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수물소리에 이른 시간에 잠에서 깼다. 오전 6시,
해 뜬 지 오래된 시간이지만 안개와 비구름이 잔뜩 끼인 탓에 주변은 온통 가스로 가득 찬 느낌이다.
간밤에 내린 비 때문인지 엊그제 깎은 잔디는 주변과 대조적으로 저 혼자 푸른빛을 뽐내고 있다.
잔디는 깎은 지 2-3일 될 때가 제일 보기가 좋다. 깎은 당일에는 잔디 깎기 기계가 지난 흔적도 그대로 남아있고 허리가 잘린 상처 때문인지 풀이 죽어 있지만 이틀 정도 밤을 지나면서 이슬을 머금고 다시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그래서 잔디 깎은 오후에는 보통 물을 뿌려주기도 한다. 요즘은 장마철이라 물을 뿌릴 필요가 없고 2-3일 동안 적당한 비가 내려서 최상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중고등학교 때 머리를 깎았을 때도 며칠 지나야 적당하게 머리가 자라서 보기가 좋아질 때와 똑같다.
나는 중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머리를 까까머리로 깎아 본 적이 없이 항상 소위 ‘하이칼라‘머리로 길게 길렀다. 그 무렵 내 또래 아이들은 대부분 머리를 짧게 깎았다. 아이들까지 이발관에 갈 형편이 안되니 이웃에 있던 ’바리깡’으로 그냥 밀거나 간혹 이발관에 가더라도 빡빡 깎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렇지만 나는 막내였고 큰 형이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집안이었으므로 어머니는 금곡면에 있는 오일장에 갈 때 중간지점에 있는 오서리 이발관에서 내 머리를 ‘하이칼라’로 깎아 주었다. 나도 머리를 빡빡 깎는 것을 싫어했고 너무 짧지 않게 잘라 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우리 집 형편이 좋아서 내가 머리를 하이칼라로 깎은 것은 아니다. 다들 비슷비슷하게 어렵게 살고 있었지만 내 위의 형들은 큰 형을 제외하고는 전부 빡빡 깎았지만 나는 막내여서 어머니나 아버지가 좀 더 특별하게 나를 대해주었다. 돌아가신 내 바로 위 3살 차이 형도 국민학교 다닐 때 내내 빡빡머리로 다녔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4살 무렵에 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웠고 이미 국민학교 입학 전에 국민교육헌장을 한 자도 틀리지 않고 좔좔 욀 정도로 여서 부모님은 내게 특별하게 잘해주었던 것이다.
큰 형은 여자 친구를 만날 때면 어색한 분위기를 지우려고 그랬는지 나를 데리고 나가기도 하였고 누님은 몸이 약해서 병치레가 많은 나를 자주 업고 다녔다.
아주 어릴 때 기억인데, 오서리 이발관에서 이발을 하고 마지막에 앞머리를 가지런히 하기 위하여 눈을 감으로 해서 감고 났더니 내가 생각한 것보다 머리가 훨씬 짧아서 왜 이렇게 짧게 잘랐냐고 이발관 아저씨에게 항의를 했고 그 광경을 본 어머니는 식구들에게 그날의 소식을 전파하여 나는 어릴 때부터 자기주장이 강한 아이로 인식되었다.
중학교 들어가면서 모두 머리를 빡빡 깎았다. 나도 그때 처음 머리를 짧게 깎은 것이다. 나는 대부분은 빡빡 깎을 때에도 이발관에 가서 깎았는데 집에서 바리깡 기계로 형이 한두 번은 깎아주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바리깡도 전기식이 아니라 수동이어서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깎게 되면 고르게 되지 않아서 쥐 파막은 머리가 되기 일쑤였다. 내 또래 아이들은 청결하지 않은 녹슨 바리깡으로 머리를 깎은 탓인지 기계충이 생겨서 딱지나 진물이 난 채로 다니는 아이들도 꽤 있었다.
하긴 나도 까까머리로 깎기 전에는 긴 머리카락 안에 가끔 이가 생겨서 어머니가 잡아주기도 하였으니 위생상태가 좋지 않은 것은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때는 정말 이가 많았다. 머리를 자주 감지 않고 목욕이나 세탁도 거의 하지 않으니 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가려워서 긁다가 참지 못해 옷을 벗어서 이를 잡는 일은 겨울이면 늘 하는 일이었다. 살찐 이는 양쪽 엄지손톱으로 톡톡 눌러서 잡았고 이가 슬어 놓은 솔깃에 붙어 있는 알들도 손톱으로 눌러서 잡았다.
참 힘든 시절의 이야기이다. 도시에서 자란 내 또래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들을 잘 모른다. 집사람도 대구에서 자라서 이런 광경은 본 적이 없다고 하고 장인어른 정도의 연배가 되는 사람이 겪은 시절 이야기라고 하면서 흑백 영화에나 나올 법한 광경이라고 의아해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았다.
잔디를 깎고 났더니 머리 깎은 옛날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