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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mmy Park Apr 18. 2024

030 운이 좋게도, 운이 찾아왔다

Jailbreak

"Try and fail, but don't fail to try." (John Quincy Adams)


너무 기뻤지만, 차마 그 앞에서 내색은 할 수 없었다.


LG전자에는 매년 2~3명을 선발하여 해외 MBA에 보내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내가 속해있던 CTO 기술전략팀은 당시 사내 핵심부서 중의 하나로 인식되어
상대적으로 그런 기회를 잡을 가능성이 높았고 운 좋게 나도 후보로 추천이 되었다.
단 회사에서 시간, 비용을 지원해 줄 뿐 합격통지서는 개인이 알아서 받아와야 했다.

일단 조건에 맞는 MBA 코스를 제공하는 미국 내 학교들을 List up 해보았더니  

MIT, Cornell, Carnegie Mellon, USC, UIUC(일리노이 주립대) 등이 있었다.

나는 가장 선호하는 MIT Sloan에 지원하기로 마음을 먹고 조건을 알아봤는데

대학교/대학원 성적표, 여러 가지 에세이, 영어 시험점수 등이 필요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외국인 학생들에게는 추가로 TOEFL 점수를 요구했었는데
당시 국내 TOEFL 스케줄이 밀려 Deadline 안에 점수를 받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날짜를 계산해 봐도 지원 마감에 맞출 수가 없었다. 


답답했던 나는 Admission Office에 이메일을 썼고
학교와 몇 번의 핑퐁이 있었다.


"내가 Sloan에 지원을 하고 싶은데 아직 TOEFL 점수가 없다.
한국은 TOEFL 시험이 밀려있어서 점수를 제출하기엔 시간이 빠듯하고
다른 나라에 가서 시험을 볼까도 생각했지만 일이 너무 바빠서 힘들 것 같다.
혹시 TOEFL 점수를 면제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Sloan에 관심을 가져줘서 고맙다. 그건 룰이라서 지켜줘야 한다.
외국인 학생이 영어로 수업을 따라올 실력이 되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TOEFL은 필수다.

만약 기한 연장이 필요하다면 언제까지 제출할 수 있니?"

"이해했다. 룰은 당연히 지켜야지.

한국에서 지금 TOEFL을 신청하면 최소 6개월은 소요된다고 들었다.

회사가 학비는 지원해 주지만 준비를 도와주거나 시간을 빼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지금 너희들에게 부탁을 하는 거다.  

TOEFL이 영어 수업을 따라갈 수 있는지 확인하는 용도라면
내가 미국에서 공부하여 학사, 석사를 받은 기록들이 있으니
그 걸로 어느 정도 증명되었다고 봐도 합리적이지 않을까?"


"지금껏 TOEFL을 빼달라고 요청을 한 선례가 없었다.
개인 사정때문에 임의로 면제해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일단 네 말대로 미국에서 학교 다닌 기록을 참작해서

Admission Office 내부 논의를 해보고 다시 연락 줄게."


"이해해 줘서 고맙다. 가능했다면 어떻게든 제출했을 텐데  
중요한 Task를 진행하느라 정말 여유가 없어서 그렇다.
보스턴 가기 전에 회사에서 성과를 내고 홀가분하게 떠나고 싶다.
좀 도와달라. 부탁한다."

그랬더니 약 1주일 후 특별히 TOEFL을 면제해 주겠다고 회신이 왔다.
MIT 지원에 가장 걸림돌이었던 TOEFL은 해결이 된 것이다.

그리고 에세이를 정말 정성스럽게 썼다.
최대한 회사에서 겪었던 다양한 경험들을 녹여내려고 했고
내가 Sloan에 들어가면 학교에서 배우기만 하는 게 아니라
함께 공부하는 Co-hort와 Sloan 프로그램에도
새로운 Viewpoint와 가치를 제공하며 충분히 기여하겠다고 적었다.

이제 모든 건 내 손을 떠났다.
두달 쯤 지났을까? 회사 메일룸에서 DHL 서류가 왔다고 연락이 왔다. Sloan이었다.
자리로 들고 와서 칼로 DHL서류를 조심스럽게 열고 길게 심호흡을 하였다.
그리고 서류를 꺼내보니...

"It is my great pleasure to inform you that you have been accepted for admission."
   

날아갈 듯이 기뻤다.

그렇게 가고 싶었던 학교에 갈 수 있겠구나.

즉시 그 DHL 서류를 그대로 들고 상무님 방으로 찾아갔다.
합격했다고 말씀드리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 말씀을 드리고 싶었다.


"박팀장. 안 그래도 부르려고 했는데… 여기 앉아 봐."

"상무님, 이거 보세요. 저 Sloan 합격했습니다. 감사해요."

"아... 무슨 이런 일이... 참 공교롭네."

"네?"

"나도 방금 연락을 받았는데, 전 세계적으로 지금 금융위기 터진 것 때문에 난리잖아.
회사도 내부 회의 끝에 긴축 운영을 하기로 의사결정이 났고
MBA 프로그램들도 일단 올해는 동결하고 내년에 상황을 보자고 했다 하네.
안타깝지만 상황이 그러니 어쩌겠어. 올해는 일 좀 더 하다가 내년에 가자."
"아..."
"하필 합격증 받아왔는데 이런 말 해서 미안하다."
"아닙니다 상무님. 회사 결정인데요. 어쩔 수 없지요."

힘없이 자리에 돌아왔다. 너무 우울했다.
말이 1년이지 상황이 좋아지지 않으면 이 제도가 아예 없어질지도 몰랐다.
퇴사하고 자비로라도 갈까 생각까지 했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우울한 기분을 좀 가라앉히고 생각을 냉정하게 정리했다.
그리고는 학교에 다시 이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Acceptance Letter 잘 받았다. 기회를 줘서 너무 고맙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금융위기 때문에 LG가 학비를 내년부터 지원하기로 Policy가 바뀌었다.
그래서 이번 학기가 아니라 내년 학기에 들어갔으면 한다.
방금 보내준 내 입학허가를 내년으로 변경해 줄 수 있겠니?"  


이례적으로 바로 회신이 왔다.


"회사의 정책이 바뀌었다니 안타깝지만 연기는 불가하다.

과거에도 똑같은 사례들이 여러 번 있었는데 1년 사이에 변수들이 많다 보니

입학허가를 연기하는 것이 행정적인 복잡도를 크게 증가시켰다.

매년 경쟁률도 변화가 있어서 합격을 보장해 주기도 어렵고.

그래서 입학허가는 당해연도만 유효한 걸로 학교는 원칙을 세웠다. 

안타깝지만 학교의 결정을 존중해 달라. 미안하다."


절망적이었다.
내년에 지원해도 다시 된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년에 
똑같이 다시 지원을 한다는 게 반드시 필요할까 의문이 들었다.

난 학교에 다시 이메일을 썼다.


"학교에 그런 Policy가 있는 줄 몰랐다. 학교 입장은 충분히 이해했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다시 한번만 생각해보자.

난 보스턴을 사랑하고 MBA는 반드시 Sloan에서 해보고 싶었던 사람이다.

올 해도 Sloan 한 군데만 지원했다. 필요하다면 내년에도 또 그렇게 할 거다.

너희가 그 사이에 에세이 질문을 바꾸지 않는 한 난 똑같은 에세이를 다시 써야 할 것이고

너희도 똑같은 에세이를 읽고 다시 심사를 해야 할 텐데 그게 얼마나 비합리적이냐?

그러니 난 이번 상황에서는 입학허가를 연기해 주는 게
오히려 더 복잡도를 낮추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한 번만 다시 고려를 해봐 달라. 부탁한다."


"보스턴과 Sloan에 대한 로열티를 보여줘서 고맙다.

과거에도 그런 사례는 있었고 그 모든 걸 감안해서 우리도 Policy를 정한 거다.

너도 지금은 그렇게 말하지만 향후 1년 사이에 어떤 일이 생길지 장담할 수 없는 거다.

그러니 우리가 입학허가를 연기해 줄 수 없다는 걸 이해해 달라.

혹시 1년 뒤에도 네가 마음이 바뀌지 않아 다시 Sloan에 지원을 하게 된다면 알려달라.
그럼 그때 우리가 뭘 해줄 수 있는지 보겠다."

"잘 이해했다. 충분히 공정한 커멘트다. 나도 인정한다.

어쨌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대화였다고 생각한다.

올해 입학할 수 없어서 안타깝지만 Sloan 프로그램에 행운을 빌고

내년에 지원할 때 반드시 다시 연락하겠다. 성의껏 대답해 줘서 감사드린다."


그렇게 한 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연기를 받아내면 좋았겠지만
너무 계속 푸시하면 오히려 상황을 그르칠 것 같았다.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 했으니 후련했다.


그리고는 거의 9개월이 흘렀다.

10월 말이었던 것 같은데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싶을 때 MIT에서 이메일이 왔다.

이번에 Sloan Admission Office Director가 Asia를 돌다가 한국에 들르는데
잠깐 얼굴을 볼 수 있겠냐는 거였다.
당연히 만나러 가겠다고 하고 약속을 잡았다.

월요일 저녁 7시 어둑어둑할 무렵 약속장소인 남산 Hyatt 호텔로 찾아갔다.
알려준 장소로 찾아갔더니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알고 보니 한국인 Sloan 졸업생들 모임에 그분이 참석을 하신 거였다.
난 졸업생도 아닌데...
뻘쭘하게 서있다가 그 Admission Officer를 만났다.
그분이 다른 졸업생분들을 서로 소개해 주고 있었다.

"여기는 대한항공에서 근무했던 XX이고, Class of 1996입니다."
"이 쪽은 신한은행에서 근무하는 XX라고 하고, Class of 2003입니다."

그러면서 그분들께 나도 소개해 주었다.

"이 친구는 LG전자에 다니는 Jimmy Park이고, Class of 2011입니다."
"Class of 2011? 아 그럼... 내년에 학교 가시는군요. 축하드립니다. 부럽습니다.
이제 막 학교를 가려고 준비하는 지금이 제일 좋을 때죠. ㅎㅎㅎ"

그날 소개를 듣고 알았다.
아! 내 입학허가를 연기해 주기로 했구나. 
그 순간의 뛸듯이 기뻤던 기분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하지만 태연한 척, 운이 좀 좋았던 척... 차마 그 앞에서 내색은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난 Sloan에 갈 수 있었다.

처음 후보에 뽑힌 것부터
중간중간 예상치 못하게 발생했던 일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TOEFL 지원 시간이 늦어 Deadline을 못 맞출 것 같았을 때,
금융위기가 터져 갑자기 회사의 지원이 연기되었을 때,
입학허가 연기가 없는 걸로 Policy를 정했다고 회신을 받았을 때,
뭐 하나도 내가 예상대로 흘러갔던 건 없었고
그때마다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막막했다.
 
최대한 진정성을 가지고 부탁하고, 설득하고, 요청하고...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고
그걸 끝까지 다했다.
그리고는
운이 좋겠도, 운이 찾아왔다.


Sloan MBA에서 소중한 것들을 많이 배우고

세계 각지에서 온 보배 같은 친구들도 많이 만났지만

거기까지 가는 과정에서의 배움도 너무 값졌다.
인생 경험이었다.


(Sloan Alumni Night, Powered by DALL.E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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