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immy Park Mar 17. 2024

006 잘 헤어지기

Jailbreak

“Don’t cry because it’s over. Smile because it happened.” (Dr. Seuss)
 
그날은 유난히  바람이 차가웠다.
 
회사를 떠나기 전 날 밤,

사무실에 남아 사업부 멤버들에게 이메일을 썼다.
썼다 지우고, 또 썼다 지우기를 여러 번.
전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진심이 전달될 만큼만 남기고 모두 덜어 냈다.
그리고는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적었다.
 
리더로서 미안했다.
하루아침에 사업부가 없어져 뿔뿔이 흩어져야 하는 불안함.
상위 조직이 바뀌고 팀이 바뀌어 앞으로 내가 뭘 하게 될지 모르는 혼란스러움.
그 요동치는 마음을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전 LG에서 나도 팀장으로 똑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새로 부임하신 CEO의 의지로 사업부가 없어지고
신사업을 하던 우리 팀도 해체 수순을 밟게 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때는 진실을 이야기해주지 않는 리더가 원망스러웠다.
상황이 어찌 되었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 주고 소통해 주길 바랐었다.
출근하자마자 모여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지 웅성이는 게 일상이었고
얼굴 마주치면 갈 곳은 정해졌냐고 서로 묻는 것이 인사였다.   
결국 그 경험은 끝이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았다.
헤어질 때 그런 리더가 되기는 싫었다.

오랜 대기업 생활을 통해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큰 회사는 생각보다 튼튼하다는 것이다.
옆을 둘러보면 비효율적인 절차나 불합리한 의사결정이 넘쳐나는 것 같기도 하고
존경할 수 없는 상사들이 버젓이 승진하며 승승장구하기도 한다.
이러다 정말 회사가 잘못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기까지 한다.
하지만 회사는 이미 오랜 세월 그 모든 것을 품고
항공모함처럼 우직하게 우 상향하며 나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쉽사리 방향을 틀지도, 그렇다고 급속히 가라앉지도 않는다.
물론 그런 비효율과 불합리를 덜어낸다면
성장의 기울기가 가팔라지거나 속도가 조금 더 빨라질지 모르나
오래가는 회사를 만드는 데에는 속도보다 방향성이 훨씬 더 중요한 법이다.
하여, 회사는 규모에 맞게 큰 문제없이 잘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멤버들이 회사와 자기 인생을 동일시하지 않길 바랐다.
좋은 회사에 다닌다고 모두 좋은 인생인 것은 아니다.
오롯이 자신의 하루에 집중해서 즐겁고 보람되게 지내기를 바랐다.
그렇게 조금씩 성장하고 업무적으로도 인정받으며 행복하게 지냈으면 했다.
 
잘 헤어져야 다시 잘 만날 수 있다.
간절한 내 진심이 조금이라도 전달되었기를...




SI사업부 여러분,


저희 사업부는 23년을 마지막으로 해체되고 저는 글로비스에서의 여정을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연말에 이런 소식으로 인사를 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그동안 신사업을 해보겠다고 여러분들과 열심히 뛰어다녔지만 제가 많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충분히 집중하지 못했고 과감히 변화하지 못했습니다.

외부의 벽도 높았지만 내부의 벽도 넘지 못했습니다.

변할 필요가 없고, 변할 수도 없다고 믿는 사람들을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저는 떠나지만 회사는 아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회사라는 건 늘 규모에 맞는 최적의 의사결정을 하기 마련이고,

혹시 주변에 불합리와 비효율이 보이더라도

회사는 이미 그 모든 걸 품고 천천히 전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파묻혀만 지낸다면 저와 여러분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출근을 해서 하루하루 우리의 인생을 회사에 쏟고 있기 때문입니다.


회사에서도 인정받고, 고객에게 감사받으며 행복하게 지내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가끔 뒤 돌아볼 때 그렇게 보낸 시간이 아깝지 않고 보람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보낸 하루가 쌓인 궤적이 여러분의 인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게 유일하게 여러분이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흐르는 강물에 손을 두 번 담글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살면서 모든 일은 단 한 번만 벌어집니다.


여러분들과 지난 3년을 함께 해서 좋았습니다.

혹시 다시 마주치게 된다면 반가운 얼굴로 인사하면 좋겠습니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사랑과 존경을 담아서...

박만수 드림


(Empty Office, Powered by DALL.E3)


작가의 이전글 005 언제 마지막으로 오열해 보았는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