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hool Life1 6화 여름방학(완)

부제: 슬기로운 학교 생활, 본격 초딩 교사 성장 로망 소설

by Red eye


School Life1 6화 Summer Vacation


S1. 즐거운 혼란


참결초등학교의 복도에는 뜨거운 아지랑이가 아득하게 일렁였다. 7월의 맹렬한 햇살은 창밖 푸른 느티나무의 잎새를 더욱 도드라지게 태워내고 있었다. 2주하고도 하루. 여름방학이 코앞으로 다가온 지금, 아이들의 떠들썩한 웃음소리, 뛰어노는 발소리가 메아리쳤던 이 교사는 마치 묵은 상처를 덧내는 듯, 기이한 침묵과 기계음의 불협화음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나이스 시스템의 허공 속으로 아이들의 1학기를 갈무리해야 하는 마지막 주간, 교사들의 교실은 각각의 밀실이 되어 숨 막히는 전쟁터로 변모했다. 교무실과 멀리 떨어진 교사 개개인의 교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 안에서, 교사들은 아이들의 미래를 담보로 한, 무형의 칼날을 춤추게 하고 있었다. 그들이 써내려가는 단어 한 줄, 마침표 하나에는 너무나 많은 의미와 무게가 담겨 있었기에. 한 번 기록되면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아이의 평가가 그의 이름표에 영원히 각인될 터였다. 이 모든 기계음은 그들, 그러니까 아이들의 세상이 아닌, 교사들의 세계에서만 허락된 시끄럽고도 긴박한 리듬이었다. 학년 말, 아이들만큼이나 교사들의 심장 박동도 맹렬하게 요동치는 시기였다.


강아름의 6학년 2반 교실은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답답한 열기로 가득했다. 햇살은 바닥에 얼룩덜룩한 무늬를 만들어냈고, 칠판에는 마지막 단원 시험 문제풀이 흔적이 지워지지 않은 채 뿌옇게 남아 있었다. 교실 바닥에는 아이들이 내던져놓고 간 종이 쪼가리와 연필심, 분필 가루가 마치 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처럼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녀의 미간은 마치 매듭처럼 꽁꽁 묶여 있었다. 새하얀 얼굴 위로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교탁 옆 낡은 의자에 허리를 곧게 세우고 앉은 강아름은 모니터에 나이스 화면을 띄워놓고 학생별 수행평가 결과를 입력하고 있었다. 엑셀 표와 나이스 창을 오가며 손가락이 춤을 추다가도, 이내 멈칫하며 헛손질을 했다.

그녀의 손은 어느새 습관처럼 휴대폰을 향했다. 휴대폰 배경화면에는 반짝거리는 보라색 여행 가방 사진이 가득 차 있었다. 마치 그녀의 염원을 대변이라도 하듯. 항공권 예약 앱을 열어 로마행 항공편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파리에서 예약한 사랑스러운 숙소 내역을 꼼꼼히 확인했다.


"후후… 이제 하루만 버티면, 나는 진짜 유럽 땅을 밟는 거야!"


그녀의 입가에는 피곤함 속에서도 꿈틀거리는 야릇한 설렘이 번졌다. 작은 교실에 갇힌 몸뚱이를 들고는 파리와 로마, 런던과 바르셀로나를 유영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책상 위에 무심코 쌓여 있는 수행평가 기록지를 집어 들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말투에는 사뭇 진지함이 깃들어 있었다.


"자, 이 아이는 발표는 조금 서툴렀지만… 글쓰기에서 아주 열심히 했지. 그 열정은 꼭 기록해 줘야 해. 박사님 문체처럼 써야 하는데…!"


완벽하고 이상적인 교사상을 꿈꾸는 스물넷의 강아름에게, 이 행발 입력의 시간은 그 어떤 시험보다 고통스러웠다.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행동 특성 및 종합 의견란. 단어 하나, 조사의 위치까지도 수십 번을 곱씹고 수정했다. 자칫 그녀의 한 문장이 아이의 앞날에 흠집을 낼까, 그 순수하고 반짝이는 아이들의 평가를 자신의 어설픈 문장력으로 더럽힐까 봐 온몸이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었다.

그러나 잠시 후, 또 다른 학생의 결과물 위에 시선을 고정한 강아름은 그만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휴, 얘는 수업 태도는 정말 좋은데… 결과물은 엉망이네. 에휴… 이걸 어떻게 써야 하지?"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성적 기록지를 입력하다가도, 창가 너머로 들어오는 뜨거운 햇살을 바라보며 그녀의 눈은 다시 먼 유럽 하늘로 향했다. 그 눈빛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콜로세움 앞에서 사진 찍으면 진짜 멋지겠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미 파리의 비둘기 떼와 로마의 유적지가 묻어나는 듯했다. 머릿속은 어느새 비행기 창문 밖으로 펼쳐지는 새하얀 구름과 알프스 산맥의 풍경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옆구리에는 스페인어 회화 책이 놓여 있었다.


"¡Hola! ¿Cómo estás? Me llamo Areum!"


낮은 목소리로 스페인어를 중얼거리다 이내 피식 웃음이 터졌다. 런던과 파리, 스위스를 지나 스페인까지! 빽빽하게 짜놓은 여행 일정표를 떠올리자 피로가 씻은 듯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아이들의 일 년을 몇 줄의 문장으로 기록하는 고통스러움도, 학부모와 대면할 때마다 차마 다 말하지 못했던 불편함도, 그녀의 청춘을 억압하는 그 모든 회색빛 현실이 엷은 공기처럼 희미해지는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이거 딱 입력하고 나면... 맘껏 소리 질러도 되는 거지?"


그녀는 교실 천장을 올려다보며 나직이 속삭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소녀처럼 해맑은 미소가 가득했다. 그녀에게 이곳은 잠시 머무는 곳일 뿐, 진짜 삶은 그 여름방학의 끝에, 유럽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시작 속에 놓여 있었다. 그녀의 귀에는 이미 먼 도시의 비둘기 울음소리가 아련하게 들리는 듯했다.


남도윤의 6학년 4반 교실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창문은 굳게 닫혔고, 햇살 한 조각 스며들 틈 없이 암막 커튼으로 철저히 가려져 있었다. 마치 외부의 모든 소란을 차단하겠다는 듯이. 남도윤, 서른 살. 교단에 선 지 이제 겨우 2년 차. 그는 계획과 야망으로 무장한, 소문만 무성한 무시무시한 교사였다. 그의 책상 위에는 두꺼운 논문집, 교육학 서적, 그리고 학생들의 수행평가 기록지가 마치 전투 진영을 방불케 하듯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의 모니터 화면은 기괴하게도 반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쪽은 나이스 입력창, 다른 쪽은 '여름방학 일정표.xlsx'라는 파일이 열려 있었다. 엑셀 화면에는 방학의 31일이 시시각각 분할돼 있었고, 칸마다 빽빽하게 들어찬 글자들이 그의 집요함을 웅변하고 있었다.

시간 계획

07:00–08:30 아침 러닝 (기록 단축 갱신)

09:00–12:00 대학원 세미나 (발표 자료 준비)

13:00–16:00 논문 집필 (1차 초안 완성)

18:00–21:00 영어 강독 스터디 (원서 독파)

…그는 마치 전쟁 지도를 짜는 장군처럼 모니터를 응시하며 펜으로 일정표를 수정했다.


"이번 방학은…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을 거다. 반드시."


그는 한숨 대신, 강철 같은 결연한 눈빛을 보였다. 그의 콧날이 오만하게 보이고 그의 어깨는 굳게 펴져 있었다, 손은 끊임없이 마우스를 쥐었다 놓았다 하며 다음 단계를 지시하는 장군의 그것처럼 움직였다. 그는 교단에 선 '교사' 이전에, 더 거대한 학문의 세계에서 인정받고 싶은 '학자'였다. 이 초등학교 교실이라는 공간은 그에게 그저 다음 계단으로 올라서기 위한 징검다리일 뿐이었다. 그는 자신을 '승리하는 전투 전문가'라고 불렀다. 주변의 교사들이 행발 때문에 앓는 소리를 내든, 아이들이 뛰어놀며 소란을 피우든, 그는 그 모든 것을 '불필요한 소음'으로 치부했다. 그는 언제나 효율성과 성과를 최우선으로 여겼다.

그러나 동시에, 성적 처리라는 현실의 벽이 앞을 막고 있었다. 나이스 입력창을 보며 그는 중얼거린다. 그 목소리에는 지루함과 단조로움이 섞여 있었다.


"얘는 태도 점수는 확실히 줘야 하고… 참여도도 괜찮네. 오케이. 다음."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길은 정확하고 빨랐지만, 그의 눈은 끊임없이 나이스 창과 엑셀 일정을 왔다 갔다 했다. 성적 기록을 마친 뒤, 곧바로 두꺼운 논문 참고문헌을 펼쳤다.


"교육과정 운영과 교사 전문성… 흐음, 이 논문을 기반으로 써야겠군."

그의 머릿속은 이미 두 가지 전선에서 동시에 돌아가고 있었다. 하나는 아이들의 기록을 정확히 입력해야 하는 교사로서의 임무, 또 하나는 자신을 더 높은 무대로 끌어올릴 연구자로서의 야망. 그의 얼굴에는 피곤함보다 승부욕이 더 짙게 묻어 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을 넘어서기 위한, 그리고 언젠가 마주할 '그 라이벌'을 철저히 제압하기 위한 고독하고도 치열한 전투를 치르는 중이었다. 그의 눈에는 이미, 다음 학기의 진급 심사 표창장이 선명하게 아로새겨져 있었다.


한지온의 5학년 2반 교실은 온기가 스며들 틈 없는 차가운 공기로 가득했다. 열린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조차도 그의 피부에 닿자마자 얼어붙는 듯했다. 그녀의 책상 위는 다른 교사들과는 달리 놀랍도록 깔끔했다. 먼지 한 톨 없이 정돈된 책상 위에는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았다.

임용고시 4수 끝에 겨우 합격해 교단에 선 스물여덟의 한지온은, 교실 한가운데 놓인 자신의 책상 앞에 앉아, 텅 빈 노트북 화면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나이스 화면은 켜져 있었지만, 아무 입력도 하지 못한 채 커서만 깜빡이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은 자판 위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고, 시선은 창밖 멀리 시야에서 사라지는 비행운을 따라 아득하게 흩어졌다. 초점 없이 흐려진 그의 눈빛 속에는 어떤 기대도, 어떤 의지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공허하고 조용했다.


"방학 동안… 나는 뭘 하지?"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아무도 답해주지 않는 질문들만이 차가운 얼음 조각들처럼 부딪치며 메아리쳤다. 창밖에서는 매미 소리가 맴맴 울고 있었고, 햇살은 무심하리만큼 환하게 교실을 비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텅 빈 교실처럼 고요했고,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복도 너머 다른 교실의 프린터 소음, 교사들의 분주한 발걸음이 울려 퍼졌지만, 한지온의 세계는 그 모든 것을 차단한 채 고요하기만 했다. 책상 위에는 반 아이들이 제출한 수행평가 결과물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러나 그의 손은 그 위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미간은 희미하게 찌푸려져 있었지만, 이는 고민이라기보다는 어딘가 불안하고 지쳐 보이는 표정이었다. 책상 아래에는 지난 며칠 밤새 고민하며 써 내려갔을 행발 초안이 종이뭉치로 구겨져 나뒹굴고 있었다. 완벽하게 써내려 가야 한다는 강박은 오히려 그를 마비시켰다. 아이들의 행동을 미처 다 담아내지 못할까 봐, 자신이 내린 평가가 혹시나 아이들에게 상처가 될까 봐, 그는 한 글자도 더 적을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적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교실에서 아이들을 바라볼 때는 작은 표정 변화 하나 놓치지 않는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였지만, 막상 그 아이들의 '평가'를 문장으로 옮기려 할 때마다 그는 거대한 벽에 부딪히는 듯했다.

가끔 책상 위의 학생 작품을 들여다보며, 그는 마치 목소리를 잃은 듯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얘는 발표는 괜찮았는데… 에휴, 뭐라고 적어야 하지?"


낮은 한숨만이 흘러나왔다. 옆자리에 쌓여 있는 생활기록부 서류들이 점점 더 무겁게만 느껴졌다. 점심시간, 교실을 비워둔 사이 아이들끼리 다치기라도 할까 봐, 연구실에 쉬러 가지도 않았다.


"전, 괜찮아요… 제가 애들 계속 보고 있을께요."


무심하게 던지던 그 한마디에는 책임감과 동시에 아이들을 향한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 괜찮은 건가? 다들 저렇게 바쁜데… 나만 이렇게 멍 때려도 되는 건가?"


목소리는 마치 실을 꿰매듯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그의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고, 심장은 공허하게 쿵, 쿵, 하고 뛰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열망하지도, 아무것도 바라지도 않는, 마치 시간조차 멈춘 인형처럼 앉아 있었다. 세상의 모든 색채가 바래고, 오직 희미한 회색빛만이 그의 주변을 감싸는 듯했다.

강아름의 희망적인 설렘, 남도윤의 팽팽한 야망, 그리고 한지온의 서늘한 공허함. 이 세 가지 극명하게 다른 감정들은 마치 불규칙한 교향악단처럼 각각의 교실에서 서로 다른 음색을 흩뿌리고 있었다. 각자의 시간 속에서 각자의 여름방학을 기다리고 있던 그때였다.

징, 하는 기분 나쁜 전자음과 함께 교실마다 설치된 공람문서 모니터가 일제히 빛을 발했다. 이내 빛은 점점 더 선명해졌고, 푸른 화면 위로 섬뜩하리만큼 명확한 문장이 떠올랐다.


[연구부장 전수현으로부터 3명에게 온 메시지]

"공람문서 확인해주시고, 교무실로 내려와주세요."

세 사람은 동시에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들이 바라보는 화면 속에는 잊힐 듯 희미한 문장들이 다시 한번 섬광처럼 번뜩였다.


[제목: 2026 여름방학 새내기 교사 길라잡이 필수 참여 연수 일정 안내]


그 문장은 빛처럼 날아들어 각자의 공간에 뿌려졌다. 강아름의 설렘 위로, 남도윤의 야망 위로, 그리고 한지온의 공허함 위로. 문득, 한여름의 쨍한 햇살이 세 사람의 교실을 향해 쏟아져 내리는 듯했다.


S2. 정오의 이중주


점심시간, 참결초등학교 6학년 연구실은 마치 삶의 모든 냄새를 한데 뒤섞은 듯한 기묘한 공간이었다. 창문으로 쏟아지는 한여름의 햇살은 눈부셨지만, 그 빛마저도 눅진한 도시락 냄새와 오래된 서류철의 퀴퀴한 종이 냄새, 그리고 누군가 두고 간 발포 비타민의 상큼한 기운이 뒤엉켜 마치 거대한 혼돈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반쯤 먹다 남은 김밥 조각, 어젯밤을 새며 쌓아 올렸을 공문서 더미, 그리고 주인 잃은 아이들의 잡동사니가 마치 예술 작품처럼 어수선하게 널려 있었다. 평화로운 정오였지만,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연구실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모든 혼란 속에서도, 강아름의 자리만큼은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이 순간만을 오래도록 기다렸다는 듯, 책상 위에 두툼한 유럽 여행 가이드북과 프린트된 로마행 항공권을 보란 듯이 펼쳐 놓았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에메랄드처럼 반짝였고, 손짓 하나하나에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설렘이 묻어 있었다.


“드디어! 드디어 유럽 갑니다! 파리랑 로마요! 완전 꿈만 같지 않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연구실의 축 늘어진 공기를 꿰뚫고 방 안을 가득 메우며 가볍게 튀어 올랐다. 이지혜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와, 아름 선생님, 좋겠다! 첫 방학부터 해외라니. 난 집에서 방콕이나 할 텐데…”


두 사람은 이내 열기를 띠고 유럽의 낭만적인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에펠탑 야경, 쫀득한 젤라토 맛, 콜로세움의 웅장함… 강아름은 마치 아이들에게 수업 발표를 하듯 손을 휘저으며 신들린 듯 말을 이어갔다. 이지혜는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고, 윤허담까지 합세해 웃음을 지어주었다.


“사진 많이 찍어오셔야 돼요. 나중에 애들 보여주면 난리 날걸요.”


그 순간, 방 안 한쪽에서 묵묵히 서류를 정리하던 독고철이 서류철을 들고 굳은 표정으로 일어섰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단정하고 건조했다.


“자, 일람표 작성은 거의 끝났죠? 월요일엔 학년 내 검토, 순환식으로 돌아가면서 보겠습니다. 수요일엔 학년 간 검토가 있으니 우리 학년은 5학년 걸 맡아요. 방학 중 근무 계획도 출력해서 서명해 주시고요.”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모두가 어색함에 강아름의 유럽 여행 가이드북을 쳐다보거나, 괜스레 제 발끝을 내려다봤다. 독고철은 상관없다는 듯 곧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강아름은 애써 밝은 분위기를 다시 불어넣으려는 듯 물었다.


“다들 방학 중에 여행 가시나요?”


독고철은 무심하게 대꾸했다.


“저는 뭐… 원래 하던 게 있어서 계속 학교에 있을 겁니다.”


윤허담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저는 체육 실기 연수 60시간 신청했어요. 방학 내내 뛰고 구르고 굴러다녀야죠.”


강아름은 감탄을 터뜨렸다.


“와, 허담 선생님! 정말 체육 부장 선생님답네요!”


그러자 노트북을 펴놓고 있던 남도윤이 그 특유의 무심한 얼굴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담백했지만, 그 말투에는 은근한 냉기가 감돌았다.


“저는 논문 써야 하고, 교육청에서 수학교과 자료집 집필도 있고, 연수도 몇 개 잡혀 있습니다. 뭐… 바쁘겠죠.”


그는 순간적으로 강아름이 흔드는 항공권이 괜스레 신경을 거슬렸다. 자신은 한 줄 한 줄 일정표를 빽빽하게 채워 넣고 있는데, 눈앞에서 유럽 여행이 마치 엄청난 성취인 것처럼 자랑되는 것이 못내 불편하고 비효율적으로 느껴졌다.

강아름은 그의 싸늘한 어투를 애써 무시하며 장난스레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래요? 저번 회식 이후로 더 열심히 하시는 것 같던데요?”


남도윤은 헛기침으로 대답을 대신하며 시선을 피했다.


“아니에요. 원래 하던 대로 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내, 속에 담아두었던 그의 진짜 속마음이 말에 묻어 나왔다.


“솔직히 저는 여행 잘 모르겠네요. 잠깐 다녀와서 ‘나 어디 갔다 왔다’ 얘기하는 거 말고 남는 게 있나요? 차

라리 논문 한 편, 연수 한 번이 훨씬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말은 차분했지만, 끝은 뾰족한 칼날처럼 강아름의 마음에 비수처럼 박혔다.

강아름의 미소가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굳었다. 손에 쥔 유럽 가이드북을 덮는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뜨거운 울화통을 애써 누르려는 듯,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때였다. 연구실 구석, 아무도 시선 두지 않았던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던 한지온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텅 빈 그릇을 앞에 두고, 마치 투명인간처럼 존재감을 지우고 있던 참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향하지 않은 자리에서, 그녀는 그들의 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듣고 있었던 것이다.


“여행이요?”


그녀는 앙상하게 마른 입술의 한쪽 끝을 비틀며 낮게 읊조렸다. 그의 얼굴에는 감정 없는 비웃음이 깃들어 있었다.


“솔직히 현실 도피 아닌가요? 사진 몇 장 찍고 와서 ‘나 유럽 갔다 왔다’ 티 내는 거 말고 뭐가 그렇게 대단한지 모르겠네요.”


순간, 연구실 안의 모든 공기가 영하로 떨어지는 듯 얼어붙었다. 강아름의 눈빛에서 총명하게 빛나던 생기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애써 표정을 유지하려 했지만, 억울함과 당혹감, 그리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동시에 그녀의 얼굴 위로 떠올랐다. 윤허담은 어색하게 젓가락으로 도시락 반찬만 휘저었고, 이지혜는 억지 웃음을 지으며 작은 목소리로 “그래도 추억은 남잖아요”라고 중재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 공허했다.

남도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속은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방금 전 자신이 했던 말과 너무나도 닮은, 아니, 훨씬 더 노골적이고 잔인한 표현으로 자신의 속내를 대변한 한지온의 말에 불편했다. 누군가 자신의 어두운 이면을 너무나 쉽게, 너무나 날카롭게 끄집어낸 듯한 불쾌감이 그의 가슴 언저리를 긁었다. 그는 노트북 화면만 뚫어져라 바라보며 무심한 척했지만, 그의 귓불은 거짓말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한지온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유럽 몇 바퀴 돈다고 교사로서 뭐가 달라집니까? 결국 여기, 교실에서 뭘 하느냐가 중요한 거죠. 여행 갔다 와서 애들 앞에 선다고 더 좋은 선생님이 되나요?”

칼날 같은 그의 말이 정적 속을 꿰뚫고 연구실 한가운데 떨어졌다. 여름 더위를 식히려는 선풍기 덜컹거리는 소리만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 강아름은 천천히 항공권 인쇄본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속에서는 억울함과 모멸감이 치밀어 올랐지만, 밖으로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입술 가장자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윤허담과 이지혜는 서로 눈치만 주고받을 뿐, 그 누구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모두가 같은, 싸늘한 질문을 떠올렸다.

—한지온은, 왜 여기에 있지? 그는 5학년 소속 아닌가?_언제부터 이 자리에 앉아 있었지?_


S3. 드라이 스카이 날벼락


오후, 참결초등학교의 교무실은 여전히 생지옥 같았다. 전화 벨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려대고, 복사기는 종이를 우걱우걱 삼키고 뱉어내며 요란한 기계음을 토해냈다. 교사들은 어깨를 으쓱하며 서류철 더미를 옮기고, 누군가는 지쳐서 늘어진 고무줄처럼 허공을 응시했다. 책상 위에는 방학 전 마지막 처리 전쟁에서 살아남아야 할 서류철들이 바벨탑처럼 위태롭게 쌓여 있었다. 전쟁 같은 혼돈 속에서도 전수현 연구부장의 자리만큼은 쨍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녀는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 없이, 안경 너머의 눈빛은 무심한 사신(死神)의 그것과도 같았다.

강아름은 로마행 비행기에 오르지 못하는 죄수처럼 터덜터덜 교무실 문을 열었다. 그녀의 뒤를 이어 남도윤은 잔뜩 굳은 얼굴로, 한지온은 반쯤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들어섰다. 세 새내기 교사는 마치 단두대에 오르는 죄인들처럼 나란히 전수현 연구부장 앞에 섰다.

전수현은 그 혼돈 속에서도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모습으로 세 사람을 맞았다. 안경을 고쳐 쓰며 담담하게, 그러나 듣는 이의 심장을 얼어붙게 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어떤 감정의 파고도 허락하지 않았다.


"자, 세 분 오셨군요.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만, 교육청 필수 지침입니다. 저경력 교사들은 방학식 다음 주 월요일부터 영종도 연수원에서 필수 연수를 받습니다. 다섯 날 동안, 총 30시간 합숙 과정입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교무실 안의 공기가 마치 거대한 풍선처럼 부풀었다 터지는 듯했다.


"저… 항공권 예약했는데요!"


강아름은 마치 스프링이 달린 인형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잿빛으로 질려 버렸고, 방금 전까지 생기가 돌던 눈동자는 동공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울상으로 내뱉은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그녀 머릿속에는 파리의 에펠탑이 무너지고, 로마의 콜로세움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며, 젤라또가 아스팔트 위에서 녹아내리는 참혹한 풍경이 스치듯 지나갔다. 심장이 발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입술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남도윤도 더 이상 억눌러 두었던 분노를 참지 못했다. 그의 잘생긴 얼굴은 차갑게 얼어붙었고, 미간에는 깊은 골이 패였다. 그의 눈빛은 이성이 아닌 분노로 번뜩였다.


"그럼 제 논문은요?! 저는 이번 여름을 위해 세 달 전부터… 아니, 반년 전부터 모든 계획을 다 짜놨는데…!"

그의 손은 마치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듯 책상 위에 놓인 두꺼운 논문집 위에 불끈 힘을 주었다. 무기가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장수처럼, 그는 허탈했고, 분노했다. 그에게 방학은 단순히 쉬는 시간이 아니었다. 정복해야 할 영토이자, 자신을 증명할 전쟁터였다. 그런데 이제, 그 전장의 문이 닫히고 있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책상을 뒤엎어 버릴 기세였다.

그 옆에서 한지온은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웃음은 조롱에 가까웠다. 그에게서는 더 이상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뭐, 어차피… 계획도 없었으니까. 그래도… 좀 쉬고 싶었는데요."


겉으로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보였지만, 속은 뜨거운 울컥함으로 메말라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아무것도 안 할 권리"가 강제로 침해당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차라리 아무것도 강요하지 말아 달라고, 제발 내버려 두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이 코믹하고도 비극적인 상황에 한지온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세 사람의 표정이 동시에 얼어붙은 그 순간,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한지수 교감의 입가가 실룩거렸다. 그는 마치 이들을 기다렸다는 듯, 짧고 단호하게 말을 덧붙였다.


"아주 중요한 연수입니다, 세 분에게 반드시 필요해요. 젊었을 때 교사로서 역량을 갈고닦아야죠. 제가 아는 한 최고의 연수가 될 겁니다. 잘 다녀오세요."


못 박듯 던져진 말에 세 사람은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감히 토를 달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교감의 그 서늘한 눈빛은 '더 이상 입을 벙긋거리면 네 미래에 흠집을 내주겠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들은 그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교무실 문이 '덜컥!' 하고 요란하게 열리며 거대한 그림자가 들어섰다. 이태웅 교장이었다. 특유의 웅장한 체구와 함께, 마치 장군이 행차하는 듯 쩌렁쩌렁 울리는 낮고 굵은 목소리가 교무실 방 안을 가득 메웠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불평불만도 허락하지 않는 권위가 묻어났다.


"무슨 일인가? 쩌렁쩌렁 목소리가 다 들리네! 껄껄껄!"


교감 한지수는 교장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얼굴은 방금 전까지의 단호한 표정과는 180도 다른,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상냥한 미소로 바뀌어 있었다. 그 미소는 마치 잘 짜인 가면처럼 어색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빠르게 교장의 옆으로 다가서며 그의 팔짱을 끼고 조잘거렸다.


"교장 선생님! 마침 잘 오셨습니다! 이번 여름에 이 세 분이 아주 중요한 연수를 합숙으로 다녀오십니다! 영종도 연수원에서 무려 5일 동안이라구요!"


이태웅 교장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크하하하!' 하고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소리는 교무실 천장을 뒤흔드는 듯했다.


"오, 그래! 아주 잘 됐네! 젊을 때는 이런 거 꼭 해봐야 해! 합숙하면서 밤새도록 토론도 하고, 아침엔 시원하게 바닷가에서 뛰고, 저녁엔 서로 고민을 털어놓으며 의지도 하고! 그야말로 평생 못 잊을 경험이 될 거야!"

그의 환한 격려는 마치 축복 같았지만, 세 새내기 교사에게는 영락없는 날벼락이었다.


'내 유럽! 내 항공권…! 난 이제 어떡해! 망했어!' 강아름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절규했다. 그녀의 내면에서는 온갖 욕설이 난무했다.


'논문… 내 계획표가… 내 인생 계획이 다 무너졌어! 이런 비효율적인 연수라니! 최악이야!' 남도윤은 이가 갈렸다. 그의 속은 끓어오르는 용암처럼 부글거렸다.


'하아… 차라리 몰래 쉬고 싶었는데… 이게 무슨 강제 행복 연수냐… 죽여줘…' 한지온은 한숨 섞인 체념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의 영혼은 이미 탈곡기에서 으깨지는 중이었다.


교장은 세 사람의 굳은 표정은 전혀 보지 못한 채, 마치 자신의 훈화 말씀에 감동한 듯 흡족한 얼굴로 연신 어깨를 두드리고 등을 두드리며 웃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어깨에 닿을 때마다 세 사람은 기묘한 오한을 느꼈다.

그러다 문득 교장이 손가락을 튕기며 물었다.

"그런데, 차는 누가 있나?"


세 사람은 동시에, 그리고 매우 작은 목소리로 고개를 저었다. 그들에게는 자가용이란, 아직 미래의 환상과도 같았다. 교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웅얼거렸다.


"없어? 거긴 차 없으면 불편한데… 선생님들 중에 누가 영종도에 들어가는 사람 없나?"


전수현 연구부장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표정은 언제나처럼 무심했지만, 잠시 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였다. 교감 한지수가 언제나처럼 재빨리 끼어들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는 듯 그녀의 얼굴에 영광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아! 교장 선생님! 생각났습니다! 정수학 융합과학부장님이 이번 여름에 영종도 과학교육원에서 여름방학 특강을 한다고 합니다!"


'정수학'이라는 이름이 툭, 교감의 입에서 떨어졌다. 그 순간, 세 새내기 교사의 심장이 각자 다른 이유로 철렁 내려앉았다. 그 이름은 누군가에게는 잊고 싶은 악몽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래?! 그럼 됐네!"


교장은 기다렸다는 듯 즉시 책상 위의 인터폰을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커다란 문제를 해결했다는 만족감이

가득했다.


"여보게, 정 부장님! 교장 이태웅이네! 하하하! 잘 지내는가? 듣자 하니 이번에 영종도에서 특강한다며? 우리 학교 새내기 삼총사 좀 연수원까지 태워줘! 마침 자네가 가는 교육과학원이랑 딱 붙어있으니깐… 이거야말로 하늘이 준 인연 아니겠나? 어때? 그치? 고맙네, 크하하하!"


세 사람은 그 순간, 동시에,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은 한순간에 파랗게 질렸고, 눈동자에는 절망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각자의 속에서, 통곡에 가까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또 정수학이야…?!'


교무실의 소란은 계속되었지만, 그들의 세계는 이미 침묵의 심해로 가라앉는 중이었다.


S4. 대교 위의 대토론회


참결초등학교 교문 앞은 여름방학을 앞둔 교사들의 희미한 희망과 무심한 현실이 뒤섞인 공간이었다. 한낮의 햇볕이 아스팔트 위에서 아지랑이를 피워 올렸지만, 강아름, 남도윤, 한지온 세 새내기 교사의 표정은 그늘져 있었다. 그들은 마치 삼색 슬리퍼처럼 나란히 서 있었다. 전수현 연구부장의 호출을 받고 교무실에서 터벅터벅 걸어 나온 이들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른 채 막연히 발끝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글픈 한숨이 허공에 흩어졌다.

그때였다. 쌔액- 소리도 없이 검은색 EV9 한 대가 그들 앞에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 마치 미래에서 온 우주선 같기도, 혹은 이 비현실적인 상황을 더욱 심화시키는 무대장치 같기도 했다. 창문이 스르륵, 소리 없이 내려가고 운전석에서는 정수학 융합과학부장의 얼굴이 활짝 열렸다. 그의 얼굴은 여름 한낮의 태양보다 더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자, 새내기 삼총사! 다들 행복의 섬 영종도로 떠날 준비가 되었나요? 렛츠고!”


그의 목소리는 마치 여행사 직원이 휴양지 패키지를 설명하듯 들떠 있었다. 그의 목소리 톤에는 어떤 고민이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트렁크가 '위이잉' 소리를 내며 스르륵 열렸다. 강아름은 겨우 로마행 비행기에 오르지 못한 보라색 캐리어를 욱여넣었다. 남도윤은 효율성을 강조하듯 심플한 백팩 하나를 던져 넣었고, 한지온은 아예 짐도 없는 작은 쇼핑백 하나를 트렁크 한쪽에 내려놓았다.


“오, 한지온 선생님은 역시 감이 좋네! 앞자리로 와. 내가 길잡이니까, 부조종사 자리잖아?”


정수학의 농담에 한지온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 어떤 망설임도 없이 스르륵, 앞좌석에 자연스럽게 몸을 욱여넣었다. 마치 어색한 뒷좌석에 앉아 있을 바엔, 부장님의 옆에서 조용히 관찰자 포지션을 유지하겠다는 전략적인 움직임 같았다. 덕분에 강아름과 남도윤은 꼼짝없이 뒷좌석에 함께 앉아야 했다.

전기차는 시동이 걸렸는지 안 걸렸는지도 모를 만큼 조용했다. 위이잉, 하는 모터 소리만 희미하게 들릴 뿐,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매끄럽게 교문을 빠져나갔다. 정수학은 능숙하게 핸들을 돌리며 백미러로 뒷좌석을 한 번 쓱, 스캔했다. 남도윤과 강아름 사이에는 침묵이 팽팽하게 감돌았다. 매일같이 복도에서 마주치고 회식도 함께하던 사이인데, 이렇게 작은 공간에 단둘이 앉으니, 묘하게 어색하고 불편한 기운이 두 사람을 에워쌌다.

강아름은 안전벨트를 매려다, 우연히 남도윤의 손가락이 자신의 손등을 스치는 감각에 화들짝 놀라며 손을 움찔거렸다. 너무나도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뜨거운 불에 데인 것처럼 민망함이 확 몰려왔다. 강아름은 당황한 나머지 굳어진 얼굴로 창밖만 바라봤다. 햇볕에 그을리지도 않은 그녀의 귀는 삽시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남도윤 역시 뜨거운 주전자를 만진 것처럼 재빠르게 손을 떼었지만, 심장이 마치 전날 마신 커피처럼 격렬하게 '두근두근'거렸다.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턱을 꼿꼿이 세운 채 앞만 응시했다. 그러나 그의 귓불 역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앞좌석의 한지온은 룸미러로 그 장면을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그는 아무 감정 없는 표정으로 '뭐하는 거야, 저것들은?' 하는 듯 눈살을 가늘게 찌푸렸다. 그는 사람들의 감정을 놀랍도록 예민하게 읽어내는 능력이 있었지만, 그 감정을 함께 느끼거나 개입하는 것에는 철저히 무관심한 듯 보였다.

“자, 손님들! 잠시 후면 인천대교를 건넙니다! 밖에 뷰 좀 보세요, 어때요? 아침부터 물때가 만조네요, 서해 바다의 장엄한 모습이 장관이죠? 멋지다, 멋져!”

정수학은 마치 여행사 가이드처럼 흥겹게 인천대교를 소개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시끌벅적한 관광객 무리를 이끄는 베테랑의 여유가 묻어 있었다.

남도윤은 어색한 공기를 깰 겸, 정수학에게 말을 건넸다.

“부장님, 차가 좋네요? EV9이라니, 부장님은 왠지 내연기관 차를 선호하실 것 같은 이미지였는데.”

정수학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 나, 운전하는 것도 사실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냥 가족들 편하라고 하는 거지, 하하하.”

그 순간, 앞좌석의 한지온이 기가 막힌 타이밍에 말을 끊고 들어왔다.

“그런데 부장님은 방학인데 안 쉬세요? 아까 무슨 캠프 강사 하신다고.”

한지온의 말은 시니컬했고, 돌직구였다. 강아름과 남도윤은 '어휴, 저놈의 사회성'이라는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어디서 쉬어야 하는데? 집에서? 나가는 게 쉬는 거야! 와이프가 집에 있지 말라고 계속 그런다. 나도 집에 있어봤자 눈치 보이고. 그리고 애들은 아직 어려서 어린이집, 유치원 가니깐, 집에 있어봤자. 뭐 와이프만 방학이지, 나는 열심히 알바나 해야지, 하하하!”

정수학은 한지온의 날카로운 질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호탕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에는 가정이 있는 직장인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근데 무슨 강사를요?” 한지온은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나 과학교과연구회 회장만 5년 했었어. 과학교과연구회 쪽에서는 그래도 좀 영향력이 있지, 에헴!”

정수학은 어깨를 으쓱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강아름은 놀란 눈으로 물었다.

“전혀 몰랐는데요? 부장님이 그렇게 대단하신 분인 줄…”

정수학은 흐뭇한 듯 웃으며 답했다.

“원래 교육과학연구원 여름, 겨울 캠프, 지역 영재 강사는 한 10년 했었어. 애들 키우느라 한 5년 쉰 거지.”

남도윤은 자신도 모르게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는 미묘한 패배감이 섞여 있었다.

“이럴 수가… 또 진 것 같네요.”

정수학은 백미러로 남도윤을 힐끗 보며 얄궂게 웃었다.

“도윤 선생님은 지기는 뭘 또. 저번에 존경한다며, 형님, 형님 하더만.”

남도윤은 그 순간 입을 꾹 다물며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그의 얼굴은 다시 한 번 붉게 달아올랐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삐질삐질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그는 지금 당장 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생각만 해도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다. 그의 냉철한 이성이 잠시 삐끗했던, '회식 다음 날의 대참사'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강아름은 진심으로 감탄한 얼굴로 말했다.

“우와, 부장님 정말 보면 볼수록 대단하신 분이었군요. 어떻게 그렇게 계속 바쁘게 사시죠?”

한지온은 그 특유의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게요, 하나도 티가 안 나서.”

“왜 티가 안 나는지는 나도 모르겠네. 하하.”

정수학은 다시 한번 호탕하게 웃었다. 인천대교를 건너는 그 길은 끝없는 질문과 답변의 연속이었다. 정수학은 교사로서의 삶을 유연하게 받아들이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채워나가는 인물처럼 보였다.

“그런데 부장님.”

침묵하던 남도윤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표정은 다시 냉철한 학자의 그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렇게 방학 중에 강제로 연수를 들어야 하는 건 잘못된 거 아닌가요? 방학 중에는 학기 중에 지친 심신의 휴식과 자기계발을 위한 시간인데…”

강아름은 옳다구나 하며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진짜 평소에 아침부터 퇴근할 때까지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바쁘다가 이렇게 방학 중에 필수 연수라고 해서 강제로 참여하게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저희한테 너무 불합리하잖아요!”

정수학은 백미러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피식 웃었다.

“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그런데, 우리는 방학 때 쉬는 것이 아니에요. 방학의 의미를 조금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차 안의 분위기는 갑자기 진지해졌다.

한지온은 흐릿한 눈빛으로 정수학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 친구들은 교사들, 특히 초등학교 교사들을 매우 편한 직업이라고 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방학이거든요. 그리고 그나마 빠른 퇴근 시간. 저도 그렇게 생각하기는 해요. 이런 시간이나마 주어지는 게 이 직업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정수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그건 부정할 수는 없죠. 그렇지만 우리가 남들보다 한 시간 빨리 퇴근할 수 있는 것은 일반 직장보다 일단 출근도 빠르지만, 점심시간도 편안한 쉬는 시간이 아닌 ‘일을 하고 있는 시간’이라고 인정받고 있는 거죠. 아이들의 식사 시간도 우리는 지도하는 시간인 거니깐요.”

한지온은 의아한 듯 되물었다.

“하지만 요새는 급식지도도 학생 정서학대라고 해서 거의 지도할 수 있는 건 없잖아요.”

강아름은 흥분해서 맞장구쳤다.

“맞아요! 제가 학생일 때는 급식판 검사도 하고 남기는 음식 거의 없도록 교육받았는데, 지금은 오히려 아동학대에 들어가는 행동이 되고, 지도가 아닌 학대라고… 완전 앞뒤가 안 맞잖아요!”

“그렇다고 우리가 바른 식사 예절과 지도를 하지 않으면 안 되지요. 지도하지 않으면 방관. 방관도 학대가 되겠지요. 진짜 진퇴양난이긴 하죠.”

정수학의 말에 세 사람은 동시에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강아름은 한숨을 쉬었다.

“어쩌라는 건지. 정말 어렵네요.”

남도윤은 짧게 코웃음을 쳤다.

“어려울 게 있나요. 그냥 적절한 선에서 지도하는 거죠. 안될 것 같으면 안 하면 되는 거고.”

“선생님들의 교육자로서 가져야 할 열정까지 식게 만드는 현실이 안타깝네요.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열정을 다시 살리러 영종도 연수 가는 거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정수학은 다시 한 번 호탕하게 웃었지만, 그의 눈빛에는 씁쓸함이 스쳤다.

한지온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표정에는 반항기가 서려 있었다.

“아니요. 저는 너무 강제적인 것 같아서 싫어요. 딱히 할 일은 없지만 그래도 제 소중한 시간인데. 이런 게 갑질 아닌가 하기도 해요.”

정수학은 백미러로 한지온을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방학이라고 해도 우리는 교육청 소속의 공무원으로 해야 하는 것들이 있는 거예요. 제41조 연수는 우리 교사들의 역량 강화와 전문성을 위한 연수이기 때문에, 방학이 무조건 자신의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거랍니다. 근무의 연장선인 거죠.”

그의 말에 강아름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하지만… 저희가 평소에 연가도 제대로 못 쓰잖아요. 방학 때도 이런 강제 연수를 들으려면, 굳이 방학 때만 쓰라고 하는 연가는 무슨 의미가 있나요?"

남도윤도 거들었다.

"맞아요. 일반 회사원은 원하는 날 휴가 쓰고, 휴가비도 받는데… 우리는 학기 중에는 연가 쓰기도 하늘의 별 따기죠. 그나마 이번에 새로 생긴 장기 재직자 휴가도 있다고는 하지만, 현재 학기 중에 사용하려고 하니 학교가 어떻게 보결을 해야 하는지 더 혼란스럽기만 하다고 다들 꺼려 해요."

차 안은 마치 작은 토론회장 같았다. 이들의 열띤 드라이브 토론은 끝없이 이어졌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니 어느새 전기차는 목적지에 거의 다다라 있었다. 연수원 진입로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정수학은 능숙하게 핸들을 꺾으며 차를 멈췄다.

“자, 도착했습니다! 이제부터 진짜 연수의 시작이네요. 다들 방학이… 아니, 연수가 끝날 때까지 힘내 봅시다!”

그의 마지막 말이 씁쓸한 여운을 남긴 채, 전기차는 완전히 정지했다. 드넓은 연수원의 잔디밭에는 이미 수많은 차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교문에서의 어색한 만남과 드라이브 토론으로 점철된 영종도로의 여정은, 또 다른 시작을 예고하고 있었다.


S5. 연수 시작


정수학의 EV9은 윙, 하는 낮은 모터 소리를 내며 영종도 교육연수원 입구에 미끄러지듯 들어섰다. 길게 뻗은 아스팔트 도로 양옆으로는 잘 가꿔진 푸른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 건물은 단정했고, 얼핏 보면 고급스러운 연수원이나 호텔처럼 보이기도 했다. 정수학은 능숙하게 주차 공간을 찾아 차를 세웠다.

"자, 다들 내리시죠. 이제부터 빡센 연수가 시작될 겁니다, 하하하!"

그의 호탕한 웃음소리는 언제나처럼 가볍게 허공에 흩어졌지만, 차 안의 공기는 한없이 무거웠다. 강아름은 문을 열고 내리자마자 반사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인천대교를 건너며 ‘그래도 섬이니까, 여행 가는 기분이라도 내자’라고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연수원 건물 위로 펼쳐진 하늘은 그녀를 절망 속으로 끌어내리는 거대한 스크린 같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위로, 비행기 한 대가 낮게 날고 있었다. 착륙을 위해 서서히 고도를 낮추는 모습은 마치 그녀의 희망이 저물어 가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웅, 하는 비행기 엔진음은 이별을 고하는 슬픈 울림처럼 그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뒤이어 또 다른 비행기가 날아올랐다. 하얗게 뻗어 나가는 비행운은 마치 자유의 궤적 같았다. 그 비행운의 끝에 그녀의 로마, 파리, 유럽이 아른거렸다. 그녀의 손은 무심코 하늘을 향해 뻗어졌지만, 허공을 움켜쥘 뿐이었다.

'저 안에… 내가 있었어야 했는데…'

눈가는 어느새 촉촉해졌다. 겨우 참았던 눈물이 기어코 방울져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녀의 꿈, 그녀의 계획, 그녀의 작은 행복은 지금, 저 비행기에 실려 유럽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연수원 건물 입구를 향해 걸어가면서도 연신 하늘에 매달린 비행기들을 눈으로 쫓았다. 희미해지는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지는 비행기를 보며 그녀의 가슴은 미어지는 듯 아팠다.

남도윤은 주변의 번잡함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차에서 내렸다. 그의 눈은 주차장에 즐비한 다른 차량들을 스캔하며, 어느 정도의 교사들이 연수에 왔을지를 계산하는 듯했다. 그는 하늘에 떠다니는 비행기 따위는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이미 그의 머릿속은 파괴된 방학 계획표를 어떻게든 재건할지에 대한 시뮬레이션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망가진 일정표를 완벽하게 고치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최소한의 피해로 최적의 결과를 얻어낼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의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고, 눈빛은 깊은 불확실성과 어둠으로 가득했다. 비록 계획이 틀어졌지만, 이 연수를 통해 얻어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지, 어떤 인물들이 올 것인지, 그의 두뇌는 끊임없이 회전하고 있었다.

한지온은 아무렇지 않은 듯 무덤덤하게 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캐리어를 끌고 연수원 건물로 향하는 길에 핀 이름 모를 꽃들을 무심하게 응시했다. 꽃잎에 맺힌 아침 이슬이 햇빛에 반짝이는 모습이 마치 그녀의 눈물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건조하기만 했다.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읽히지 않는 메마른 눈동자였다. 그녀에게는 유럽을 향하는 비행기도, 빽빽하게 짜놓았던 계획도, 그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의 여름방학은 이미 텅 비어 있었고, 이 연수는 그 텅 빈 공간에 채워지는 또 하나의 의무일 뿐이었다.


비행기… 비행기는 또 얼마나 허무하게 사람들을 날라 버릴까.'


그녀의 입가에는 희미하고 쓸쓸한 웃음이 걸렸다. 그 웃음은 비행기가 영종도 상공을 오가는 것을 보고 어떤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조롱이자, 어쩌면 이 연수가 그녀의 텅 빈 삶에 아주 작은 파동이라도 일으켜 주기를 바라는 미약한 희망 같은 것이었다.

세 사람은 안내에 따라 연수원 로비로 들어섰다. 이미 수많은 새내기 교사들이 바글거리고 있었다. 어색함과 들뜸, 그리고 불확실함이 뒤섞인 젊은 얼굴들이었다. 이내 각자의 숙소 키를 배정받았다. 강아름은 3층 302호, 남도윤은 4층 405호, 한지온은 2층 201호. 숙소에 짐을 놓는 시간은 채 10분도 주어지지 않았다.

강아름은 낡았지만 깨끗하게 정돈된 숙소 방에 캐리어를 툭 던져 놓았다. 보라색 캐리어는 마치 제 주인 대신 유럽에 가야 할 운명이었다는 듯 서글프게 느껴졌다. 침대 커버의 하얀색과 벽지의 아이보리색, 커튼의 연한 하늘색은 마치 그녀의 꿈을 앗아간 연수원의 색깔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짐을 풀지도 않은 채, 그저 캐리어 위에 털썩 주저앉아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내 유럽… 내 유럽…'

어금니를 꽉 깨물었지만, 울컥거리는 감정은 막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방금 보았던 비행기와 파리의 에펠탑이 번갈아 나타났다.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며 그녀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남도윤은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캐리어를 열었다. 구겨지지 않게 깔끔하게 접어온 옷가지와 함께, 책 몇 권이 가장 먼저 그의 눈에 띄었다. 그는 연수 동안 틈틈이 볼 전공 서적을 책상 위에 정리해 두었다.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최소한의 움직임. 그는 숙소 창밖으로 보이는 비행기 따위에는 일절 관심도 두지 않았다. 오직 눈앞의 시간표, 이 강제된 시간을 어떻게 하면 자신의 계획 속에 최대한 욱여넣을 것인가 하는 생각만이 그의 머리를 지배했다. 그의 미간에는 다시금 깊은 주름이 패였다. 그는 자신의 침대 위에 반듯하게 앉아 곧장 노트북을 열었다.

한지온은 배정받은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짐을 든 채 그대로 현관에 섰다. 그녀의 방은 창문이 없이 복도 쪽으로 나 있는 작은 방이었다. 그마저도 꽉 막힌 벽이었다. 외부와 완벽하게 단절된 공간은 마치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다. 그녀는 작은 쇼핑백 하나를 침대 위에 던져 놓고는 털썩 주저앉았다. 어떤 짐도 풀지 않았다. 굳이 짐을 풀어 놓을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옷장 안에는 그녀의 텅 빈 미래처럼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방 한가운데 앉아 흐릿한 눈으로 하얀 벽을 응시했다. 벽에는 연수원의 오래된 흔적처럼 희미한 얼룩이 보였다. 그 얼룩은 마치 그녀의 삶처럼 모호하고 의미 없어 보였다. 그녀는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이 고요한 공간에서, 그녀의 내면은 또다시 한없이 침잠해 들어가는 듯했다.

짧은 숙소 배정 및 짐 정리 시간이 끝나고, 세 사람은 연수원 중앙 강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강당은 이미 수백 명의 새내기 교사들로 가득 차 있었다. 기대에 찬 눈빛, 불안한 눈빛, 강압에 끌려온 듯 지친 눈빛 등 다양한 표정들이 강당을 채웠다. 맨 앞자리에 빈자리를 꿰찬 강아름은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남도윤은 팔짱을 낀 채 연수 브로슈어를 꼼꼼히 살폈고, 한지온은 뒷좌석 한쪽에 기대어 거의 정신을 놓은 듯 보였다.

드디어 연수 개회식이 시작되었다. 무대 위로 김연희 연구사가 올라왔다. 그녀는 준비된 PPT 자료를 띄우고 밝고 활기찬 목소리로 연수 일정을 브리핑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새내기 교사 여러분! 힘찬 박수와 함께 연수를 시작하겠습니다! 이번 연수는…”

그녀의 목소리는 강당을 가득 메웠지만, 세 새내기 교사에게는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소음처럼 들릴 뿐이었다. 특히 강아름에게는 모든 말이 웅얼거리는 듯했다. 인천대교를 건널 때쯤에는 잠시 여행 온 듯 설레는 기분도 들었지만, 김연희 연구사가 띄운 연수 일정표를 보는 순간, 그 설렘은 차가운 절망으로 바뀌었다.

PPT 화면에는 A4 용지 4장 분량의 빽빽한 연수 일정표가 띄워졌다.

"아침 8시 반부터 오후 5시까지 강의라니… 이건 노예 계약이잖아…!"

강아름은 테이블에 엎드려 울상을 지었다. 그녀의 입에서는 작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뭘 하라는 거야… 내 유럽… 내 에펠탑… 내 로마!"

거의 절규에 가까운 중얼거림이었다.

남도윤의 눈빛은 더욱더 어두워졌다. 그는 PPT 화면을 응시하며 쉴 새 없이 머릿속으로 계산하고 있었다. 연수 시간 중간에 짬을 내어 논문 구상을 하거나, 필요한 자료를 찾아볼 틈은커녕 화장실 갈 시간도 부족해 보였다. 그의 완벽한 계획은 연수라는 거대한 파도에 완전히 휩쓸려 난파되는 중이었다.

한지온은 그저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더니, 슬며시 입꼬리를 비틀며 쓸쓸하게 웃었다.

"뭐, 이게 인생이지…."

그녀의 목소리에는 자조 섞인 체념이 짙게 깔려 있었다. 삶이 늘 이런 식이었다. 그 어떤 기대도 허락하지 않고, 그저 흐르는 대로 흘러가라고 명령하는 듯한 삶의 진리를 다시금 깨달은 듯한 표정이었다.

김연희 연구사의 브리핑은 쉼 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들의 귀에는 더 이상 어떤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연수원의 첫날은 그렇게 무미건조하게 시작되고 있었다.


S6. 발표자들

영종도 교육연수원의 첫날은 연수생들의 잠자는 뇌세포를 강제로 깨우려는 듯 빡빡하게 짜여 있었다. 김연희 연구사의 활기찬 목소리는 아침부터 강당에 쩌렁쩌렁 울렸고, '위기학생 관리 및 지도 방안'이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는 강아름의 늘어진 어깨를 더욱 짓눌렀다. 낯선 사람들과 조를 이뤄 밤샘 토론까지 거쳐 겨우 만들어낸 조별 발표 순서. 강아름은 자신의 조의 발표 순서가 다가올수록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자, 다음은 3조, '다 함께 행복한 학교 만들기' 조입니다!"

김연희 연구사의 호명에 강아름은 심장이 발바닥까지 곤두박질치는 것 같았다. 어젯밤 남도윤의 꼼꼼한 지도로 완성된 PPT 자료를 USB에 담아왔지만, 막상 단상에 서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녀는 마른 목을 한번 축이고, 심호흡을 했다. '할 수 있어, 아름아. 넌 잘 할 수 있어.'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목소리는 자꾸만 기어들어갔다.

"네… 안녕하십니까. 저희 조는… 위기학생 관리에 대해… 발표하겠습니다."

손가락은 경련하듯 떨렸다. 그녀는 슬라이드를 넘기기 위해 마우스의 클릭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화면이 이상했다. 첫 번째 슬라이드 '위기학생 관리의 중요성'은 온데간데없고, 대신 새파란 바탕에 알 수 없는 붉은색 선들이 마치 낙서처럼 이리저리 그어져 있었다. 화면은 혼란스러웠다. 두 번째, 세 번째 클릭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화면은 점점 더 뒤죽박죽이 되어갔다. 프로그램이 꼬였는지, 화면은 엉뚱한 이미지와 텍스트를 무작위로 띄워댔다.

강아름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손바닥은 축축하게 젖어들었고, 마우스는 손안에서 미끄러져 버릴 것만 같았다.

"죄, 죄송합니다… 잠시만… 제가 뭔가… 죄송합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수십 명의 시선이 마치 칼날처럼 그녀의 심장을 꿰뚫는 것 같았다. 연수 첫날부터 이런 굴욕이라니!

그때였다. 묵묵히 제자리에 앉아 팔짱을 끼고 있던 남도윤이 기다렸다는 듯이 성큼성큼 단상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얼굴에는 어떤 동요도 없었다. 무표정하고 시크한 얼굴. 그는 아무 말 없이 강아름의 손에서 마우스를 가져가 컴퓨터에 연결된 HDMI 선을 재빨리 뽑았다가 다시 꽂았다. 그리고 차분하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검정 화면 위로 하얀 글자들이 재빠르게 깜빡였다. 그는 이내 'ESC' 키를 눌렀고, 화면은 다시 깔끔한 바탕화면으로 돌아왔다. 이 모든 과정이 불과 10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남도윤은 아무 말 없이 강아름에게 마우스를 다시 건네고 짧게 고갯짓을 했다. '시작해.' 강아름은 그의 무언의 지시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시 슬라이드를 클릭했다. 거짓말처럼 화면에는 '위기학생 관리의 중요성'이라는 제목의 깔끔한 첫 번째 슬라이드가 나타났다.

남도윤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무덤덤했지만, 그 무덤덤함 속에 감춰진 배려와 능숙함은 강당을 가득 채운 연수생들 사이에 짧은 탄성과 함께 작게 박수 소리를 불러왔다. 남도윤은 그 박수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팔짱을 낀 채 화면을 응시했다.

강아름은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었던 그녀의 마음을 단숨에 구원해 준 그의 행동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마움이 밀려왔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마이크를 쥐고, 남도윤이 앉아 있는 뒷좌석을 바라보았다.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짧지만 강렬한 순간이었다. 남도윤의 눈빛은 마치 '괜찮다, 별일 아니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순간,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감돌았다. 강당의 소음도, 발표의 긴장감도 모두 사라진 듯했다. 오직 두 사람만의 시간이 흐르는 듯한, 짧지만 미묘한 정적이 흘렀다. 강아름의 얼굴에는 고마움과 함께 다른 감정의 빛깔이 스쳐 지나갔다.

그 모든 과정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한지온은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남도윤과 강아름을 번갈아 봤다. 강아름의 얼굴에 피어나는 복잡미묘한 홍조, 그리고 남도윤의 흔들림 없는 눈빛. 그들 사이의 짧은 교감이 그녀의 시선에 걸렸다. 묘한 이질감과 함께, 혼자만 이방인처럼 소외된 듯한 기분이 그녀를 덮쳤다. 이 복잡한 감정은 마치 얼음처럼 차갑게 그녀의 심장 가장자리를 훑고 지나갔다. 그녀의 입술에는 작은 조소만이 맴돌았다. 왜, 이런 불편한 상황이 계속될까. 연수는 그녀에게 끝없이 불편함만을 선사하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S7. 의심의 삼각형


'위기학생 관리 및 지도 방안' 발표가 끝나고 찾아온 쉬는 시간. 강당의 공기는 그제야 한결 가벼워진 듯했다. 아까의 해프닝 때문인지, 쉬는 시간의 북적임 속에서도 강아름은 사람들 틈에 쉽사리 섞이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아직도 후끈거렸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진행될 줄 알았는데, 첫 번째 발표부터 그 모양이었으니… 하지만 이내 그녀는 마음을 다잡았다. 남도윤 덕분이었다. 위기에 빠진 그녀를 구원해 준 백마 탄 왕자님 같았다고 해야 할까.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 텐데, 막상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남도윤은 강당 복도 창가에 기대어 서 있었다. 발표는 무난하게 끝났고, 자신의 역할도 만족스러웠다. 다만, 그녀의 얼굴이 지나치게 새빨갛게 달아올랐던 것이 조금 거슬렸다. 그 정도로 당황하다니. 그는 손목시계를 힐끗 보며 다음 강의까지 남은 시간을 가늠하고 있었다. 그 순간, 그의 시선은 복도 저편에 닿았다.

정수학 부장이었다. 그는 여전히 해맑은 얼굴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그 상대가, 다름 아닌 한지온이었다. 그 조용하던 그녀가 정수학 부장 앞에서는 드물게 고개를 끄덕이고, 희미하지만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남도윤의 콧날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어쩐지 두 사람의 대화는 평범한 상사와 직원의 그것과는 달라 보였다. 너무나 나른하고 건조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그녀의 얼굴에 미묘한 파장이 일렁이고 있었다.

남도윤의 이성은 냉철했다. 그런데 저 두 사람, 원래부터 친했나? 이 연수원에서 사적인 이야기를 나눌 만큼 친밀한 관계였나? 그의 머릿속에 질문들이 스치듯 지나갔다. 정수학 부장은 자신을 '형님'이라고 부르라 했을 때 질색하던 그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을 텐데, 저 한지온이라는 여교사에게는 한없이 다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괜히 신경이 쓰였다. 뭔가 '정수학식 유대감' 같은 것이 형성되어 있는 건가? 아까 회식 자리에서 했던 행동과 말투까지 곱씹으며, 그는 은근히 예민하게 그들의 대화를 훔쳐듣기 위해 몸을 조금 더 기울였다.

바로 그때, 강아름의 눈동자가 남도윤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기 위해 그를 찾아 나섰던 참이었다. 창가에 기대선 그의 단단한 어깨가 보였다. 어깨너머로 그의 시선이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얼굴은 평소처럼 무표정했지만, 어떤 미묘한 감정선이 그의 표정을 휘감고 있는 듯 보였다. 강아름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남도윤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리고 그 시선이 닿은 곳에는, 한지온이 서 있었다.

한지온은 정수학 부장과 함께 서 있었다. 그 둘 사이에 강아름의 시야는 가로막혀 있었지만, 강아름의 눈에는 오직 남도윤의 시선이 한지온에게 '유난히' 머물러 있다는 사실만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의 눈빛, 평소라면 얼음장 같았을 그 시선이 지금 한지온에게는 마치 부드러운 빛을 발하는 듯 그녀의 착각 속에 들어왔다. 그건 분명 남도윤의 평소 모습과는 달랐다. 무언가 특별한 시선, 유심히, 그리고 오랫동안 바라보는 시선.

강아름의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설마… 남도윤 선생님이… 한지온 선생님을… 좋아하나?'

어젯밤 조별 활동을 함께하며 나름의 유대감을 쌓고, 오늘 아침 발표 해프닝으로 인해 그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던 강아름의 마음속에는 순식간에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였다. 고마움, 당황스러움, 그리고 묘한 질투심까지. 어색하고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조용히 있었던 한지온. 그녀는 스스로를 감싸고 있던 보호막 같은 것들이 있었다. 그 보호막에 남도윤은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방금 남도윤이 자신을 구원해 준 '영웅'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그 '영웅'이 다른 이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 아파왔다.

강아름은 남도윤을 보았다. 그의 시선은 한지온에게 꽂혀 있었다. 한지온은 정수학과 무표정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모든 퍼즐 조각이 '딱' 하고 맞춰지는 듯했다. 남도윤이 발표 때 그렇게 재빨리 나선 것도, 한지온을 곤경에서 구해준 것이 아니라, 그저 '조원'으로서, 혹은 한지온을 '돕기 위해' 나섰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 모든 깔끔한 상황 해결은, 한지온을 향한 남도윤의 남모를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 그녀의 상상은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번져나갔다. 그의 냉철함 뒤에 숨겨진 의외의 다정함, 그리고 그것이 한지온을 향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이들의 시선은 그렇게 서로 엇갈렸다. 남도윤은 정수학-한지온의 관계를 의심의 눈초리로 훑고 있었고, 강아름은 남도윤-한지온의 관계를 질투 섞인 오해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지온은 정수학-강아름의 관계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오해의 한가운데, 정수학은 자신에게 향하는 미묘한 시선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여전히 행복한 얼굴로 한지온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연수원의 복도 한복판에, 엉뚱하게 꼬인 세 사람의 시선이 무형의 삼각형을 그리는 순간이었다.

오해의 삼각형은 어느 곳으로도 쏠리지 않고 무게 중심을 잘 잡고 있었다.


S8. 올해의 스승 그리고 친구


영종도 교육연수원 대강당은 연수 첫날의 어수선함을 넘어, 이틀째를 맞이하며 묘한 숙연함이 감돌기 시작했다. 오전 내내 이어진 이론 강의는 새내기 교사들의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지만, 오후 강연의 주인공인 '2026 올해의 교사 대통령상' 수상자, 김동준 강사에 대한 기대감은 피곤함을 잊게 할 만큼 컸다. 사람들은 저마다 그의 강연을 기다리며 웅성거렸다. 강단에 선 그의 뒷배경으로는 '교사는 아이들의 등불'이라는 강연 주제가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김동준 강사는 무대에 오르자마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잘생기지도, 그렇다고 대단히 카리스마가 넘치지도 않는, 그저 평범하고 소박한 인상이었다. 하지만 그가 마이크를 잡고 '안녕하십니까, 김동준입니다'라고 인사하는 순간, 그의 눈빛에서 터져 나오는 형언할 수 없는 따뜻한 빛이 대강당을 가득 채웠다. 연수생들의 시선은 일제히 그에게로 향했다.

"저는 오늘 여러분께 거창한 교육 이론이나 최신 교수법에 대해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천천히 숨을 고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그저 저 김동준이라는 한 인간이, 어떻게 교사가 되었고, 왜 교사라는 이름을 놓지 않고 살고 있는지… 제 부족한 삶의 조각들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묘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힘이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 이야기를 시작했다. 가난했지만, 그래도 하루하루를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작은 공부방 덕분이었다고 했다.

"저는 참 운이 좋은 아이였습니다. 동네 어귀에 수녀님이 운영하는 작은 공부방이 있었죠. 갈 곳 없고 배고픈 아이들이 모여 숙제를 하고, 낡은 책을 읽던 곳이었습니다. 처음엔 그저 따뜻한 밥을 주고, 추운 날 발 시리지 않게 해주는 그곳이 좋았습니다. 공부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그 시절, 제겐 그곳이 세상의 전부나 다름없었죠."

강아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유복한 성장 환경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지만, 그의 진솔함에 점차 빠져들었다.

"그 공부방에서 저는 참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중에서도… 저에게 '공부의 재미'를 알려준 한 형님이 있었습니다. 당시 서울대에 다니던 대학생 형님이셨는데, 매주 토요일마다 오셔서 저희에게 수학을 가르쳐주셨어요. 제가 풀지 못하는 문제를 종이 한 가득 그려가며 설명해주시던 그 형님의 뒷모습은… 아직도 제 마음에 선명합니다."

김동준은 잠시 말을 멈추고 먼 과거를 회상하는 듯 아련한 미소를 지었다.

"그 형님을 보면서, 저는 막연히 생각했습니다. '나도 언젠가 저 형님처럼,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게 제 막연한 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의 가장 가까운 길이 교사였습니다."

강연장의 공기는 점차 숙연해졌다. 겉으로 드러나는 그의 화려한 타이틀이 아니라, 그 속을 채우는 진솔한 이야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저는 감사하게도 교대에 합격했고, 오늘 이렇게 여러분 앞에 서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교사는… 참으로 고귀하고 아름다운 직업입니다. 무엇보다 '배워서 남주는 유일한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자부심이 묻어났다.

"우리가 학창 시절에 배운 지식, 대학에서 얻은 깨달음, 그리고 교단에서 부딪히며 얻은 수많은 경험들… 이 모든 것을 아이들에게 아낌없이 주고, 그 아이들이 그것을 발판 삼아 더 높이 날아오르는 것을 지켜보는 기쁨은… 세상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습니다."

강아름의 눈시울이 점차 뜨거워졌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유럽 여행, 화려한 이탈리아의 건축물, 파리의 낭만이 가득했지만, 지금 김동준 강사가 말하는 '아이들'이라는 단어는 그 어떤 에펠탑의 불빛보다 강렬하게 그녀의 가슴을 흔들었다. '교사로서 나도 언젠가 저렇게 아이들에게 기억될 수 있을까? 나도 저런 보람을 느낄 수 있을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눈가를 훔쳤다.

남도윤은 팔짱을 풀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의 냉철했던 눈빛은 점차 혼란스러운 빛으로 물들었다. 그는 김동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서 자신을 되돌아봤다. 효율성, 성과, 논문, 커리어… 그 모든 것이 그의 교직 생활을 지배하는 기준이었다. 그는 교사로서의 전문성을 키우는 것을 맹목적으로 추구했지만, 그 궁극적인 목적이 '아이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이 순간 뼈저리게 깨달았다. '내가 가는 길이 맞는 걸까? 내가 아이들에게 등불이 될 수 있을까, 아니, 등불이 되려고는 했던가?' 그의 마음속에서는 걷잡을 수 없는 자문들이 솟아났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번민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한지온은 흐릿한 눈동자로 김동준 강사를 응시했다. 그녀의 내면은 여전히 고요했지만, 그 고요함 속에 아주 미세한 파문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나는 부족한데…', '나는 무엇을 주지…', '나는 과연 아이들에게 무엇으로 기억될까…' 그녀는 늘 스스로의 부족함에 매몰되어 있었고, 어떤 기대나 열망도 품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김동준 강사의 이야기는 그녀에게 희미한 등불을 보여주는 듯했다. 어딘가 자신도 모르게 감춰두었던, 아이들에 대한 작은 애정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물론, 교사라는 직업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김동준은 잠시 숨을 고르며 현실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요즘은 아이들 지도도 어렵고, 학부모님과의 소통도 쉽지 않습니다. 월급도 박봉이라고들 합니다. 새벽부터 나와 아이들 맞을 준비를 하고, 퇴근 시간은 늘 뒤로 밀리기 일쑤입니다. 몸은 지치고, 마음은 상처받는 날도 많을 겁니다."

그의 말에 여기저기서 공감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강아름의 미간도 다시 찌푸려졌다.

"하지만 기억해주십시오. 우리가 왜 이 자리에 서 있는지. 우리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눈빛은… 그 어떤 보상보다 값진 가치가 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주는 기적 같은 순간들이 우리의 교직 생활을 지탱하게 할 겁니다. 배워서 남주는 직업, 이 직업의 자부심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아이들의 등불입니다. 밝고 따뜻한 등불이 되어주십시오."

강연은 끝이 났다. 대강당에는 뜨거운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세 명의 새내기 교사는 박수조차 잊은 채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강아름은 강한 감동에 휩싸여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남도윤은 침묵한 채 깊은 사색에 빠졌고, 한지온은 이제는 조금 더 선명해진 눈빛으로 강단을 응시했다.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 수많은 새내기 교사들이 김동준 강사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각자의 고민과 열정, 그리고 의문들이 교차했다.

그때, 강아름이 떨리는 손을 들었다.

"강사님…!"

마이크가 그녀에게로 향했다.

"강사님께서는… 선생님의 말씀처럼 교사가 정말 아름다운 직업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데… 그럼에도 혹시, 힘들 때… 도망가고 싶을 때는 없으셨나요? 제 말은… 예를 들어, 다 놓아버리고 그냥… 아무도 없는 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 해본 적 있으신가요?"

그녀의 질문에는 개인적인 아픔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모두가 숨죽였다. 김동준 강사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네, 아름 선생님. 솔직히 말씀드리면… 수없이 많았습니다. 저라고 왜 힘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교직 생활 10년이 넘으면서도, 때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다는 유혹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밤새도록 아이들의 문제를 끌어안고 고민하고, 다음 날 아침이면 온몸이 부서질 듯 힘들었습니다. 저도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럴 때마다 저는 제 어릴 적 공부방의 수녀님과 저를 가르쳐주셨던 그 형님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를 믿고 따라오는 아이들의 눈을 봅니다. 제가 넘어지면, 이 아이들이 길을 잃을까 봐… 그 생각 하나로 다시 일어섰습니다. 아이들이 저의 등불이었죠."

강아름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녀는 김동준 강사가 자신에게 던지는 말이 마치 따뜻한 위로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자신이 가진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느꼈던 고통이, 그저 보잘것없는 도피가 아니었음을 확인받는 기분이었다.

뒤이어 남도윤이 손을 들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날카로운 분석 대신, 깊은 고민이 배어 있었다.

"강사님… 저는… 교사의 전문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 자신을 갈고닦는 일에만 매진했습니다. 논문을 쓰고, 끊임없이 연구하고… 하지만 강사님의 말씀을 듣다 보니, 제가 놓치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과연 이 모든 것이 아이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일까요? 강사님께서 생각하시는 '진정한 교사의 전문성'은 무엇입니까?"

김동준은 남도윤의 질문을 듣고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도윤 선생님, 좋습니다. '교사의 전문성'…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교사의 전문성은 단순히 많은 지식을 가르치는 것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물론 지식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을 이해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주는 것. 아이들이 겪는 어려움을 함께 고민하고, 그들이 스스로 답을 찾아나갈 수 있도록 옆에서 지지해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것. 그게 제가 생각하는 가장 크고, 가장 본질적인 교사의 전문성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아이들의 마음에 닿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지식은 그 다음입니다. 아이들이 우리를 믿고, 사랑받는다고 느낄 때… 그때 비로소 우리의 전문성은 진정한 빛을 발합니다."

남도윤은 김동준 강사의 답변에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반성과 깨달음이 교차했다. 그의 야망과 효율성 중심의 사고방식에 강렬한 파문이 일었다. 그동안 그는 오직 자신만의 등반에 집중하고 있었음을, 아이들의 눈높이가 아닌, 자신만의 높은 기준만을 바라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지식은 그 다음이다.' 이 말이 그의 뇌리에 박혔다.

마지막으로 한지온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작고 낮았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미약하나마 생기가 느껴졌다.

"강사님… 저는… 제가 가진 것이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주어야 할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주어진 시간만 겨우 보내고 있는 것 같을 때가 많습니다. 저처럼… 가진 것이 없고, 메마른 사람도… 과연 아이들에게 등불이 될 수 있을까요? 제가 과연… 누군가의 기억 속에 좋은 선생님으로 남을 수 있을까요…?"

그녀의 질문은 절망에 가까웠다. 김동준 강사는 그녀의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 시선에는 따뜻한 이해와 깊은 공감이 담겨 있었다.

"지온 선생님." 그는 부드럽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이들에게 등불이 되기 위해 우리가 모든 것을 갖춰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또한 부족하고, 때로는 힘들어하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더 큰 위로가 될 때도 있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강연장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여러분은… 연수 첫날, 얼마나 힘이 들었습니까? 지치고, 실망하고, 어쩌면 저처럼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도 했을 겁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마음 그대로를 아이들에게 보여주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배우고, 끊임없이 아이들을 이해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비록 당장은 서툴고 부족하더라도, 그 과정 자체를 아이들이 보게 된다면… 그게 바로 산 교육입니다. 우리는 완벽한 사람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교사가 되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지온 선생님, 진심으로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면 충분합니다. 그 마음이 있다면… 당신은 어떤 모습이든 아이들에게 충분히 좋은 선생님으로, 그리고 따뜻한 기억으로 남을 수 있을 겁니다. 저도 한때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저를 믿어준 한 형님이 있었듯, 여러분도 분명 누군가에게는 그런 등불이 될 겁니다. 믿으십시오. 자신을 믿으십시오."

한지온은 그의 마지막 말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의 건조했던 눈가에도 마침내 물기가 차올랐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심장 속에서 아주 작지만 따뜻한 불꽃 하나가 피어오르는 듯했다. 그녀의 텅 빈 마음에 아주 작은 희망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김동준 강사는 긴 강연의 끝을 알리듯 천천히 강단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리고 마이크를 고쳐 잡았다. 그의 얼굴에는 뿌듯함과 함께 진한 그리움 같은 것이 스쳤다.

"마지막으로… 저는 교사로서의 제 삶을 돌아볼 때, 가장 큰 힘이 되었던 존재가 무엇이었는지 늘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제 곁을 지켜준 동료 교사들입니다. 힘들 때, 정말 도망치고 싶을 때, 여러분 곁에 있는 동료 교사야말로 가장 큰 힘이 되어 줄 겁니다."

그는 짧게 미소 지었다.

"저에게는 좋은 동기이자 동생, 그리고 25년을 함께한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는 재수를 해서 입학, 저는 삼수를 해서 입학하여 제가 한 살 더 많은 형이지만, 서로를 잘 이해하고 오히려 가족보다 더 가족같은 동기입니다. 서로에게 굳이 무언가 하지 않아도 얼굴만 보아도 심적으로 서로 많은 위안이 되는 행복감을 주는 그런 동기, 그리고 동료교사입니다. 교단에서 수많은 시간을 보내며, 때로는 치열하게 토론하고, 때로는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어떤 도움이든 조건 없이 서로를 도왔던, 그런 진정한 인연이었습니다. 여러분 곁에도, 앞으로 여러분의 교직 생활을 함께할 여정 속에 이런 소중한 동기가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없지만, 늘 제 곁에서 변함없이 함께해 준 그 친구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고맙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마이크에 대고 작지만 선명한 목소리로 마지막 한마디를 덧붙였다.

"수학아!"

대강당에는 짧은 정적이 흘렀다. 수백 명의 새내기 교사들이 일제히 술렁거렸다. '수학?' 그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그 수학은 아니겠지? 그들 각자의 머릿속에는 서로 다른 '수학'이라는 이름의 인물이 떠올랐다. 특히 강아름, 남도윤, 한지온 세 사람의 얼굴에는 당혹감과 함께 묘한 궁금증이 스쳐 지나갔다. 김동준 강사는 그들의 반응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맑게 웃으며 무대에서 내려왔다.

강연은 마침내 끝이 났다. 강아름은 터져 나오는 울음을 억누르며 마른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남도윤은 김동준 강사를 뚫어지라 응시하며 깊은 생각에 잠겼고, 한지온은 더 이상 공허하지 않은 눈빛으로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대강당의 조명은 여전히 밝았지만, 세 사람의 마음속에는 이제 새로운 등불이 밝혀지는 듯했다. 연수 첫날의 절망과 오해를 넘어, 이들은 비로소 교사라는 이름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가는 첫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마음속에는 '수학'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물음표 하나가 아련하게 자리 잡았다. 설마 내가 아는 그 수학은 아니겠지?


S9.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영종도 교육연수원 식당은 점심시간을 맞아 이른 아침 시장처럼 북적였다. 쨍한 식판과 수저 부딪히는 소리,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뒤섞여 기묘한 활기로 가득했다. 연수 이틀째, 김동준 강사의 감동적인 강연으로 충전된 세 명의 새내기 교사는 함께 식판을 들고 줄을 서 있었다. 강아름의 얼굴에는 여전히 눈물의 흔적과 붉게 달아오른 볼이 선명했다. 남도윤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식판 위의 반찬들을 분석하듯 응시하고 있었다. 한지온은 어제보다 아주 미약하게, 눈빛에 온기가 스며들어 있는 듯했다.

"강사님, 정말…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강아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감동이 묻어 있었다. 남도윤도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김동준을 향해 작은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에이, 별말씀을요. 젊은 선생님들과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어서 저도 좋았습니다. 자, 마침 자리가 있네요. 이쪽으로 앉으시죠."

김동준 강사가 식당 한쪽 구석에 비어 있는 원형 테이블을 가리켰다. 연수생들이 한두 명씩 식판을 들고 흩어지는 틈을 타, 세 사람은 김동준 강사와 함께 식사를 할 기회를 잡았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흰쌀밥과 오늘의 국, 그리고 정갈한 반찬들로 식판이 채워졌다. 김동준 강사는 싱긋 웃으며 수저를 들었다. 세 사람은 이제 막 마음속 깊이 새겨진 감동의 여운을 곱씹으며, 김동준 강사와 오붓하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어이, 나도 좀 껴주라!"

아무도 예상치 못한 불청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식판을 든 한 그림자가 번개처럼 그들 앞으로 다가와 식판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더니 가장 자연스럽다는 듯, 비어있는 한지온 옆자리에 태연하게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그 누구도 초대하지 않은 불청객은 다름 아닌 정수학이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호탕한 웃음으로 가득했고, 그들의 동요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 보였다.

강아름과 남도윤, 그리고 한지온은 눈을 비볐다. 자신들이 있는 테이블로 굳이 찾아와 불쑥 끼어든 정수학의 등장에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 수학아!"

김동준 강사가 정수학을 알아보더니, 반색하며 환하게 웃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친근함과 반가움이 뚝뚝 묻어났다.

"수학? 강사님과… 정수학 부장님이요…?"

강아름은 충격받은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강연 말미에 김동준 강사가 언급했던 '수학'이라는 이름의 동기가 설마 이 '수학'일 줄이야! 그리고 김동준 강사님이 정수학 부장님을 마치 친구처럼 이름을 막 부르다니! 강아름의 머릿속에서는 온갖 추측과 함께 의문부호가 맴돌았다. 김동준은 삼수, 정수학은 재수생으로 같은 과 동기였지만, 나이는 김동준이 한 살 더 많았다. 그 사실에 세 사람은 다시 한번 놀람에 휩싸였다. 이렇게나 다른 두 사람이 서로를 '동기'라 부르며 절친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정수학은 아무렇지 않게 숟가락을 들더니, 김동준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장난기와 반가움이 뒤섞여 있었다.

"동준이 형 이 녀석, 내가 형 보러 온 거 아니겠나! 잘 지내고 있었어? 벌써 이렇게 뜨거운 강연으로 새내기들 홀리고 있냐?"

그의 말에 김동준은 껄껄 웃었다.

"영종도 과학교육원 강의 때문에 바쁘다고 들었는데? 너야말로 새내기들한테 운전봉사까지 해주면서 인상 쓰게 만들고 오신 거 아니냐? 하하하!"

그들의 대화는 너무나 자연스러웠고, 너무나도 친밀했다. 서로의 사정을 꿰뚫어 보고, 스스럼없이 농담을 주고받는 모습에서 스무 해가 넘는 시간 동안 쌓아온 깊은 유대감이 묻어났다.

"근데 형, 요즘은 형수님은 어떠셔? 애들은 잘 지내고?"

정수학이 식판에 반찬을 덜어주며 물었다. 김동준은 뿌듯한 듯 웃었다.

"그럼! 애들이야 뭐, 방학인데 집에 있으면 나만 피곤하니까 여기저기 캠프 보냈지, 하하. 나야 뭐 맨날 밖에 나가니까 집이 편하고. 너희 어머님은 괜찮으셔? 저번에 편찮으시다는 소식 듣고 걱정했는데."

김동준의 물음에 정수학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유, 잘 지내시지. 우리 어머님이야 오늘 내일 그러지만 괜찮으셔. 참, 누나가 얼마 전에 연락 왔었어. 조카 대학 선물 고맙다고 꼭 전해달래. 네 덕분에 큰소리쳤다고."

김동준은 손사래를 쳤다.

"별말씀을! 네 조카는 내 조카기도 하지! 당연히 해야지! 그런데 너, 어쩐지 얼굴이 좀 피곤해 보인다? 강의 계속 뛰고 논문 쓴다고 날밤 깐 거 아니야?"

김동준의 꿰뚫어 보는 듯한 물음에 정수학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하, 형이나 나나 다를 게 없지, 뭘. 어제도 밤늦게까지 자료 준비하느라… 잠을 좀 설쳤네. 우리야 뭐, 이게 일상이니까."

"하긴, 우리 인생이 다 그렇지 뭐."

그들의 대화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서로의 사정을 꿰뚫어 보고, 스스럼없이 농담을 주고받는 모습에서 스무 해가 넘는 시간 동안 쌓아온 깊은 유대감이 묻어났다. 나이는 김동준이 형이었지만, 정수학은 재수, 학번으로는 동기였다. 그들이 단순한 동기가 아닌, 정말 '가장 친한 동기'라는 사실에 세 사람은 다시 한번 충격에 휩싸였다. 너무나도 극과 극인 두 사람의 모습에서 괴리감이 느껴졌다.

'아니, 어떻게 저런 두 사람이 절친일 수 있지? 눈앞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건가?'

남도윤의 눈빛이 흔들렸다. 김동준 강사의 강연으로 겨우 중심을 잡았던 그의 내면에, 정수학이라는 또 다른 파동이 일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신경이 곤두서는 것이 있었다. 정수학이 굳이 비어있는 다른 많은 자리들을 놔두고, 바로 한지온 옆자리에 앉았다는 사실이었다. 남도윤은 식판 위 김치를 젓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그의 미간에는 다시금 깊은 주름이 패였다. 괜히 옆자리에 앉은 한지온이 정수학에게 불편함을 느끼지는 않을까, 묘한 신경전이 그의 안에서 벌어졌다.

강아름은 남도윤의 그런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식판을 든 채 고개를 살짝 기울여 남도윤을 훔쳐봤다. '역시 남도윤 선생님… 한지온 선생님 옆에 정수학 부장님 앉으니까, 괜히 신경 쓰이는 거야?'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또다시 엉뚱한 오해의 상상력이 꽃을 피웠다. '남도윤 선생님이 한지온 선생님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노골적으로 티 낼 리가 없어!' 식탁 위의 공기는 훈훈한 듯하면서도, 묘하게 미묘하고 긴장된 기류가 흘렀다.

정수학은 그 모든 미묘한 기류를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그는 밥을 우물거리면서도 연신 김동준과 대화를 이어갔다. 학창 시절의 에피소드, 교직 생활의 애환, 그리고 은퇴 후의 꿈까지. 그들의 대화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한지온은 묵묵히 식사를 하면서도, 김동준 강사와 정수학의 대화를 놓치지 않으려 귀 기울였다. 그녀의 표정은 평소처럼 무덤덤했지만, 그 속에서는 어딘가 새로운 감정들이 꿈틀거리는 듯했다.

세 새내기 교사들에게는 그 점심시간이 단순한 식사 시간을 넘어, 복잡한 감정과 예상치 못한 인간관계의 퍼즐이 뒤섞이는 순간이었다.


S10. 새출발의 밤


영종도 교육연수원 기숙사 건물은 밤이 되자 낮보다 더욱 고요했다. 모든 연수생들이 각자의 방으로 돌아간 시간, 복도에는 희미한 간접등만이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대강당의 감동적인 강연이 남긴 여운은 깊었지만, 각자의 마음속에는 그보다 더 복잡한 생각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강아름은 컵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허브차를 담아 쉼터 소파에 앉았다. 낮에는 김동준 강사님의 강연에 펑펑 울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찝찝함이 남아 있었다. 남도윤과 한지온 사이의 미묘한 기류, 그리고 자신이 느낀 묘한 질투심. '남도윤 선생님이 한지온 선생님을 좋아한다면… 나는…?' 그런 상념에 그녀는 마음이 푹 가라앉았다. 애써 그 생각을 떨쳐내려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바로 그 옆 테이블에는 한지온이 앉아 있었다. 그녀 역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낮 동안 김동준 강사의 강연으로 메말랐던 마음 한켠에 작은 생기가 돌았지만, 그녀의 뇌는 여전히 복잡했다. 남도윤과 강아름의 미묘한 신경전이 그녀의 눈에 자꾸만 들어왔다. 조별 발표 해프닝에서 남도윤이 강아름을 돕는 모습, 그들 사이의 짧고도 깊었던 시선 교환… '나는 늘 혼자였는데… 저 두 사람은 왠지 서로에게 닿아 있는 것 같아.' 그녀의 마음에 알 수 없는 예민함과 소외감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차마 그 속내를 입 밖에 낼 수 없는 묘한 긴장감이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평소라면 쉼터에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서로에게서 위안을 찾으려는 듯 듬성듬성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때였다. 쉼터 문이 스르륵 열리더니 남도윤이 들어섰다. 그는 밤늦게까지 노트북으로 다음 날 강의 자료를 검토하다가, 답답한 마음에 바람이라도 쐴 겸 나온 참이었다. 강아름과 한지온을 발견하고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들의 얼굴에는 피곤함과 함께 어딘가 모를 수심이 깃들어 있었다.

"아… 두 분 다 안 주무시고 계셨네요."

남도윤이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며 빈 테이블 쪽으로 다가섰다. 그는 굳이 강아름과 한지온이 앉아 있는 소파 테이블로 오지 않고, 살짝 떨어진 다른 테이블에 앉았다. 그의 시선은 자신도 모르게 한지온에게로 향했다. 그는 낮에 본 한지온과 정수학 부장의 다정한 모습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과연 그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일까? 그저 자신의 오해일 뿐일까?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밤이 되니 좀 쌀쌀하네요." 강아름이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어색함이 세 사람을 휘감았다. 남도윤은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한지온에게 물었다. 그의 질문은 겉으로는 무심한 듯했으나, 속으로는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한지온 선생님… 아까 정수학 부장님께서… 김동준 강사님하고 굉장히 친한 동기라고 하시던데… 한지온 선생님은 정수학 부장님… 평소에 어떠신 분 같으세요?"

강아름은 남도윤의 질문에 순간 얼어붙었다. '아니, 저렇게 대놓고 한지온 선생님한테 물어본다고? 역시 한지온 선생님에게 관심 있는 거였어!' 그녀의 얼굴에 실망감과 동시에 복잡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컵에 든 허브차는 벌써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한지온은 남도윤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왜 나에게 이런 질문을? 그녀의 눈빛은 미묘하게 변했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수학 부장님. 그 호탕하고, 왠지 모르게 불편한, 현실적인 그 사람.

"글쎄요… 딱히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만…"

한지온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담담했다.

"너무 현실적인 분이랄까? '나가는 게 쉬는 거야', '와이프만 방학이지'… 항상 그렇게 농담 반 진담 반 말씀하시는데, 솔직히 저는 좀… 피곤해요. 그렇게 열정적으로 사는 것도 힘들어 보이고. 너무 자기애가 강한 분 같기도 하고요. 제가 겪어본 바로는, 꽤 시끄러운 분입니다. 저는 조용한 게 좋은데."

그녀는 정수학을 향한 솔직하고, 어쩌면 조금은 매정한(?) 평가를 덧붙였다.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무미건조했지만, 그녀의 말 속에는 정수학에 대한 불편함과 이해하기 어렵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한지온의 그 솔직한 한마디가 마치 마법처럼 꼬였던 오해의 실타래를 스르륵 풀어냈다.

남도윤은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속으로는 안도했다. 그의 의심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시끄러운 분', '피곤하다', '자기애가 강하다'… 한지온의 솔직한 평가는 그가 낮에 느꼈던 '정수학-한지온' 관계에 대한 의심을 단숨에 해소시켰다. 정수학과 한지온 사이에 특별한 관계는 없는 듯했다. '휴… 다행이다.' 남도윤은 속으로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그를 괴롭히던 불편함이 스르륵 사라지는 듯했다.

강아름의 얼굴에도 안도의 빛이 스쳤다. '어… 남도윤 선생님이 한지온 선생님을 좋아해서 정수학 부장님과의 관계를 질투한 게 아니었네? 오히려 정수학 부장님과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었던 건가?' 그녀의 얼굴에는 깨달음과 함께 묘한 민망함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의 엉뚱한 오해로 속상해했던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녀의 굳어있던 얼굴에는 이제야 희미한 미소가 피어났다.

"아… 하하하. 맞아요. 정수학 부장님… 저도 좀 시끄럽다고 생각하긴 했어요!" 강아름은 민망함을 감추려는 듯 크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이제야 풀린 오해에 대한 후련함이 담겨 있었다.

남도윤의 입가에도 희미한 웃음이 걸렸다. 그는 강아름과 한지온, 그리고 자신을 짓누르던 무거운 오해의 공기가 점차 옅어지는 것을 느꼈다. 셋 모두 다른 방향으로 꼬여서 서로의 속내를 몰라 애를 태웠던 묘한 밤이었다. 정수학 부장에 대한 한지온의 평가가 그들 사이의 긴장을 한 방에 날려버린 것이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그 침묵은 더 이상 어색하지 않았다. 강아름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근데… 김동준 강사님 말씀이 진짜였네요. '힘이 되는 것은 동기'라고."

그녀의 목소리에는 낮에 강연에서 느꼈던 감동과, 방금 풀린 오해에 대한 안도가 뒤섞여 있었다.

남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낮의 김동준 강사의 강연을 진지하게 곱씹는 듯한 표정이 스쳤다.

"저도 그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전문성이라는 것이… 어쩌면 혼자서 모든 것을 이겨내야 한다는 강박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동준 강사님 말씀처럼,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교육 현장에서, 정말이지 의지할 수 있는 동료 교사는…."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희미하게 웃었다. 그의 딱딱한 말투에는 드물게 인간적인 고민이 묻어났다.

한지온은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오늘 하루 가장 선명하게 빛났다.

"그러게요. 저도 김동준 강사님 말씀이… 계속 귀에 맴돌았어요. 저는 제가 가진 게 너무 부족해서 누구에게도 도움을 줄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저 스스로가 의지할 수 있는 동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혼자 힘들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그게 가장 위로가 되는 것 같아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작지만 진심이 담겨 있었다. 스스로를 고립시키려 했던 한지온의 마음이 아주 조금 열리는 듯한 순간이었다. 세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방금까지 서로 다른 이유로 삐걱대던 그들의 관계는, 김동준 강사의 강연과 정수학 부장님과의 뜻밖의 인연, 그리고 한지온의 솔직한 고백을 통해 미약하지만 새로운 결속을 맺는 듯했다.

남도윤은 강아름과 한지온을 번갈아 보더니, 마침내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얼굴에서 감정의 벽이 살짝 허물어지는 순간이었다. 강아름 역시 희미하게 웃었다. 한지온의 표정은 여전히 무덤덤했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두 사람에 대한 미약한 신뢰와 기대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날 밤, 기숙사 쉼터는 웃음소리가 사라지고 다시 고요해졌지만, 그 공기는 더 이상 찌릿하지 않았다. 밤하늘의 별들이 쉼터 창밖에서 반짝이는 것을 보며, 세 사람은 각자의 방으로 향했다. 잠 못 이루던 밤이었지만, 오해가 풀리고 새로운 연결고리가 생긴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S11. 시작과 끝


영종도 교육연수원 대강당은 연수 첫날의 답답함 대신, 5일간의 여정을 마무리하는 후련함과 함께 묘한 아쉬움으로 가득했다. 연수 수료식. 강단에 선 김연희 연구사의 얼굴에도 노곤함과 만족감이 교차했다. 새내기 교사들의 얼굴에는 처음의 잿빛 절망 대신, 해내왔다는 성취감과 약간의 피로가 섞여 있었다.


강아름은 수료증을 받아 들고 활짝 웃었다. 그녀의 눈빛은 더 이상 방황하지 않았다. 5일 전, 유럽 여행이 무산되었다는 절망감에 파묻혔던 그녀의 마음은 이제 새로운 빛으로 채워져 있었다. 비록 꿈에 그리던 유럽 여행은 다음으로 미뤄졌지만, 그 대신 '교사로서의 새로운 출발'이라는 더 큰 가치를 얻은 듯했다. 그녀의 미소에는 진정한 즐거움과 함께 성숙함이 깃들어 있었다.


남도윤은 수료증을 받아 들고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냉철한 계산기가 아니었다. 김동준 강사의 강연은 그의 딱딱했던 가치관에 큰 파동을 일으켰고,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아이들을 향한 진정한 '이해'와 '사랑'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발견한 듯했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지만, 그 깊이에는 훨씬 더 인간적인 따스함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는 옆에 선 강아름과 한지온을 한 번 쓱, 훑어봤다. 묘하게 단단해진 유대감이 그들 사이에 흐르고 있었다.


한지온은 수료증을 들고도 여전히 무표정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만은 달랐다. 처음 연수원에 들어섰을 때의 그 공허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어둡던 눈동자에는 희미한 불꽃이 피어올랐고, 그 불꽃은 더 이상 쉽게 꺼지지 않을 듯했다. 김동준 강사의 위로, 그리고 강아름, 남도윤과의 겪어낸 짧지만 강렬한 경험들이 그녀의 닫혔던 마음을 조금씩 열어준 듯했다. 그녀는 강연장 뒤편에서 자신을 응시하는 정수학 부장님을 발견하고는, 아주 작게, 그러나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수료식이 끝나자, 정수학의 EV9 전기차가 연수원 정문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5일 전과 같은 차, 같은 운전자였지만, 차에 오르는 세 새내기 교사의 표정은 사뭇 달랐다. 강아름의 보라색 캐리어는 여전히 유럽을 향한 염원을 담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 캐리어가 마냥 무겁지만은 않았다. 남도윤은 효율적으로 접은 백팩을 가볍게 트렁크에 넣었고, 한지온은 작은 쇼핑백 대신 연수원에서 받은 자료집을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자, 방학 시작부터 고생 많았네, 우리 귀요미 선생님들, 이제 집에 갑시다!"


정수학은 여전히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 속에는 은근한 놀림과 함께 대견함이 묻어 있었다. 한지온은 역시나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올라탔다. 남도윤과 강아름은 그 틈을 타 익숙하게 뒷좌석에 앉았다. 5일 전의 어색함 대신, 이제는 묘한 동질감과 편안함이 그들을 감쌌다.


위이잉- 조용한 모터 소리와 함께 EV9은 연수원을 빠져나와 인천대교를 향했다. 라디오에서는 여름 햇살처럼 따뜻하고 경쾌한 멜로디의 팝송이 흘러나왔다. 창밖으로는 해가 뉘엿뉘엿 지며 붉은 노을이 바다 위로 번지고 있었다. 지친 몸뚱이는 옴짝달싹하기 힘들었지만, 마음만은 한없이 가벼웠다.


"그래서, 다들 이제 뭐할 거야?"


정수학이 불쑥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그들이 어떻게 변했을지에 대한 궁금증이 섞여 있었다.

강아름은 피곤함 속에서도 눈을 반짝였다.


"저는… 내일부터 바로 일본으로 떠나요! 비록 유럽은 못 갔지만… 이번엔 정말 '여행'만 즐기면서 재충전하고 올 거예요! 김동준 강사님 말씀처럼 저 자신을 돌보는 시간도 필요할 것 같아서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설렘과 함께 한층 단단해진 자아감이 묻어났다.

남도윤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저는… 남은 기간 동안 논문을 좀 수정하려고 합니다. 이번 연수에서 느낀 점들을 반영해서… '진정한 교사의 전문성'에 대한 부분을 좀 더 심층적으로 연구해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음… 스터디 모임도 좀 알아볼 생각입니다. 이제는 혼자만의 전문성이 아니라, 동료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의 말에는 강아름과 한지온을 향한, 희미하지만 새로운 동료애가 담겨 있었다. 정수학은 백미러로 한지온을 힐끗 봤다. 그녀는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으로 창밖 노을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그녀의 변화가 보였다. 김동준의 강연이 가장 큰 영향을 준 듯했다.


"한지온 선생님은? 뭔가 계획이 생겼어?"


한지온은 질문을 받고도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세 사람을 둘러봤다. 그녀의 입가에는 이제 쓸쓸함이 아닌, 아주 희미하지만 온전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비밀이에요."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지만, 그 속에는 이전에는 없었던 묘한 자신감과 설렘이 담겨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처음의 메마름 대신, 희미한 등불처럼 반짝였다. 그녀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았고, 그것이 그녀의 텅 빈 마음에 아주 작은 씨앗처럼 뿌리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정수학은 그들의 대화를 듣는 내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5일 전, 어색함과 긴장감으로 팽팽했던 차 안의 공기는 이제 편안한 웃음과 서로에 대한 이해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의 대화는 마치 오케스트라의 하모니처럼, 각자의 개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하나의 아름다운 곡을 연주하는 듯했다. 그들은 분명, 함께 성장했다.

강아름은 지쳐 졸음이 쏟아지는지 스르륵, 남도윤의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남도윤은 순간 얼어붙었지만, 이내 굳었던 어깨에 힘을 빼고 그녀를 그대로 두었다. 그는 고개를 살짝 돌려 강아름의 앳된 얼굴을 내려다보고는, 다시 조용히 창밖의 노을을 바라봤다. 그의 귓불은 희미하게 붉어졌다.


정수학은 백미러로 그 장면을 고스란히 보고 피식 웃었다. 그의 웃음에는 짓궂음과 함께 '드디어 시작되었군' 하는 듯한 알 수 없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한지온은 그 모든 장면을 말없이 바라봤다. 그녀의 표정은 복잡했다. 묘한 감정들이 뒤섞인 눈으로 노을 지는 바다를 하염없이 응시했다. '그래, 이게 인생이지.' 낮게 중얼거렸던 그녀의 말이 이제는 체념이 아닌, 묘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노을빛이 아름답게 물든 인천대교 위를 달리는 차 안. 라디오에서는 여름 노래가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정수학은 속으로 생각했다.


'방학 시작부터… 드라마 찍냐, 너희 셋이.'


이들의 여름방학은 이제, 진짜 시작되었다.


에필로그


참결초등학교. 여느 조용한 초등학교 건물과는 어울리지 않게, 3층의 밴드부실에서는 한여름 땡볕보다 더 뜨거운 메탈 음악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쿵, 쾅, 타타탕! 격렬하고 빠른 박자의 드러밍이 심장을 들쑤셨고, 쉴 틈 없이 내달리는 기타와 베이스의 속주는 공간을 압도했다. 그리고 그 모든 소리 위에 보컬의 고음이 찢어진 현수막처럼 나부꼈다.


드러머 정수학은 이미 온몸이 땀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티셔츠는 흥건하게 젖었고, 그의 표정은 격렬한 비트만큼이나 뜨겁고 몰입된 듯했다. 반면 기타 파트의 독고철은 앰프 옆에 놓인 간이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온몸으로 메탈을 연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마에는 땀 한 방울조차 맺히지 않았다. 그는 흡사 로봇처럼 정확하게 프렛을 짚고, 아무렇지도 않게 차가운 캔커피 한 잔을 들이키고 있었다. 보컬 김도진은 방금 전 피 토하듯 고음을 내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영 만족스럽지 않은 듯 뚱한 표정으로 마이크 스탠드를 툭툭 찼다. 그리고 그들 옆에는 베이스를 맨 채 말없이 기타 앰프 옆에 앉아 있는, 아직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 한 명이 있었다.


잠시 합주를 멈추고 쉬는 시간. 숨을 헐떡이던 김도진이 물통을 집어 들며 입을 뗐다.


"근데 그 신규 선생님들은… 연수 잘 받았데?"


정수학이 드러머 의자에 기대어 헉헉거리며 답했다.


"궁금해? 궁금하면 오백..."


김도진은 시크하게 물통을 던지듯 놓았다.


"아니, 안 궁금해."


그때 냉정하게 커피를 들이켜던 독고철이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어제 도윤이한테 전화 오더라."


정수학과 김도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땀으로 엉망진창이었던 정수학은 벌떡 일어섰고, 무표정했던 김도진의 얼굴에 희미한 경악의 그림자가 스쳤다.


"뭐라고?! 남도윤이가?! 나 말고 너한테?! 설마 내 번호는 없다고 한 거 아니지? 나의 도윤이가 전화를 걸었어?"


정수학은 거의 울상을 지으며 남도윤이 마치 자신을 배신한 것 마냥 억울함을 토해냈다. 그는 진심으로 상처받은 표정이었다.


김도진은 흥미로운 듯 턱을 쓸었다.


"오호, 드디어 정수학 부장님을 버린 건가?"


정수학은 더욱 격분했다.


"연수 가는 차 안에서 내 매력에 푹 더 빠졌을 텐데! 부장님을 너무 존경하고 사랑한다고 했을 때도 나랑 연수 가기 싫어했던 남도윤 선생님이? 남도윤이가? 그 딱딱한 남도윤이가?! 언제 또 그런 사이가 된 거야? 분명 나를 존경하고 사랑한다고 했는데!"

김도진은 팔짱을 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완전 농락당한 삼각관계 아니야? 혼돈의 카오스인데?"


독고철은 덤덤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이제 나를 좋아하나 보지, 뭐."


그 말에 정수학과 김도진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아, 이 말도 안 되는 아저씨들의 농담! 땀내 나는 밴드부실에서, 그들은 여전히 사춘기 소년들처럼 장난치며 낄낄거렸다. 그때까지 말없이 베이스만 튕기던 남자가 나직이 한마디 던졌다.


"공연은 어디서 한다고 했죠?"


정수학은 언제 그랬냐는 듯 헤벌쭉 웃으며 남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의 얼굴에는 다시 열정적인 드러머의 미소가 피어났다.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이요!"

밴드부실 한쪽 벽에는, 그들의 팀 이름과 공연 곡목이 적힌 칠판이 걸려 있었다.


[TEAM: SPLASH]

- 공연 곡: 서시, Soldier of Fortune

여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뜨거운 음악과 함께, 새로운 무대가 시작될 참이었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