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아줌마
어제 집사람과 가요 경연 프로그램을 보느라 밤 12시가 넘은 시간에 잠자리에 들어 늦잠을 잤다. 햇살은 좋은데 아직 춥다. 오늘이 금요일인데 주말에는 아침기온이 영하로 내려간다고 한다. 3월 날씨가 추울 수도 있지만 꽃씨를 뿌리고 화단을 가꾸어야 하는 내게는 유난히 봄이 더디게 오는 것 같다. 남쪽 지방에는 벌써 매화가 만개하고 봄이 너무 빨리 와서 봄꽃 축제를 한다고 하는데 이곳 강화도가 그렇게 북쪽 지방인지, 한반도가 그렇게 넓은 지역인지?
뾰족이 새순이 돋은 튤립의 부직포를 벗겨서 햇살을 맞게 하고 이어서 집사람이 서울 아파트 정원의 화단에서 채취해 온 맥문동 씨앗을 물에 불려 껍질을 벗기고 말리는 작업을 하였다. 오늘은 다른 꽃씨들도 모종 트레이에 뿌려야 하는 등 할 일이 많다.
집사람은 맥문동의 사철 푸른 빛깔이 부러워 강화 정원에도 심고 싶어 하던 차에 마침 서울 아파트 화단에서 그냥 버려질 뻔한 맥문동 씨앗을 채취했다. 아파트 화단을 관리하는 정원사는 맥문동을 관리하지만 다 자란 큰 포기에서 열린 씨앗 열매는 채취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둔다. 집사람은 버리는 맥문동 열매를 채취하여 그 씨앗을 심으면 될 것 같아서 추운 날씨에도 제법 많은 씨앗을 채취하였다.
나는 유튜브를 검색하여 맥문동 씨앗을 심고 발아시키는 동영상을 몇 차례 보고 그대로 따라 해 보기로 했다. 우선 불려둔 씨앗을 물에 씻고 문질러서 껍질을 벗긴다. 껍질을 벗기는 이유는 그 껍질 속에 발아억제제가 들어있어서 그 껍질을 벗겨야 발아가 된다고 유튜버가 설명했다. 나는 총균쇠라는 책에서 수렵 채취인이 씨앗 껍질에 들어있는 발아억제 성분을 효과적으로 통제하여 야생식물을 작물화시키는 데 성공하게 되었다는 내용을 보고 씨앗의 껍질에 발아억제 메커니즘이 들어 있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유튜버가 이런 사실까지 잘 설명하니 정말 대단한 유튜버다.
예전에 아버지는 이 맘 때면 볍씨며 다른 씨앗들을 물에 불려 싹을 틔우고, 모판에 심는 농사일을 매번 하셨는데 그때 아버지로부터 발아억제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볍씨나 콩, 감자 등 여러 농작물들을 잘 키우고 가꾸어서 우리들을 먹여 살렸다.
이렇게 껍질을 벗긴 맥문동 씨앗을 햇볕에 말린 다음에 모종 트레이에 심었다. 집사람이 정성 들여 채취한 것이니 한 알의 씨앗도 허투루 할 수 없어서 모종 트레이 105곳의 구멍마다 3-4알씩 충실하게 심는다. 사철 푸른 맥문동이 정원 좌측의 에메랄드그린 나무 아래에서 씩씩하게 자라서 보라색 맥문동 꽃을 활짝 피울 날을 기대한다.
이어서, 모종 트레이에 상토를 담아서 물을 뿌린 다음 105구의 구멍마다 리빙스턴 데이지 꽃씨를 집사람으로 하여금 심게 하였더니 꽃씨 봉지를 개봉한 집사람이 경악을 한다. 데이지 씨앗 1 봉지에 든 1,000 립의 씨앗은 거의 먼지 수준이라 모종 트레이 각 구멍마다 씨앗을 제대로 심을 수가 없다. 내가 며칠 전에 알리선, 캘리포니아 블루벨을 파종했을 때의 황당함을 집사람도 경험한 것이다.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다고 하면서 잡히는 대로 트레이 구멍에 대충 씨앗을 뿌리고, 그보다도 좀 씨앗 크기가 큰 자운영도 모종 트레이에 뿌렸다. 지난번에 꽃씨를 뿌린 알리선은 아직 발아 소요일수가 되지 않아 정상 발아 여부를 알 수는 없으나 먼저 싹이 튼 캘리포니아 블루벨은 급하게 웃자라서 도저히 정상적인 모종이 되기 어려워 오늘 드디어 모종판을 갈아엎었다.
꽃씨를 발아시켜 화단에 옮겨 심고 꽃을 본다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임을 실감한다. 집사람은 모종트레이, 저면관수용 트레이, 각종 분무기, 씨앗, 상토 등 구매에 지출한 돈이면 화원에서 잘 핀 꽃 화분을 사서 정원에 가져다 두는 것이 훨씬 낫겠다고 혀를 찬다.
꽃씨를 뿌리는 것을 대충 마무리하고 집사람과 산책을 나섰다. 강화 둘레길을 따라 염하강 제방길과 숲길을 걷는데 우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어 정말 호젓했다. 차가운 날씨에 5,000보 정도 걸으니 볼도 얼얼하고 다리도 뻐근하다. 화도돈대 바로 옆편의점에서 크림빵 1개와 컵라면 1개를 사서 둘이 나눠 먹는데 꿀맛이다. 이런 날씨에는 역시 컵라면이 최고다.
집사람은 화장실을 가고 나는 편의점을 막 나오려던 차에 주인아주머니가 ‘어르신, 추운 날에 따님과 같이 산책 나오셨냐?’고 묻는다. 참 기가 막히다.
봄날에, 꽃샘추위에, 저 아주머니까지, 이래저래 심란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