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ilbreak
"It doesn't make sense to hire smart people and tell them what to do. We hire smart people so they can tell us what to do." (Steve Jobs)
기획이라는 게 그냥 열심히만 하면 되는 건 줄 알았다.
삼성에서 5년동안의 병역특례를 마치고 LG전자로 회사를 옮겼다.
여의도 트윈타워.
기술전략이라는 부서였는데 미국에서 룸메이트였던 친구 소개로 기회가 닿았다.
계속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밍 업무만을 해오다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기획 부서로 옮기니 신경 쓰이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단 출근할 때 양복을 입어야 했다.
타이는 하지 않았지만 이제야 좀 직장인이 된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바로 옆에 CTO 사장님의 집무실이 붙어 있다 보니 사무실은 고요 그 자체였다.
오래된 건물이라 천장도 낮고 책상도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옆옆줄에 앉은 타 부서 사람이 속삭이듯 전화하는 소리까지 다 들렸다.
딱딱한 기획 업무에 적응하는데 한참이 걸렸다.
하루는 비슷한 시기에 경력으로 입사한 김과장님과 함께 평택 출장을 가게 되었다.
회의 후 마침 저녁 시간이 되어 그 앞에서 순대국밥을 먹고 가기로 했다.
국밥을 시킨 후 김과장님이 갑자기 내게 물었다.
"박과장님, 과장님은 요즘 아침에 일어날 때 무슨 생각이 드세요?"
"네? 글쎄요. 새벽이니까 별생각 없이 그냥 출근 준비 하는 것 같은데요. 왜요?"
"아... 저는 아침마다 눈을 뜨면 매일 가슴이 너무 뛰어요."
"어... 그거 좋은 거예요?"
"아니요. 오늘은 또 뭣 때문에 깨질까... 가슴이 콩닥콩닥거리는 게 느껴져요.
우리 팀장님이 전 너무 무서워요. 박과장님은 괜찮으세요?"
"에고, 그러시구나. 우리 팀장님이 매사에 너무 진지하시긴 하죠.
전 좀 무딘가 봐요. 깨지면 깨지는 거지 뭐 그런 생각이라... ㅎㅎㅎ"
"아... 멘탈이 좋으시네요. ㅎㅎㅎ"
그 일이 있은 후 한 달이 채 되기도 전에 김과장님이 회사를 그만두었다.
팀장님과 면담할 때, 퇴사 후 제빵기술을 배워 빵집을 낼 계획이라고 하셨다는데
실제 빵집을 내셨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난 그냥 그날 순대국밥집에서의 대화가 떠올랐을 뿐이었다.
우리 팀의 팀장님은 워커홀릭 같은 분이었다.
늘 진지하고 열심이고, 주말에도 최소 하루는 출근해서 공부를 하셨다.
알고 보면 마음은 따뜻한데 업무에는 타협이 없는 분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난 팀장님한테 야단을 맞은 기억이 거의 없었다.
워낙 업무에 민감하고 완벽을 추구하시는 분이라
나보다 기획 경험도 많고 일 잘하는 선임들도 매일 한 소리를 들었었고
팀 멤버들 대부분이 혼나는 게 일상이라 이제는 다들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나는 왜 열외였을까? 신기했다.
입사 전 면담을 할 때 기획 업무는 해 본 적 없다고 솔직히 말했더니
기획 일은 어렵지 않아서 조금만 하다보면 금방 배운다고만 하셨다.
난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뭐든 열심히 했다.
잘 몰라도 내 생각대로 들이밀고 시도하고 했던 것 같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어느덧 나도 조직장이 되었고
오랜만에 팀장님을 다시 만났을 때 그때를 떠올리며 물었다.
"팀장님, 그때 다들 팀장님 되게 무서워했어요. 아시죠?"
"열심히 하면 안 무서운데 열심히 안 하니까 무섭지. ㅎㅎㅎ"
"근데 왜 저는 야단 안치셨어요? 저 팀장님한테 야단 맞아본 기억이 없어요."
"그랬나? 아니야 너 그때 일을 잘 곧잘 했어.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니 생각대로 뭔가 해보려고 하는 것도 좋았고..."
그래 그게 솔직한 피드백이었다.
내가 뭘 잘해서가 아니라 뭔가 생각을 가지고 열심히 해서였다.
잘 몰라도 생각대로 자꾸 새로운 걸 시도해서였다.
그래 그렇구나. 그거였구나...
한참 시간이 흘러 현대글로비스로 옮긴 후
우리 사업부에 신입사원들이 입사하면 가볍게 티타임을 하곤 했다.
신입사원들은 난생처음 입사한 회사에서 담당 임원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니
살짝 긴장하기도 하고 의욕에 넘쳐 각오를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빨리 업무 배우고 적응해서 전력에 보탬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사업부장님."
"아니에요. 일 배울 필요 없어요."
"네?"
"업무를 배우려고 하지 마세요. 일은 배우는 게 아닙니다.
맡은 일의 본질을 고민해 보시고 그냥 본인 생각대로 하세요. 그러면 됩니다."
"아..."
"전력에 보탬이 된다는 게 뭘까요?"
"..."
"선배들이 원래 본인이 할 일을 신입사원인 여러분들한테 해보라고 시켰는데
마치 자기들이 한 것과 비슷하게 일처리를 했다면
어 일을 금방 배웠네, 일 잘하네라고 하겠지요.
이제 앞으로는 여러분들께 일을 나눠줘도 비슷한 결과가 나올 테니
팀 전력에 보탬에 된다고 하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때 여러 분은 조직에서 단순한 '헤드카운트'가 됩니다."
"아..."
"여러분들처럼 훌륭한 인재를 뽑아서 헤드카운트로 쓰는 건 엄청난 낭비예요.
여러분들은 각자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동원해서
여러분들이 글로비스를 위해 최선이라 믿는 결과를 만들어 내시면 됩니다.
거기까지 가는 방법은 스스로 개척하고 만들어야지요.
일을 빨리 배워서 선배들과 비슷한 결과를 내려고 욕심내지 마시고
여러분들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남다른 결과를 내려고 해 보세요.
남들이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기대치 않은 결과를 낼수록 여러분의 가치는 올라갑니다."
"아... 알겠습니다."
"막내라고 겸손하게 허드레 일부터 하고 심부름할 생각도 버리시고요.
선배들을 돕고 보조하는 게 여러분의 역할이 아닙니다.
오늘 이 순간부터 여러분들도 똑같이 한 명의 역할을 하세요.
저도 1인분, 여러분도 똑같이 1인분입니다. ㅎㅎㅎ"
"아, 모두 1인분... ㅎㅎㅎ"
모든 회사에는 어쩔 수 없이 조직의 Hierarchy(서열구조)가 있다.
조직 내부에는 각 기능별로 역할도 나뉘어 있다.
성과에 대한 책임은 Hierarchy의 꼭짓점인 조직장이 지는 것이 맞다.
하지만 성과를 만들어 내는 것은 조직장 혼자의 힘으로 할 수 없다.
조직장이 경험이 많고 역량이 뛰어날수록
멤버들을 휘어잡고 본인이 생각한 대로 빈칸 채우기만을 시키는 경우가 많다.
본인 의도대로 일사불란하게 일이 진행되고 즉시 결과가 나오는 것 같지만
그렇게 해서는 예상치 못한 탁월한 결과가 나올 수 없다.
조직장이 그 전체 조직 역량의 ‘한계’가 되기 때문이다.
조직이 한계를 뚫고 계속 성장하기 위해서는
멤버 한 사람 한 사람이 지속적으로 전체 조직의 역량을 삐쭉삐쭉 뚫고 나가줘야 한다.
리더는 멤버들이 그리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줘야 한다.
최고의 리더는
멤버들을 통해 자기의 생각을 현실화하는 사람이 아니라
멤버들을 통해 조직의 그릇을 확장하는 사람이다.
그러기 위해
일은 배우지 않는다.
각자가 매번 새롭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