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나고 자란곳은 서울 청파동이다. 내가 어릴적 청파동은 주로 일본식 적산가옥이며 가끔 한 두채의 양옥이 있는, 당시에는 전형적인 서울의 주택가였다. 내가 살던 집도 일본식 적산가옥으로 앞뒤 작은 마당이 있고 방은 일본식 다다미방으로 된 집이었다. 그래서 나의 어릴적은 딱지치기와 구슬치기 그리고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남자들이 모이면 많이 하는 이야기가 어릴적 고향에서 뛰놀다가 이웃집 밭에서 서리를 하던 영웅담이거나 군대에서 얼마나 영리하게 육체적으로 힘든 일을 피하고 편안하게 보냈는가 하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나는 도심 골목에서 자라서 할 이야기가 별로 없다. 골목대장을 해서 동네 구슬을 내가 모두 모은 것도 아니고, 딱지를 수 백장 가진 적도 없고 술래잡기에서 나는 아무리 꼭꼭 숨었다 해도 먼저 발견되는 건 나였다.
나는 홍천에서 군대 생활을 했다. 당시 내가 속한 부대는 훈련을 세게 하기로 소문난 부대였지만, 상대적으로 대민 사업은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부대였다.
날이 더워지면 부대 안에서의 집합훈련에서 부대 밖에서 야외훈련으로, 분대에서 소대로, 그리고 중대로 훈련단위가 증가 되었다. 이 야외 훈련이 끝날 쯤이면 날씨도 추운 겨울이 끝나가고 따뜻한 봄으로 접어 든다. 이때부터 대민사업이 시작되었다.
대민 사업은 주로 시골출신의 전우들이 뽑혀 나갔다. 나 같은 도시 출신은 훈련 장비를 보수하거나 지루한 정신교육을 받고 체력단련으로 하루를 보냈다. 대민사업을 끝내고 돌아온 전우들은 여전에 고향에서 했던 일이라 수월하게 하였어도 주민들에게 일 잘한다고 칭찬을 받았다는 것과 하얀 쌀밥에 시골 김치가 얼마나 맛있으며 얼마나 배불리 먹었다는 것을 마치 영웅담 하듯이 큰소리로 자랑하였고 도시 출신의 전우들은 그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우리도 언젠가는 대민사업에 차출되어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위안으로 삼았다. 하지만 눈앞에 어리는 하얀 쌀밥의 잔상은 지워지지 않고 침샘을 자극하였다.
내가 군 생활을 반이 넘었을 때 나에게도 대민사업을 참여할 기회가 왔다.
부대 특기 훈련이 늦어져서 일부 장병들이 귀대하지 못하여 나와 같은 도시 출신 장병들도 참여하기로 하였다. 나는 전날 저녁부터 기대와 희망으로 잠이 오지 않아 고참병을 대신하여 야간 당직 근무도 자청하고 어서 해가 뜨기만을 기다렸다.
아침 점호 이른 식사를 하고 담당 상사의 인솔로 군 트럭을 타고 마을 회관으로 향하였다.
훈련을 나갈 때 보병은 걸어서 이동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어쩌다 한번은 이런 행운이 오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 길들은 비포장 자갈길이라 흙 먼지들이 날리는데 군 차량에 장병이 탔을 때는 천막을 덮을 수가 없어 이동시 흙 먼지를 뒤집어 썼다. 그래도 걷는 것보다는 몸이 편하여 이러한 고충이 있어도 될 수 있으면 차량을 지원을 원하지만 그런 행운이 오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러니 대민지원을 위해 차량이 배정되었는 사실에 우리는 신이 났고 승차하는 즉시 누가 말 안해도 안쪽부터 계급 순으로 앉아 조용히 출발을 기다리고 나도 계급 순서에 따라 중간에 앉았다.
마을 회관에 도착하여 담당 상사의 간단한 주의 사항을 듣고 이장님이 시키는 대로 마을 어르신과 함께 흩어져 작업을 시작했다. 일부 장병들은 마을 길 보수가 우선이라 그 쪽으로 나갔고, 일부는 모내기 지원에 배치 되었다.
나와 옆 소대의 장병 둘은 도시 출신이라 모내기에서 제외되었고 이장님은 웃으면서 농사일 안해본 사람은 쉬운 일을 준다면서 경운기에 타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모내기가 허리가 아프고 육체적으로 힘들다는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기에 그 임무에서 배제된 행운을 준 이장님께 속으로 감사를 했지만 그 행운이 얼마나 헛된 것임을 아는 것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경운기를 타고 덜덜거리며 마을 입구를 지나 도착한 곳은 홍천강의 중간 쯤되는 곳의 지류로 물길이 굽어지는 곳이라 자갈과 모래가 쌓여 있는 곳이었다.
우리의 작업은 모래와 자갈을 퍼서 경운기에 담는 작업을 하는 것으로 경운기가 모래밭으로 내려 올 수 없어 삽으로 모래를 퍼서 경운기까지 던져야 했고 그 높이는 약 어께 정도여서 처음의 한 두 번은 그리 힘든 것 모르고 모내기보다 쉬운 일이라는 이장의 말만 믿고 신이 나서 퍼 올렸다. 하지만 회수가 거듭될수록 삽질하는 속도는 줄어들고 모래를 한 삽퍼서 퍼 올리면 반은 흩어져서 다시 내려 오고 반만 겨우 경운기에 안착할 뿐만 아니라 바닥이 겉은 모래 같아 보이지만 한 삽을 퍼 올리면 그 밑은 자갈이 있어 다른 자리로 옮기니 점점 경운기와 멀어지면서 힘은 배로 드는 것이었다.
우리를 인솔한 마을 어르신은 경운기 운전석에 앉아서 우리를 쳐다보면서 “젊은 사람들이라 힘이 좋아 금방 한 차 채우겠네. 너무 무리하지 많고 천천히 해, 그리고 내가 다녀 올때까지는 저기 그늘에서 쉬고 있어” 하시는 것이었다.
한 차를 채우면 쉴 수 있다는 유혹에 우리는 무리해서 삽질을 했고 온 힘을 다햐여 경운기 위로 모래를 퍼 올렸다. 그러나 반 차를 조금 넘기자 삽질하는 속도가 현저히 떨어지고 서로 눈치를 보면서 쉬운게, 쉬운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몸도 이에 반응하여 천천히 움직이고 머리는 이를 타개할 방도를 궁리하기 위해 맹렬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날씨는 아직 여름이 아니라고 아직은 멀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흐르는 땀을 주체하지 못하자 어르신은 조금 쉬라고 하면서 이런 흙일 해본 적이 없냐고 묻지만 우리는 대답할 기운도 없었다.
어르신이 잠시 자리를 비우고 화장실에 다녀 온다던 전우가 오는 길에 푸대자루 몇 개를 주워 왔다. 우리는 ‘좋은 생각이야’ 하면서 자루에 모래를 담아 둘이 들고 경운기에 옮기기 시작하니 힘도 덜 들고 작업도 빨라져 우리는 다 같이 웃으면서 ‘항시 머리를 써야 해’ 하고 작업을 계속하니 경운기 한 차는 금방 채워졌다.
그때 어르신이 오셔서 보더니 ‘푸대자루 어디서 가져왔냐’고 하면서 ‘허락 받았냐’고 묻는데 가져온 전우는 영문을 모른다는 듯이 그냥 쳐다만 보고 있었다. 어르신도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어 우리는 한차를 채웠다는 만족감에 그늘에 앉아서 잠시 쉬고 어르신은 경운기를 몰고 갔다.
잠시 후에 갑자기 인솔 상사가 뛰어 오더니 다 집합하라고 하면서 민간인 재산을 훔쳤다고 사전에 주민피해 주지 말라고 그렇게 정신교육을 시켰는데 너희는 정신을 못 차렸다고 무조건 얼 차려를 하는 데 한동안 영문도 모르고 모래 바닥을 기고 구르면서 정신없이 얼차려를 당했다.
잠시후 어르신이 오더니 보기에 미안했는지 그만하라고 말리면서 인솔 상사도 못 이기는 듯 얼차려는 그만하고 얼른 한 차를 채우라고 지시하였다.
우리는 영문도 모른채 다시 경운기에 모래를 한차를 채우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속으로는 우리가 이렇게 땀 흘리면 일하는데 쌀 푸대 몇 개가 뭔 대수라고 그러느냐며 겉으로 표현도 못하고 푸덜 거렸다. 한차를 채우는 작업이 끝나자 담당 상사는 철수 하라고 지시 하면서 잠시 이장과 상의한다고 자리를 비우고 우리는 흐르는 땀을 뒤로 하고 철수 준비를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담당 상사는 그 푸대는 옆집에서 다른 일에 쓰려고 준비했는데 군인이 훔쳐갔다고 이장에게 신고하여 ‘일이 커지기 전에 무마하려고 그런 거다’ 하면서 ‘필요하면 사전에 보고하고 해야지 고생하고 성과는 없으면 되겠냐’고 나무라며 담부터는 주의하라는 것이었다.
나와 두명의 전우는 그대로 복귀하여 기대했던 쌀밥도 서골의 반찬도 얻어먹지 못했다. 부대로 복귀하여 다른 전우들이 남겨놓은 식은 밥이나마 맛있게 먹는 것으로 허기를 달랬고 나의 대민 사업은 이렇게 해프닝으로 마감했다.
내가 제대 후 농촌이 고향이고, 어럴적 서리에 관한 이야기 혹은 군대이야기를 하는 친구나 후배가 있으면 촌놈이 출세했다고 놀리거나 군대에서 편하면 사회에서 힘들다고 억지스럽게 놀린다. 그렇게 나는 조금 소짐하지만 내가 당했던 일을 소소하게 복수한다.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해를 못해도 나는 나만의 복수에 스스로 흐믓하고 즐거워지는 기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