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오늘도 저녁은 라면으로 먹었다. 영하 10도의 바깥 날씨에 잠시 현관 앞만 나갔다가 금방 들어왔으므로 추위를 체험했다고는 볼 수 없지만 이렇게 추운 날에는 자연스레 맑은 국물의 칼칼한 맛이 당겨지는 법이다. 이럴 때 나가사키 짬뽕라면이 제격이다. 사실 일주일째 혼자 강화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이틀을 제외하고는 저녁은 전부 라면을 끓여 먹었다. 이상하게 나는 라면이 질리지 않는다. 지인들 중에는 라면에 대한 극혐 주의자들이 많고 그렇게 몸에 나쁜 것을 왜 먹냐고 하면서 자주 라면을 먹는 나를 불쌍하게 보는 사람도 꽤 있다. 라면 먹으면 금방 병에 걸리기라도 하는 나쁜 식품으로 취급하는 사람 중에 집사람도 있다. 라면 먹지 말고 밥을 해 먹어라고 몇 차례 당부하기도 한다. 내가 즐겨 먹는 햇반도 먹지 마라고 한다. 이해하기 어렵다. 수십 년 동안, 굉장히 큰 대기업에서 만들어온 가장 대중적 식품인 그 라면, 햇반이 몸에 나쁠 리가 있나?
내가 처음 라면을 맛본 것은 국민학교 2학년 무렵이다. 내가 자란 마을은 30호 정도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마을이어서 가게가 없고 라면, 담배 등 간단한 물건들을 마을 부녀회에서 판매하였는데 그 무렵에는 아주 귀한 음식이 라면이었다. 라면의 종류도 지금처럼 많지 않았고 내 기억에는 소고기라면밖에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국민학교의 담임선생들은 가정방문이라고 하여 그 반 학생들의 집을 찾아서 생활환경 등을 살펴보는 일이 일 년에 1-2차례 있었다. 그 시절 그 무렵에는 가정방문으로 집을 찾아오는 학교 선생님은 엄청 큰 손님이었다. 보통의 시골 농가에서는 엄청 바빠서 논밭에 나가 일을 하여야 하기 때문에 집을 잘 비우므로 가정방문이 제대로 안되거나 이런 큰 손님을 치르는 것이 어려워서 일부러 집을 비우고 선생님 보는 것을 피하는 것이 보통의 가정이었다. 그래도 우리 집은 아버지가 육성회 이사를 하시고 어머니가 어머니회 회장을 하셔서 그렇게 할 수는 없고 어머니는 선생님들을 크게 반겼다. 그러나 반긴다고 하지만 대접할 음식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머니와 작은 어머니는 선생님 대접을 위하여 부녀회장 집에서 라면을 사 와서 삶고 닭장에 있던 갓 낳은 날계란을 선생님에게 내어놓는다. 당시 할 수 있는 최고의 대접이다. 라면에 계란을 넣을 줄도 당시에는 몰랐었다. 그냥 라면만 삶아내어도 융숭한 대접이고 갓 낳은 따뜻한 계란은 그대로도 요기가 된다고 생각했다. 나와 사촌 누나는 같은 학년이어서 어머니와 작은 어머니가 함께 선생님을 맞이했던 것이다. 당시에 라면은 그렇게 대접받았던 것이다.
라면이 맛이 없었던 것은 고등학교 매점에서 종종 사 먹던 라면과 군대에서 일요일 아침에 배식되는 라면이었다. 고등학교 때에는 아침 7시까지 등교를 해야 했고 나는 학교에서 꽤 먼 시골지역에서 통학을 하였으므로 5-6시에는 집을 나섰고 어머니가 따끈한 아침을 차려 주었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라 먹는 둥 마는 둥 등교하면 항상 배가 고파서 매점에서 100원을 주고 라면을 사 먹었다. 20원을 더 주면 계란까지 추가해서 끓여준다. 그러나 그 라면은 한꺼번에 수십 명이 몰리는 매점이어서 주인이 미리 삶은 면을 냄비에 담아두었다가 학생들이 오면 따뜻한 국물을 부어주는 것인데 면이 푹 퍼져있어 정말 맛이 없다. 그래도 배가 고프니 먹어야 했다. 사실 그 라면도 매일 먹을 수는 없다. 왕복 차비와 라면값을 합하여 500원 정도를 가지고 등교를 하는 시절이었으니 다 그랬다.
대학 1학년을 마치고 여름에 군에 입대하였는데 지금도 그 훈련소의 첫 라면은 잊을 수 없다. 춘천의 103 보충대에서 2사단 훈련소로 배치받아 토요일 저녁 무렵에 춘천 소양호에서 배를 타고 강원도 양구군 남면의 2사단 훈련소에 도착해서 정신없이 보내다가 점호를 받고 잠을 잔 후 일요일 첫 기상나팔과 함께 연병장에서 선착순 뺑뺑이를 수없이 돌다 보면 거의 실신 직전이다. 그렇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한계를 느낄 때쯤에 아침식사로 라면을 배식받았는데 받아서 식탁에 앉는 순간 구역질이 올라왔다. 입대한 지 4일 차이고 뺑뺑이를 돌았으니 시장해서 뭣이라도 맛있을 법한데 심하게 불어 튼 데다가 물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새끼손가락 굵기의 떡진 라면을 보고 구역질이 난 것이다. 때마침 옆 식탁에 있던 조교에게 그 광경을 들키고 말았다. 사제(私制)밥 먹다가 라면 먹으려니 구역질이 나냐고 또 혼났다.
그러다가 라면이 맛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영월지청장으로 혼자 내려가서 가끔 라면으로 저녁을 관사에서 혼자 먹을 때가 있었는데 그때 라면과 햇반이 정말 맛있고 편리한 식품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 후 서울에서도 가끔은 퇴근 후에 출출할 때 라면이 생각나기도 했으나 집사람은 몸에 안 좋다고 잘 안 끓여주고 다른 것을 먹기를 원했는데 집사람 없을 때 딸아이와 라면 끓여 먹자고 공모해서 함께 끓여서 나눠먹을 때 정말 맛이 좋았다.
라면은 정말 잘 만든 인스턴트식품이다. 얼큰한 국물 맛과 쫄깃한 면발을 절묘하게 만들었다. 사실 일본 여행을 몇 차례 가서 제법 유명한 라멘집을 갔었지만 내 입맛에 맞는 라면을 찾을 수 없었고 짜고 이상한 느낌의 면발맛에 입맛을 버려서 편의점에서 한국 컵라면으로 입맛을 달래기도 하였다. 지금은 라면의 종류도 정말 다양하고 맛도 여러 가지여서 기호에 따라 선택의 폭도 매우 넓다. 한 때는 신라면 블랙만을 고집할 때도 있었다. 그 라면은 가격도 훨씬 비쌌는데 국물맛이 진하고 약간 끈적한 것이 매운 설렁탕 먹는 느낌이다. 요즘은 오히려 신라면 건면, 진라면, 삼양라면, 안성탕면 등을 즐겨 먹는다. 나는 라면을 끓일 때 스프를 먼저 넣고 물을 끓이고 때로는 처음부터 스프와 면을 넣고 끓이기도 한다. 라면 봉지에 적힌 조리법대로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 시간이 여유로울 때는 끓는 물에 면을 삶아 기름기를 뺀 다음에 온갖 야채를 넣고 여기에 냉장고 있던 표고버섯이나 다시마 1조각을 넣기도 하고, 배추 잎 몇 잎을 넣으면 국물 맛이 더욱 시원하다. 영양을 생각해서 계란을 넣기도 하는데 노른자를 터뜨리지 않고 그대로 익혀 먹을 때가 많다. 노른자를 풀어서 넣거나 노른자를 터뜨려 버리면 계란 맛에 라면 고유의 국물맛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라면 국물에 버섯이며 온갖 야채를 넣고 여기에 한 두 방울의 멸치액젓을 넣어주면 금상첨화다. 앞으로도 라면은 계속 먹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