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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mmy Park Mar 30. 2024

어쩌다 해결사

Jailbreak

"Have patience. All things are difficult before they become easy." (Saadi)


어두운 터널 끝에 한 줄기 빛이 비치는 것 같았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처음 일을 시작할 무렵
삼성에서 5년을 병역특례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삼성전기 기술총괄조직에서 무선랜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팀이었다.

처음엔 별도의 이름 없이 무선랜(Wireless LAN)이라 부르다가

Hi-Fi(High Fidelity)에서 착안하여 Wi-Fi(Wireless Fidelity)로 이름이 정해졌다.

그리고 호환성과 품질 보장을 위해 Wi-Fi 인증제도도 생겼다.


제품을 만든 초기에는 Reference가 없어서 영업이 쉽지 않았는데
어느 날 영업팀이 KT에서 조건부로 물량을 받아왔다.

『Wi-Fi certified 무선랜 카드 5만 대』

당시 초도 물량으로 5만 대는 매우 큰 물량이었고, 이건 무조건 해야 하는 건이었다.

문제는 우리 제품이 아직 Wi-Fi 인증을 받지 못했다는 것.

KT의 요구를 맞추려면 최소한 2주 안에는 인증을 해결해야 했는데

인증 신청은 해두었지만 밀려있어서 예상 완료일은 2달 넘게 남아있었다.


어느 날 출근하니 상무님이 부르시더니 말했다.


"박대리, 미국 좀 다녀와라. 이거 인증받아야 KT 들어가는 거 알지?

초도 5만 대 큰 건이니까 가서 꼭 받아와야 한다. 알겠지?"


매우 부담스러웠지만 유학파였던 나는 큰 일 아니라는 듯 걱정 마시라고 대답했다.

난생처음 가는 해외출장이었다.


미국에 도착 후 바로 Wi-Fi 인증을 담당하던 Agilent Lab으로 갔다.
야후 Map에서 7장을 프린트해서 보며 겨우 찾아갔는데 사무실이 아니라 큰 창고였다.

들어가서 나는 삼성에서 무선랜 카드 인증 때문에 왔다고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책임자 같아 보이는 친구가 힐끗 보더니 무심하게 말했다.


"응, 안돼. 인증은 직접 받으러 오는 게 아니야.
온라인으로 신청하고 제품을 보내면 순서대로 테스트를 해서 통과하면 인증을 주는 거야."

"나도 아는데 우리가 이번에 너무 급해서 내가 직접 왔어."

"응, 그래도 안돼. 여기 신청한 회사들 모두 다 급해. 그러니 순서대로 해야지.
직접 왔다고 먼저 해주면 그건 공정하지 않잖아. 안 그래?"

"..."


황당했다. 나는 이거 하나 받으러 방금 한국에서 왔는데...

상무님이 나를 보낼 때 나는 어느 정도 컨센서스는 돼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오자마자 이렇게 문전박대를 당하니 순간 뇌가 멈추는 것 같았다.

어쩔 줄 몰라서 난 그 앞에 무작정 앉아 있었다.

그들이 절대 안 된다며, 가라고 계속 눈치를 줘도 그냥 버티고 앉아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 밖에 없었다.

이렇게 빈손으로 한국에 돌아갈 순 없었다.


한 세 시간쯤 흘렀나? 점심시간이 되었다.
세 명이 점심을 먹으려고 일어섰다.


"저기... 슬슬 배가 고픈데 혹시 이 근처에 먹을만한 게 있을까?
삼성이 출장비는 잘 줘서 밥 값은 많이 나와. 미안하니까 점심은 내가 살게."

"여기 있어봐야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어. 그냥 가."

"나 방금 한국에서 와서 갈 데도 없어. 배고프니 일단 밥이나 먹고 보자."

"사정은 안 됐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없어."
"그래 이해했어. 나도 생각 좀 해볼 테니 일단 밥 먼저 먹자."
"음... 그럼... 혹시 멕시칸 좋아하니?"
"오 그래? 나 멕시칸음식 무지 좋아해. 얼른 가보자..."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한 명만 책임자였고 나머지 두 명은 파트타임으로 테스트만 해주는 인력이었다.    

미국에서 유학하던 이야기라든지 삼성에 가서 군대 대신 근무한다는 것 등
시시콜콜한 개인적인 이야기도 했다.

밥을 먹고 돌아와서 나는 아까 그 자리에 다시 앉았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을 해봐야 하니 앉아 있게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이 편히 있으라고 했다. 타코와 브리토의 힘이었다.


저녁 때 실리콘밸리 사무실로 돌아와 한국에 있는 Ryan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정을 설명하고 뾰족한 수가 없는지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심플했다.

"버티면서 잘 설득해 봐야지 뭐. 수고가 많다."


다음 날 아침, 커피와 도너스를 사들고 다시 거길 찾아갔다.

나를 보더니 걱정되는 눈 빛으로 왜 또 왔냐고 물었다.

나는 이 것 때문에 출장을 온 거라서 다른 데 갈 곳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다시 오전을 버티다가 둘 째날도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갔다.
점심을 먹다가 그 책임자 친구가 말을 했다.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유일한 방법이 하나 있긴 있어."

"어? 그게 뭔데?"

"우리가 보통 한 제품당 테스트 기간을 하루 반나절씩 잡아두고 테스트를 하거든.

그런데 가끔 테스트 시작하자마자 Fail 나는 제품들이 있어.
그렇게 Fail 처리를 하면 남은 시간은 사실 비는 거라고도 볼 수 있지.
그다음 제품은 어차피 원래 계획대로 테스트 하면 되니까..."

"와, 천잰데. 혹시 Fail 나는 게 있으면 그 비는 시간에 우리 것 좀 넣어서 테스트 하게 해줘."

"그래 알겠어. 너 사무실 가 있어. Fail 나면 연락 줄게."

"나 여기 사무실이 없어. 그냥 아까 거기 앉아 있을게. 부담 갖지 마."


어둡기만 했던 터널 끝에서 한 줄기 빛이 비치는 것 같았다.

그렇게 계속 같은 자리에서 기다린 지 3일 차 되던 날,
드디어 Fail이 났다고 그 친구가 뛰어왔다. 나보다 더 기뻐하는 것 같았다.

테스트에 익숙했던 나는 반나절만에 모든 항목 테스트를 통과하고 인증을 받게 되었다.
무턱대고 실리콘밸리로 날아온 지 3일 만이었다.
그렇게 난 어쩌다 해결사가 되었다.


실리콘밸리 사무실에 들어가 바로 한국에 전화를 걸었다.

"그룹장님, 방금 인증받았습니다."


한국 사무실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출장을 보내긴 했지만 거의 어렵다고 보았던 인증이 해결되었다.

방금 5만 대를 판 것이다.

전화로 소식을 전하던 그 순간의 희열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처음, 그 친구가 "안돼"라고 했을 때는 눈앞이 깜깜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고,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버티다 보니
생각하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조금씩 일이 풀려나갔다.

내가 뭘 뛰어나게 잘한 게 아니다.
그저 버틴 것뿐이었다.


반드시는 아니지만, 세상에 많은 것들이 그런 것 같다.

아무리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준비를 해도 생각대로 안 되기도 하고.
전혀 안될 것 같은 것도 버티다 보면 의외의 곳에서 문제가 풀리기도 하고.
진정성으로 끝까지 버티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리 긴 터널도 끝은 있다.
너무 지치기 전에 터널 끝에서 빛이 비치길 바랄 뿐이다.


(Agilent Lab, Powered by DALL.E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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