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immy Park Mar 14. 2024

001 글을 쓰기 시작하다

Jailbreak

"Every beginnings are often disguised as painful endings." (Lao Tzu)


시작은 이랬다.


12월의 어느 월요일 아침, HR의 조상무가 오후 3시에 31층에서 볼 수 있는지 연락이 왔다.
시간 맞춰서 올라갔더니 방 앞에 전화를 받으며 나와 있었다. 나는 편히 전화받으라는 눈짓을 보내고 먼저 방에 들어가 앉았다. 네 사람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위에는 생수가 놓여 있었고, 맞은편 통창으로는 흐린 하늘이 보였다. 조상무가 전화를 마쳤는지 금세 따라 들어왔다.

“박상무 님이 저희 회사에 들어오신 지 얼마나 됐지요?”
“이제 딱 3년 되었네요.”
“처음엔 누가 연락을 드리고 만났었지? 제가 만난 건 아니었지요? 아… 맞다 유상무 님이 계셨구나 그때는…”
“말 돌리지 않으셔도 돼요. 그냥 편하게 말씀하세요. HR이 멋없게 왜 그래요.”
“아… 그게… 이 번에 신사업을 좀 더 기존 사업과 밀착해서 진행을 해보자고 대표님이 말씀을 하셔서 조직을 짜다 보니 신사업하는 상무님 사업부가 없어지게 되었어요. 그래서 상무님이 하실만한 다른 포지션을 찾아봤는데… 끝까지 적당한 자리를 못 찾았어요.”
“그렇게 되었군요. 알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상무님이 미안할 건 없지요. 상무님도 자기 일을 하는 건데요 뭐….
회사 올 때부터 언제든 이런 날이 올 거라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늘 가상의 임기 같은 걸 머릿속에 그리고 일을 해왔고요. 올 해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온 것 같아요. 그래서 미련은 없어요. 정말 전 괜찮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면 저야 너무 감사하지요. 간혹 내가 왜 나가야 되느냐, 내가 뭘 그렇게 잘 못했느냐 따지시는 분들도 있어서…”
“아닙니다. 차라리 잘 되었어요. 저도 가끔 시간이 좀 아깝다 생각하고 있던 터라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오히려 다행일지 몰라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아닙니다. 제가 감사하지요. 의미도 있었고 재미도 있었습니다.”
 
그게 끝이었다. 그렇게 3년간의 여정은 막을 내렸다.
지난 25년간의 직장생활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마무리된 순간 치고는 이상하리 만치 덤덤했다. 타격감이 없었다. 오히려 홀가분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야 머릿속으로 수 없이 상상을 해왔었는데 이런 기분이었구나.

그때였다. 글을 써야겠다 생각이 든 것이…
그 순간에 느낀 이 기분이 뭐였는지,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 남기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난 참 운이 좋았다.
어린 나이에 유학을 가서 거의 10년간 미국 생활을 하며 양쪽의 문화를 동시에 경험하는 호사를 누렸다.
삼성, LG, 현대라는 대기업들에 몸 담으며 사업이 어떻게 그런 규모로 성장하는지 경험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글로벌 회사와 Top 학교들을 다니며 훌륭한 분들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또한 오픈이노베이션, 투자 업무를 하면서 대기업과는 상반된 스타트업 커뮤니티의 에너지를 경험할 수 있었고, 사업에 대한 양 쪽의 균형 잡힌 시각에 대해 고민해 볼 수도 있었다.
가정에서는 사랑하는 아내의 남편, 두 아들의 아빠가 되어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돌아보면 참으로 복 받은 인생이었다.

그래, 이 모든 걸 남겨보자.
시시콜콜하더라도 내 이야기를 써 보자.  
그걸 따라가다 보면 지난 50여 년간의 내 삶이 고구마 줄기 엮이듯 줄줄 엮여 나올 것 같았다.
그 자취를 남기는 것이 열심히 살아온 나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선물 같았다.
그동안 내가 은혜 입었던 분들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마음속 저 끝에서 뭔가 희망 같은 게 반짝였다.
31층에서 25층까지 비상계단을 타고 걸어 내려오면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하나의 문이 닫히자 다른 하나의 문이 열렸다.
끝은 시작이다.


(New beginning, Powered by DALL.E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