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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 Sep 30. 2024

배낭여행이 낭만적이라고?

꼬질꼬질한 낭만을 쫓아서


버킷리스트를 적어오라고 하면
나는 늘 유럽 배낭여행을 적어오곤 했다.


버킷리스트의 10개의 항목 중 빠지는 일이 없던 단골 항목은 친구들과 함께하는 배낭여행이었다. 부모님과의 여행은 편하다. 코 묻은 돈을 받지 않겠다는 부모님의 자상함으로 금전적으로 편하기도 했지만, 무조건 호텔만을 고집했던 어머니 덕분에 신체적으로 편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몸도 마음도 고생을 안 하는 여행이었다.


그럼에도 버킷리스트를 적을 때쯤의 나는, 더 이상 편한 여행이 싫었다. 반골 기질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히 사춘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졸졸 부모님 뒤를 따라다니는 여행 대신 구르고 고생하고 그 안에서 배우고 성장하는 여행을 하고 싶었다. 오랫동안 스물의 자유를 상징했던, 그 ‘배낭여행'을 해가 지날수록 더욱더 원했다.


겁이 많아서 그런지 갓 대학에 입학하고는 여행을 혼자 떠날 생각조차 하지 못했지만, 그때로부터 몇 년 후 나는 의도치 않게 소원성취를 했다. 




교환학생 학기가 마치고 떠난 여행은
우연히 배낭여행이 되었다

 원해서 배낭여행을 했다기보다,
 어쩔 수 없이 배낭여행이 된 것이다.


학기가 끝났다. 학기가 끝나기 몇 주 전부터 여행계획을 세우는 바람이 교환학생들 사이에서 분다. 에세이를 써야 할 시간을 쪼개 우리는 따듯한 휴양지,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갈 계획을 야심 차게 세웠다. 종강까지의 시간은 바르셀로나의 가우디, 말라가의 바닷가, 세비야의 탭댄스가 울려 퍼지는 드넓은 광장을 상상하며 금세 지나갔다.


2주간의 긴 포르투갈과 스페인 여행은 짐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변덕스러운 남부 유럽의 5월은 외투를 필요로 했으며, 바닷가의 로망으로 수영복도 챙겨야 했다. 체크리스트 속 짐은 점차 늘어났다. 한 여름이 아닌 유럽 여행 준비에는 캐리어가 필수였다.



악명 높다는 라이언에어는 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의 단골 항공사였다. 유럽의 저가 항공사는 항상 캐리어 추가가 별도이다. 26유로 특가로 구입한 비행기 표의 캐리어 추가 금액은, 표값과 엇비슷한 20유로. 그렇게 초반에 캐리어를 들고 가자는 포부는 캐리어 추가 금액을 확인하자마자 무너졌다. 이미 환전한 돈을 탈탈 털어 쓴 막바지 교환학생들은 늘 쪼달렸고, "캐리어는 여행할 때 끌고 다니기 어려워"라는 핑계를 대며 모두의 합의하에 배낭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배낭 하나와 보조백 하나로 여행을 떠난다고 말했더니, 친구는 고생스럽지 않겠냐고 걱정을 한다. 이때까지 나는 그럼에도 배낭여행이라는 로망에 차 있었다. 청춘의 낭만, 배낭여행이라는 단어에 빠져있었다. 난 절대로 안 낀다는 친구의 말을 그대로 무시한 채, 구글맵 맛집을 하나둘씩 저장하며 행복해했다. 무거운 짐에 대한 우려는 잠깐씩 튀어나왔지만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괜찮았다. 낭만이라는 단어 뒤에 모든 근심걱정들은 숨겨졌다.




짐을 싸는 순간부터 여행의 시작을 실감하게 된다. 떠나기 직전, 여행지에서 필요한 물품들을 선별하고 챙기는 설레는 의식이다.


배낭여행의 짐 싸기는 조금 달랐다. 배낭에 다 넣는 게 불가능해 보였던, 모든 살림살이들을 최대한으로 힘을 써서 욱여넣는 과정이었다. 공항으로 떠나기 직전날, 오후 9시부터 짐을 싸기 시작해 밤이 어둑해질 때쯤 최종 체크를 마쳤다. 이마에 땀이 맺힐 때까지 짐과 씨름을 한 것이다. 압축팩을 주먹으로 때리고 손으로 말고 막판에는 발로 밟았다. 샴푸와 비누까지 비닐백에 넣어 밀봉을 시킨 그제야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포르투갈로 떠나기 전 악몽을 꾸었다. 시험 보기 전에나 꾸는 찝찝하고 기분 나쁜 꿈이었다. 새벽 6시 반에 혹여나 못 일어날까 알람을 일곱 개를 10분 단위로 맞춰놓고 잤기 때문일까. 늦게 깨서 비행기를 못 타면 어쩌나 걱정을 했더니, 뒤늦게 합류하여 비행기를 놓치는 꿈으로 새벽 내내 끙끙거렸다. 세 번째 알람을 들었던가, 머리는 누가 때린 듯이 멍한 채 벌떡 깨고 시간을 확인했다.



06:40, 아직 안전한 시간.



대충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린 뒤 꺼내 놓은 옷을 입는다. 아마존에서 구입한, 라이언에어의 수하물 규정에 딱 들어맞는 30X20X40 배낭을 매자 잠시 몸이 휘청거린다. 보조백까지 어깨에 걸치니 생각이 많아진다. 캐리어를 끌고 다닐 때가 편했구나 그제야 깨달았다. 추가금을 최소화 함에 따른 대가였다. 물론 여행을 하면서 배낭여행의 불편함은 몇 번이나 불현듯 깨달았기에, 이때가 첫 깨달음일 뿐이다.


화장실 스위치, 드라이기 콘센트, 전기담요 스위치 전부를 여러 번 확인한 뒤, 열쇠를 두 번 반을 돌리고 혼자 남겨질 새까만 내 기숙사 방에게 인사를 건넨다.


진짜 배낭여행의 시작이다.


추가금을 피하기 위해 구입한... 라이언에어 규정에 꼭 맞는 거대한 나의 배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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