들은 운동장에 쓰러질 듯 웃어댔다.


“아, 우리 선생님 짱이다!”

“진짜 개그맨이야, 개그맨!”


교무실 앞에 다다른 정수학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마에는 땀이 맺혔다. 그 순간 교장 선생님이 천천히 교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정수학은 그 뒤를 조심스레 따라갔다.

허리는 거의 직각에 가까울 정도로 숙여져 있었고, 그의 입모양은 누가 보아도 명백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교장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복도 끝에서 바라보는 교사들의 눈에는 그의 굽신거림이 그대로 보였다.

운동장에서는 여전히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흙먼지, 태극기의 펄럭임이 남아 있었다. 잠시 전까지의 정적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코믹한 활기로 뒤섞여 있었다.


S3. 애국지사 남도윤


6학년 협의회는 오후 늦게 시작됐다. 교무실 한쪽 작은 회의실에 들어서자, 이미 책상 위에는 일정표와 서류철, 볼펜들이 어수선하게 펼쳐져 있었다. 텀블러에서 김이 피어올라 방 안 공기를 가득 채웠다.

강아름은 늘 그렇듯 구석 자리에 앉았다. 아직 신입이라 의견을 낼 수는 없고, 그저 기록하고 배우는 자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평소보다 묘하게 팽팽했다.

가운데 자리, 남도윤이 등을 꼿꼿이 세우고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은 벌써 붉게 상기돼 있었고, 눈빛은 돌처럼 단단했다. 그리고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그는 곧장 입을 열었다.


“호국보훈의 달 교육은 정숙하고, 진지하게 이뤄져야 합니다.”


첫마디부터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순간적으로 회의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이어서 말을 쏟아냈다.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만세 삼창을 외치며 웃고 떠드는 건… 저는 받아들일 수 없네요. 열사의 희생을 희화화하는 것이나 다름없죠. 교육은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잖습니까. 진중해야 하고, 아이들이 역사 앞에서 고개를 숙일 수 있어야 합니다.”


강아름은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동시에 눈길이 남도윤의 손짓에 붙잡혔다. 그는 책상 위에 올린 손을 움켜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그 동작마다 손등의 힘줄이 도드라졌다. 마치 지금도 태극기를 움켜쥔 열사처럼 보였다. 그런데 곧, 그의 말은 정수학을 향했다. 정수학은 이 회의실에 없었다. 하지만 마치 의자 하나에 앉아 있는 것처럼, 그의 이름이 불렸다.


“정수학 선생님처럼, 학생들과 장난처럼 활동을 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남도윤은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아이들은 즐겁겠지요. 웃고 떠들며 즐거웠을 겁니다. 그러나 그건 교육이 아닙니다. 진심을 가볍게 만든 장난일 뿐이에요.”


윤허담은 커피포트를 꺼내며 농담을 던졌다.


“그래요, 묵직한 얘기 나왔으니, 묵직하게 커피 한 잔 하시죠.”


그는 원두 향을 풍기며 잔을 내밀었다. 분위기는 금세 가볍게 돌아갔다. 하지만 남도윤은 커피 잔을 받으면서도 웃지 않았다. 여전히 붉은 얼굴에, 입술은 굳게 다물려 있었다.

순간, 회의실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강아름은 의자에 앉아 있으면서도, 마치 실제 정수학이 이곳에 앉아 남도윤의 말을 듣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정수학 선생님이라면, 지금 어떻게 반응했을까?

강아름은 마음속으로 그려봤다. 아마 무심한 웃음으로 대꾸했을 것이다. “애들이 즐거웠으면 됐죠.” 그렇게 말하며 팔짱을 낀 채 웃음을 지었을 터였다. 그 무심한 태도가, 지금 이 자리에선 남도윤의 붉은 얼굴과 정면으로 부딪히는 듯했다.

남도윤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저는 솔직히 말하면, 그건 매국노 같은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에게 열사의 진심을 가르쳐야 할 교육자가, 그 희생을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리다니요.”


매국노.

그 단어가 회의실 공기를 찢듯 울렸다.

강아름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다른 교사들도 고개를 끄덕이거나 시선을 피하며 어색한 기침을 했다. 누구도 정수학을 옹호하거나, 남도윤을 제지하지 않았다. 하지만 매국노라는 단어는 지나치게 무거웠다.


‘왜 이렇게까지…?’


강아름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단순히 교육 철학을 말하는 게 아니다. 정수학 선생님을 이기고 싶어 하는 거다. 늘 비교하며, 늘 더 앞서고 싶어 한다. 마치 열사와 매국노라는 낙인을 찍어서라도, 스스로 이기고 싶어 하는 것처럼.

남도윤의 눈빛은 불길 같았다. 협의회 탁자 위에 엎드린 작은 연필심 하나조차 그 불길에 타버릴 것 같았다.

반면, 머릿속에서 강아름이 그려본 정수학의 모습은 전혀 달랐다. 그는 여전히 어깨를 늘어뜨린 채, 무심한 얼굴로 장난스럽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 대비가 강렬하게 그녀의 마음속에 각인됐다. 회의실 한쪽에서 윤허담이 어색한 웃음을 터뜨렸다.


“뭐, 그래도 애들이 애국지사처럼 뛰니까 실감 나던데요?”


그는 농담처럼 흘렸지만, 공기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결국 독고철 부장이 헛기침을 크게 하고 회의를 정리했다.


“자, 의견은 충분히 들었습니다. 남 선생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일정이 우선이니 정리하겠습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다음 주 호국보훈의 달 기념 수업은 전 학년이 현충원과 생중계로 진행합니다. 현충원 행사 장면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현장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수업을 직접 해주신다고 합니다. 교재는 저쪽에 있으니깐 곡 사전에 나눠주세요. 그리고 미술 시간을 활용해 호국보훈의 달 기념 포스터를 그리도록 하겠습니다. 학급별로 전시도 준비해 주시면 됩니다.”


탁, 펜을 내려놓는 소리가 회의실에 울렸다. 분위기는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러나 강아름의 시선 속 남도윤은 여전히 붉은 얼굴이었다. 그는 협의회에 앉아 있었지만, 어쩐지 전선 한복판에 서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의 눈에는, 이 자리에 없는 정수학이 여전히 함께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강아름은 복잡한 마음을 억누르며 노트를 덮었다. 존경과 답답함, 부러움과 긴장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오늘 협의회에서 그녀가 본 건 단순한 의견 교환이 아니었다. 남도윤이라는 한 교사의 비장한 독백,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속 불려 나온 정수학과 끝 없는 대비였다.


S4. 포스터 전시


6월 어느 날, 복도 벽면이 알록달록한 색으로 가득했다.

학생들이 그린 호국보훈의 달 포스터가 줄지어 붙어 있었다. 태극기를 크게 그린 그림, 현충원에 헌화하는 아이들, 군인 삼촌을 그린 작품까지. 크레파스 냄새가 아직도 잔뜩 배어 있었다.

남도윤은 두 손을 등 뒤로 모으고 천천히 걸었다. 아이들이 그려낸 진지한 그림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표정이 점점 뿌듯하게 변해갔다.


“그래… 이게 교육이지.”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붉게 상기된 얼굴은 마치 자신이 직접 태극기를 휘두르고 온 열사라도 된 듯 의기양양했다. 그때, 뒤에서 무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들 그림, 잘 나왔네. 참 보기 좋아요.”


익숙한 목소리였다. 정수학이었다. 남도윤의 어깨가 순간 움찔했다. 그는 뒷말을 기다리며 천천히 돌아섰다.

“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고개를 돌리는 순간, 남도윤은 깜짝 놀라 발을 헛디뎠다.


“으악!”


앞에 서 있던 정수학은 평소와 전혀 다른 차림이었다. 예비군 전투복에 철모까지 눌러쓴 모습. 얼굴에는 국방색 위장 크림이 잔뜩 발라져 있었다. 눈가에는 검은 줄이 길게 내려와 마치 전쟁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정수학은 태연하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내일이 6·25잖어.”


남도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순간 그 의젓한 ‘열사’의 표정은 사라지고, 우스꽝스럽게 허둥대다 결국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뒤편에서 지켜보던 아이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와, 수학쌤 진짜 군인 같다!”

“진짜 전쟁 난 줄 알았어요!”


정수학은 아이들에게 손까지 흔들며, 군인 흉내를 내듯 경례했다.


“충성!”


남도윤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얼굴이 빨개졌다. 뿌듯함으로 가득했던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허무와 분노, 그리고 당황스러움이 뒤섞였다. 그러나 정수학은 태연했다. 위장 크림을 문지르며, 또다시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흘렸다.


“교육은 진중해야 한다면서요? 그래서 저도 진지하게 준비해봤습니다.”


아이들은 배를 잡고 웃었고, 남도윤은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눈에 정수학은, 또다시 천하의 매국노, 아니 반역자처럼 보였다.


S5. 현충원


6월의 햇살이 창문을 스며들던 아침, 교실 안은 유난히 차분했다. 책상 위에는 노트와 연필만 놓여 있었고, 아이들은 하나같이 화면을 응시했다. 대형 스크린 속으로 서울 현충원의 전경이 비쳤다. 깔끔하게 다듬어진 잔디밭, 질서정연한 비석들, 바람에 펄럭이는 태극기. 생중계 화면 속 해설자가 또렷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여기는 국립서울현충원입니다. 나라를 지키다 목숨을 바친 분들이 잠들어 계신 곳이지요.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현충원의 의미와 구조를 알아보겠습니다.”


아이들은 숨죽여 화면을 바라봤다. 장난스러운 기척은 어디에도 없었다. 평소 같으면 종이에 낙서를 하거나 옆 친구와 눈을 마주치며 웃음을 참지 못했을 텐데, 오늘만큼은 달랐다.

해설은 현충원의 전경을 따라 이동했다. 독립유공자 묘역, 군인 묘역, 경찰과 소방관 묘역까지. 카메라가 묘비를 스쳐 지날 때마다 아이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여러분, 저기 보이는 것이 ‘형제 용사 묘역’입니다.”


해설자의 목소리가 잠시 낮아졌다.


“6·25 전쟁 당시, 같은 집안에서 형제가 함께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안타깝게도 두 형제가 모두 목숨을 잃고, 이렇게 나란히 잠들게 된 것이지요.”


화면이 묘비를 비추자, 교실은 숨조차 죽은 듯 고요해졌다. 묘비 앞에 놓인 조화와 태극기, 그리고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리본이 카메라에 잡혔다. 아이들의 얼굴에 변화가 일어났다.


앞줄에 앉은 한 아이는 눈썹을 꾹 찌푸리며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봤고, 뒤쪽의 아이는 손으로 턱을 괴고 있었지만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조용히 한숨을 내쉬는 아이도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남도윤의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래, 이거다. 이게 진짜 교육이다.’


그는 아이들을 둘러보며 목소리를 보탰다.


“얘들아, 저 형제들은 우리가 지금 웃고 떠들며 살아갈 수 있도록 대신 목숨을 바친 거야. 우리가 학교에 다니고, 책을 읽고, 이렇게 평범한 하루를 살 수 있는 건 바로 저분들의 희생 덕분이야.”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촉촉해진 아이도 있었다. 그 순간, 교실은 하나의 작은 현충원이 된 듯했다. 수업은 묵직하게 흘러갔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았다. 해설자의 목소리와 화면, 그리고 남도윤의 단호한 어조가 하나로 어우러졌다.

마지막으로 해설자가 말했다.


“나라를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전쟁에 나가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오늘을 성실히 살아가는 것도, 그 희생에 보답하는 길입니다.”


방송이 끝났을 때, 아이들은 박수를 치지도, 떠들지도 않았다. 단지 깊은 숨을 내쉬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 고요함 속에서 무언가가 전해진 듯했다. 남도윤은 천천히 교탁 위에 손을 올렸다.

오늘 이 수업만으로도, 아이들은 무엇인가를 마음에 새겼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원했던 교육이다. 그의 눈은 여전히 붉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이번에는 분노가 아니라 뿌듯함으로 채워져 있었다.


S6. 패배한 열사


7월 초의 오후, 교무실 한쪽 작은 회의실에는 6학년 교사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공기 중엔 에어컨 바람이 무겁게 맴돌았고, 창밖에서는 매미가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7년을 참았던 설움을.

독고철 부장이 앞에 서서 연수 자료집을 펼쳤다.


“자, 이제 곧 1학기 마무리 시점입니다. 생활기록부 작성, 출결 정리, 창체 활동 기록, 성적평가… 이 부분은 우리가 놓치면 안 되죠.”


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 키보드가 타닥거리는 소리가 회의실 안을 채웠다. 교사들의 표정은 진지했고, 적어 내려가는 글자들은 분주했다. 남도윤 역시 꼿꼿하게 앉아 볼펜을 꽉 쥐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또렷했다. 연수 시간 내내, 누가 보더라도 모범적인 태도였다.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다른 불꽃이 타고 있었다.

연수는 상세하고 자세하게 이어졌다. 독고철은 세세하게 항목을 나누어 가르쳤다. 출결 정리는 누가 맡을지, 창의적 체험 활동은 어떤 교사가 기록할지, 행동특성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그리고 성적 처리 기준에 대해 꼼꼼하게 짚었다. 독고철 다운 연수였다. 회의가 정리될 즈음, 독고철이 남도윤을 바라봤다.


“그나저나 남도윤 선생님, 축하합니다. 이번 교총 현장연구에서 2등급 입상하셨더군요.”

순간, 회의실 공기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모두의 시선이 남도윤에게로 쏠렸다. 남도윤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아… 아직 공문은 못 봤는데, 부장님께서 먼저 보셨군요. 감사합니다.”


가슴 안쪽에서 뜨거운 자부심이 솟아올랐다. 마치 오랫동안 달려온 길 끝에서 마침내 환한 불빛을 본 듯했다. 남도윤은 눈을 내리깔며 그 순간을 곱씹었다.

드디어 나를 인정해주고 있구나. 이제 정수학, 그 사람에게도 내가 뒤처지지 않는다는 걸 보여줄 수 있겠지.

그는 미묘한 승자의 미소를 띠며 감사 인사를 반복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기분 좋은 상기였다. 바로 그때였다.


“쾅!”

구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바람이 몰아쳤다. 정수학이었다. 평소처럼 무심한 얼굴, 한 손에는 허술하게 말아쥔 자료 몇 장. 그는 대뜸 인사를 건넸다.


“다들 안녕하신가요?”

교사들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곧 웃음을 띠며 인사를 돌려주었다. 정수학은 주위를 한 번 훑어보더니, 곧장 말했다.


“아, 그리고 남 선생님. 축하합니다.”

남도윤의 눈이 반짝였다. 드디어 인정하는 건가? 그는 속으로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었다. 감사 인사를 하려 입을 열었다.


“아, 네. 정말—”

그러나 말은 끝나지 못했다. 정수학은 돌연 옆자리에 앉아 있던 윤허담을 와락 끌어안았다.


“우리, 이번 수업혁신 연구대회 1등급이여! 전국대회 출전 확정!”


순간, 회의실은 환호로 터졌다.


“와! 대단하십니다!”

“전국대회라니, 학교 이름이 빛나겠네요!”


남도윤의 얼굴은 굳어졌다. 손에 쥔 볼펜이 땀으로 미끄러질 뻔했다. 머릿속에서 ‘1등급’이라는 단어가 메아리쳤다.


1등급… 전국대회 출전… 정수학이?’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정수학을 노려봤다. 정수학은 남도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 남 선생님도 축하해요! 2등급 했다면서? 대단해요. 난 그간 계속 물 먹었는데… 3년 차에 혼자서 2등급이라니, 정말 멋집니다.”


말투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웃음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도윤의 귀에는 전혀 다르게 들렸다.


‘2등급? 혼자서? 멋지다?… 결국, 당신이 1등이라는 걸 강조하려는 거잖아.’


그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숨이 막혔고, 가슴은 쿵쾅거렸다.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그는 말했다.


“부장님들도 축하드립니다.”


그러나 목소리는 떨렸다. 눈빛은 흔들렸다. 회의가 끝나갈 무렵, 남도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포트로 다가갔다. 컵에 따라낸 커피는 너무 뜨거웠다. 그러나 그는 일부러 그 뜨거움을 홀짝였다. 혀끝이 데이는 고통조차, 지금의 패배감보다는 견딜 만했다. 눈앞이 흐려졌다. 귀에는 다른 교사들의 웃음소리, 박수 소리, 대화가 희미하게 울렸다.


‘왜… 왜 또 정수학인가. 내가 그렇게 노력해도, 결국 그가 웃음을 가져가는 건가.’


커피 향은 씁쓸했고, 목을 타고 내려가면서도 쓰디썼다. 남도윤의 눈가에 번진 것은, 뜨거움 때문인지, 패배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손을 떨며 컵을 내려놓았다.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교사들의 환호가 아직도 귀에 울렸다.

열사처럼 살고 싶었다. 교육을 진중하게 세우고 싶었다. 그런데, 왜 나는 늘 그림자처럼 남고, 정수학은 빛 속에 서는가. 남도윤은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나는 교육 열사. 그는 교육 매국노. 그런데도 세상은 매국노에게 박수를 치고 있잖아. 그의 가슴속에서 무언가 무너져 내렸다.


S7. 心重量 심중량


해가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복도에 길게 드리운 빛은 교실 문틈으로 스며들어, 책상 위를 길게 긁고 지나갔다. 빈 교실에는 시계 초침 소리만이 또각또각 울렸다. 남도윤은 교탁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 팔짱도, 펜도, 아무것도 쥐지 않은 채 그저 멍하니. 손끝은 미세하게 떨렸고, 숨결은 귓속에서만 크게 울렸다.

‘정수학… 저 인간은 도대체 뭘까.’


머릿속에서 그의 웃는 얼굴이 끊임없이 맴돌았다. 무심한 표정, 장난스럽게 내뱉던 말투, 그리고 사람들을 한순간에 자기 편으로 만드는 이상한 기운.


“축하합니다.”


그 목소리가 다시금 귓가에서 맴돌았다. 진심 어린 축하처럼 들렸으나, 남도윤에겐 칼날 같았다. 자신이 간신히 움켜쥔 성취를 송두리째 덮어버린 단어 ― ‘1등급’. 그는 이마를 두 손으로 감쌌다.

내가 그렇게 준비하고, 아이들과 땀 흘리며 만든 연구를… 결국 묻혀버렸다. 내가 이룬 경사가, 저 인간 한마디에 빛을 잃었다. 심장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자존심의 무게가 식은 돌처럼 배 속에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이건 내 자격지심일까.”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까지 의식할까. 왜 저 사람만 보면, 내가 뒤처지는 기분이 드는 걸까. 어쩌면 진짜 문제는 나 자신인가. 내가 열사처럼 진중하게 가르쳐도, 사람들은 결국 웃음을 택하는 걸까. 나는 늘 긴장 속에 있는데, 정수학은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을 끌고 가잖아.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그는 천장을 올려다봤다. 형광등 불빛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눈앞이 흐려졌다.

‘나는… 계속 지고 있는 건가.’

“똑, 똑.”

문 두드리는 소리에 그는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연구부장 전수현이 들어왔다. 손에는 연수 자료와 차 한 잔이 들려 있었다.

“선생님, 여기 계셨군요.”

그녀는 미소를 띠며 다가왔다.

“축하드립니다. 현장연구 2등급 받으셨다고요! 그런데 표정이 왜 이렇게 안 좋으세요? 이렇게 큰 기쁜 일인데.”

남도윤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아, 네. 감사합니다.”

하지만 웃음은 입술에서만 맴돌 뿐, 눈빛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전수현은 별다른 눈치도 채지 못한 듯, 활기차게 말을 이어갔다.

“이번에 우리 학교에서 성과가 정말 대단해요. 1등급, 2등급, 3등급이 다 나왔잖아요. 교장, 교감 선생님도 엄청 기뻐하시던데요.”

“3등급이요?”

남도윤의 눈이 휙 돌아갔다.

“몰라요? 같은 학년인데.”


전수현이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강아름 선생님이 이번에 수업혁신대회에서 3등급 입상했어요. 신규인데 대단하죠? 6학년이 1, 2, 3등급을 다 가져간 거예요.”

“…아.”

남도윤의 목에서 짧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강아름까지…?’

몰랐다. 정말 몰랐다. 전수현은 신이 나서 말을 이어갔다.

“젊은 선생님들이 대단해요. 승진도 금방금방 하실 것 같아요. 전 젊었을 때 옆에서 이렇게 잘 끌어주는 멘토가 없었거든요. 근데 지금은 다들 좋은 선배님 덕에 성장하는 것 같아요.”

남도윤의 손끝이 떨렸다.

“…멘토요?”

“네, 정수학 부장님이요.”

전수현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윤허담 선생님은 공동연구였고, 강아름 선생님은 수업연구 아이템을 통째로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남도윤 선생님은 혼자 하신 거라면서요? 그럼 진짜 대단하신 거예요.”

남도윤의 눈앞이 번쩍였다. 말은 칭찬이었지만, 그의 가슴속에서는 커다란 돌덩이가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다들 정수학한테서… 도움을 받았다고? 윤허담은 공동연구였다치고, 강아름까지… 모두?’

그는 숨을 삼켰다.

‘그럼, 내가 그렇게 혼자 버텨온 건… 오히려 나만 뒤처진 건가? 난 진짜 열사처럼 홀로 버티며 이뤄낸 성취가, 다른 이들에겐 정수학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그렇게 쉽게 주어진 건가.’

머리가 핑 돌았다. 책상 모서리를 움켜쥐었지만, 손아귀에 힘이 빠져 나갔다.

‘나는 진심이었는데. 나는 모든 걸 걸었는데. 그런데도… 결국 나는 패배자다.’

심장은 무겁게 내려앉았고, 숨은 목구멍에서 걸렸다. 자격지심은 이제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남도윤의 온몸을 휘감는 쇠사슬처럼 느껴졌다.

시퀀스 8. 회식


불판 위 삼겹살이 ‘치익—’ 소리를 내며 익어갔다. 하얀 연기가 천천히 피어오르고, 고소한 냄새가 좁은 술집 구석방을 가득 메웠다. 집게를 든 윤허담이 고기를 뒤집자, 불꽃이 잠깐 일렁였다.

“자, 오늘은 우리가 주인공입니다. 선생님들 모두 축하드립니다. 진짜 대단하고, 파이팅입니다.”

독고철 부장이 술잔을 높이 들었다. 목소리는 낮지만 힘이 있었다.

“짠!”


네 개의 잔이 부딪혔다. 경쾌한 유리 소리가 방 안에 맑게 퍼졌다. 강아름은 아직 서툴러서 작은 소주잔을 양손으로 꼭 쥔 채 조심스럽게 마셨다. 윤허담은 시원하게 들이켰고, 독고철은 한 모금만 삼킨 뒤 잔을 내려놓았다. 남도윤은 잔을 들고 한참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술에 가져갔다. 그의 속은 여전히 복잡했지만, 분위기만큼은 억지로라도 맞춰야 했다.

고기가 접시에 놓이고, 상추에 싸는 소리가 이어졌다. 강아름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전 아직도 실감이 안 나요. 이렇게 큰 대회에서 입상하다니…”

윤허담이 껄껄 웃었다.

“신규가 이렇게 잘할 줄이야. 뭐, 결국은 님도윤 선생님이 정수학 부장님을 자극을 준 덕분이겠죠?”

순간 남도윤의 귀가 번쩍 열렸다.

“자극이요?”

독고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사실 이번 일들, 다 얽혀 있어요. 남 선생님 수업이 시작이었지.”

독고철은 고기 한 점을 집어 들며 말을 이었다.

“정 부장이 그렇게 말하더라고. 남 선생님 수업을 보고, 자기도 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는 거야. 현충일 전에 계기교육 말이야. 애들이 그렇게 집중하는 걸 보고, ‘아, 나도 저렇게 감동 주는 수업을 하고 싶다’고. 그래서 만세운동 퍼포먼스도 하고, 군인 변장도 하고 더 실감 나게 만들려고 준비한 거라네.”

남도윤은 젓가락을 멈춘 채 굳어졌다.


‘정수학이… 나를 보고?’

독고철은 웃으며 소주를 따랐다.

“거기에, 연구대회 나간다는 얘길 듣고는 더 불타서 윤허담 데리고 같이 나간 거고. 강아름 선생한테도 ‘남 선 생처럼 해보라’고 아이템 주고 권유한 게 정 부장이었지.”


강아름이 얼굴을 붉혔다.


“맞아요… 사실 저도 수업 아이디어는 정 부장님이 많이 도와주셨어요. 근데 3월부터 남 선생님 수업 보고 나니까, 저도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윤허담이 맞장구쳤다.


“저도요. 정 부장님이 ‘도윤이한테 질 수 없지 않냐’면서 같이 준비하자고 해서 끌려갔거든요. 그런데 결과가 이렇게 된 거죠.”

남도윤은 한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젓가락 끝에서 고기 조각이 떨어져 접시에 부딪혔다.

‘내가… 그 사람에게 자극을 줬다고?’


머릿속이 복잡했다. 지금까지 정수학은 그저 가볍게만 살아가는 줄 알았다. 늘 장난스러운 말투, 무심한 태도. 그런데 그 뒤에서 자신을 보고 도전하고 있었다니.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졌다. 눈가가 살짝 젖었다.


“…내가 괜히 오해했군요.”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 부장님은… 참 멋진 분이네요.”


강아름과 윤허담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독고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웃음이 오가고, 소주잔이 몇 번 더 부딪혔다. 남도윤의 얼굴에도 잠시 미소가 스쳤다. 그때 문득 마음속에 떠오른 질문.


“근데… 현충원 원격수업은 어떻게 신청하는 건가요? 교육청 사이트에서 직접…? 아니면 다른 곳에?”


독고철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몰라. 내가 한 게 아니라서.”

“그럼… 진로인성부? 아니면 교무부?”

“에이, 알면서.”


독고철이 피식 웃었다.


“그 양반들 무슨 생각 하는지 알잖아. 골프 어디서 칠까 고민하지. 그거, 정수학 부장님이 작년부터 신청해논거야.”


남도윤의 젓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


“…뭐라고요?”

“응. 우리 학교 전체 교육으로 묶어서 작년부터 기를 쓰고 신청한 거야. 올해 현충원 수업한 것도, 사실 다 정 부장님 덕이지.”


순간, 남도윤의 눈앞이 흐려졌다.


‘내가 그렇게 감동 받았던 수업이… 정수학이 준비한 거였다니.’


그는 고개를 숙였다. 술잔 속 투명한 액체가 일렁이며 자신의 굳은 얼굴을 비췄다.


“그럼… 나는 그냥…”


목구멍이 막혔다.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윤허담이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뭐, 다 같이 열심히 한거죠. 결국은 학교 이름으로 나가는 거니까요.”


그러나 남도윤은 웃을 수 없었다. 입술이 굳게 닫혔다. 고기는 다 익어 접시에 쌓였지만, 그는 젓가락을 들지 못했다. 술잔만이 빈 채로 쌓여갔다.


‘졌구나. 그냥 졌다.’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건 단 하나의 문장이었다. 정수학이라는 이름 앞에 자신이 또 한 번 작아진다는 생각. 하지만 동시에, 그 안에서 작게 남은 불씨 하나가 있었다. 그래도, 그가 나를 보고 도전했다고 했잖아. 내가 완전히 무의미했던 건 아니겠지. 남도윤은 차갑게 식은 소주잔을 쥐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스스로를 위해 한잔을 들이켰다.


에필로그. 광복


다음날 아침, 교실 창가로 햇살이 비쳤다. 그러나 남도윤은 그 빛조차 원망스러웠다. 눈꺼풀은 무겁게 내려앉았고, 머리는 망치로 두드린 듯 욱신거렸다.


“으으…”

그는 6학년 연구실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셔츠는 구겨져 있었고, 넥타이는 반쯤 풀린 채였다. 머리칼은 밤새 구른 듯 제멋대로였다. 문이 열리며 강아름이 들어왔다. 그녀는 잔잔하게 웃으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선생님? 얼굴이 왜 이렇게 안 좋아 보여요?”

남도윤은 눈을 비비며 고개를 들었다.

“아… 좀… 술이… 아직 안 깨서….”

강아름이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어제 기억 나세요?”

“가물가물해요. 잘… 안 나네요. 혹시 제가 실수했나요?”

강아름은 웃음을 참는 듯 입술을 눌렀다.

“아니요, 저희야 뭐 괜찮은데. 근데 진짜 기억 안 나세요?”

“네, 진짜 전혀….”

“현충원 이야기하시다가 갑자기 술을 막 들이키시더라고요. 그러더니—”

“그러더니?”


남도윤이 다급히 물었다. 강아름은 잠시 시계를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앗, 1교시 시작이에요.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아니 잠깐만, 뭔데요?!”

그러나 강아름은 웃음만 남기고 나가버렸다. 남도윤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이놈의 술… 도대체 무슨 말 실수를 했단 말이지?’

그날 하루 종일 수업 시간에도 머릿속은 멍했다. 칠판에 글씨를 쓰면서도 마음속엔 오직 한 생각.

‘어제… 내가 무슨 짓을 했을까….’

드디어 방과후. 연구실에 모두가 모였다. 독고철, 윤허담, 강아름이 자리를 지키고 앉았다. 남도윤은 문을 닫자마자 곧장 말했다.

“저… 어제 제가… 혹시 무슨 실수했나요?”

윤허담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실수했지. 했어. 뭐, 술 마시면 그럴 수도 있죠.”

남도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큰 실수였나요?”

독고철이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실수.”

남도윤은 다급히 되물었다.

“정말 작은 실수인 거죠?”

강아름이 고개를 기울였다.

“글쎄요. 저는… 작다고 생각 안 하는데요.”

“네??”

독고철이 손을 휘저었다.

“작지, 작아. 나는 그렇게 생각해.”

윤허담도 거들었다.

“작죠, 작아.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강아름은 다시 못을 박았다.

“두 분 다… 진짜… 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남도윤은 속이 바짝 타들어갔다.

“…그럼… 큰 건가요?”

강아름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생각하기 나름이죠.”

윤허담이 덧붙였다.

“뭐 우리한테는 작죠. 왜냐면 우리한테 한 게 아니니까.”

“네? 그럼 누구한테…?”

강아름이 단호하게 말했다.

“정수학 부장님이요.”

남도윤은 얼어붙었다.

“…네??”

윤허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쵸. 그분의 관점에서 보면 좀 클 수도 있죠.”

독고철은 시큰둥하게 한마디 했다.

“근데 난 즐거웠어. 덕분에 웃었거든.”

남도윤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런데… 정수학 부장님은 어제 같이 안 계셨잖아요!”

“그랬지.”

독고철이 천천히 말했다.


“안 계셨다가… 나타나셨지.”

“…네? 어떻게요?”

윤허담이 웃으며 말했다.


“전화했죠.”

“그럴 리가요! 전화번호도 없는데….”

그때 번쩍— 머릿속에서 장면이 스쳤다. 남도윤은 고개를 홱 돌려 독고철을 바라봤다.

“설마… 부장님?”

독고철은 모른 척하며 스마트폰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어제 전화해달라고 해서 내가 해주고 바꿔줬지.”

남도윤의 뇌리에 또 한 장면이 번쩍 떠올랐다. 화려한 조명, 노래방, 마이크. 강아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계속 ‘내가 졌다, 졌지만 이제 따라잡겠다, 기다려라’ 하시면서… 정 부장님이랑 한잔 하자고 그러시더라고요. 결국 노래방까지 갔어요.”

“네에에에?!”

“두 분이 어깨동무하고 노래 부르셨잖아요. <형님> 부르면서 얼굴 부비고….”

남도윤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번쩍하며 기억이 파편처럼 돌아왔다. 화려한 조명, 마이크를 흔들며 목청껏 외치던 자신. 정수학과 나란히 앉아 술잔을 부딪치던 순간. 그리고…

“…정수학 부장님 너무 존경하고 사랑합니다아아—!”

그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되살아났다. 연구실은 폭소로 가득 찼다. 윤허담은 배를 잡고 웃었고, 강아름은 눈물을 글썽이며 웃음을 참았다. 독고철마저 드물게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남도윤은 얼굴을 양손으로 가리고 주저앉았다.

“…끝이다. 아 씨X...내 인생 끝났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