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ilbreak
"Every beginnings are often disguised as painful endings." (Lao Tzu)
시작은 이랬다.
12월의 어느 월요일 아침, HR의 조상무가 오후 3시에 31층에서 볼 수 있는지 연락이 왔다.
시간 맞춰서 올라갔더니 방 앞에 전화를 받으며 나와 있었다. 나는 편히 전화받으라는 눈짓을 보내고 먼저 방에 들어가 앉았다. 네 사람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위에는 생수가 놓여 있었고, 맞은편 통창으로는 흐린 하늘이 보였다. 조상무가 전화를 마쳤는지 금세 따라 들어왔다.
“박상무 님이 저희 회사에 들어오신 지 얼마나 됐지요?”
“이제 딱 3년 되었네요.”
“처음엔 누가 연락을 드리고 만났었지? 제가 만난 건 아니었지요? 아… 맞다 유상무 님이 계셨구나 그때는…”
“말 돌리지 않으셔도 돼요. 그냥 편하게 말씀하세요. HR이 멋없게 왜 그래요.”
“아… 그게… 이 번에 신사업을 좀 더 기존 사업과 밀착해서 진행을 해보자고 대표님이 말씀을 하셔서 조직을 짜다 보니 신사업하는 상무님 사업부가 없어지게 되었어요. 그래서 상무님이 하실만한 다른 포지션을 찾아봤는데… 끝까지 적당한 자리를 못 찾았어요.”
“그렇게 되었군요. 알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상무님이 미안할 건 없지요. 상무님도 자기 일을 하는 건데요 뭐….
회사 올 때부터 언제든 이런 날이 올 거라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늘 가상의 임기 같은 걸 머릿속에 그리고 일을 해왔고요. 올 해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온 것 같아요. 그래서 미련은 없어요. 정말 전 괜찮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면 저야 너무 감사하지요. 간혹 내가 왜 나가야 되느냐, 내가 뭘 그렇게 잘 못했느냐 따지시는 분들도 있어서…”
“아닙니다. 차라리 잘 되었어요. 저도 가끔 시간이 좀 아깝다 생각하고 있던 터라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오히려 다행일지 몰라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아닙니다. 제가 감사하지요. 의미도 있었고 재미도 있었습니다.”
그게 끝이었다. 그렇게 3년간의 여정은 막을 내렸다.
지난 25년간의 직장생활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마무리된 순간 치고는 이상하리 만치 덤덤했다. 타격감이 없었다. 오히려 홀가분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야 머릿속으로 수 없이 상상을 해왔었는데 이런 기분이었구나.
그때였다. 글을 써야겠다 생각이 든 것이…
그 순간에 느낀 이 기분이 뭐였는지,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 남기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난 참 운이 좋았다.
어린 나이에 유학을 가서 거의 10년간 미국 생활을 하며 양쪽의 문화를 동시에 경험하는 호사를 누렸다.
삼성, LG, 현대라는 대기업들에 몸 담으며 사업이 어떻게 그런 규모로 성장하는지 경험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글로벌 회사와 Top 학교들을 다니며 훌륭한 분들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또한 오픈이노베이션, 투자 업무를 하면서 대기업과는 상반된 스타트업 커뮤니티의 에너지를 경험할 수 있었고, 사업에 대한 양 쪽의 균형 잡힌 시각에 대해 고민해 볼 수도 있었다.
가정에서는 사랑하는 아내의 남편, 두 아들의 아빠가 되어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돌아보면 참으로 복 받은 인생이었다.
그래, 이 모든 걸 남겨보자.
시시콜콜하더라도 내 이야기를 써 보자.
그걸 따라가다 보면 지난 50여 년간의 내 삶이 고구마 줄기 엮이듯 줄줄 엮여 나올 것 같았다.
그 자취를 남기는 것이 열심히 살아온 나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선물 같았다.
그동안 내가 은혜 입었던 분들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마음속 저 끝에서 뭔가 희망 같은 게 반짝였다.
31층에서 25층까지 비상계단을 타고 걸어 내려오면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하나의 문이 닫히자 다른 하나의 문이 열렸다.
끝은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