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운 하루의 시작

by 고전을 마시다

엉성한 블라인드 틈으로 햇살이 비집고 들어와 남자는 눈을 떠야만 했다. 그는 언제나 잠에서 깨자마자 휴대폰 가장자리에 살짝 튀어나온 전원버튼을 눌렀다. 켜진 화면의 시각은 오전 7시 7분, 알람을 맞춰 논 7시 15분까지 8분 남았다. 그 어디에서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8분만 마저 잠들었다면 찌든 피로가 싹 사라졌을 텐데,

그새를 못 참고 일어나다니.

제발 단 하루만이라도 상쾌하게 시작하자.

부탁이다.’


그는 미리 깨어난 그 틈이 싫었다. 그 벌어진 사이에서 자그만 벌레들이 기어 나올 것만 같았다. 허비한 순간을 보상받듯 알람을 10분 뒤로 재설정했다. 하지만 끈적하고 불쾌한 기분은 이미 뇌 구석구석 뻗어나갔다.

이 정체 모를 물질들은 희한하게도 과거의 더러운 기억들만 콕콕 짚어내며 건드려댔다.

그의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돌변했다. 평소에는 한량이었고, 취하면 불량배였다. 땅! 하는 소리는 집안에서 펼쳐지는 짐승과의 술래잡기를 알리는 신호였다. 그 광폭한 놀이는 밤이고 낮이고, 심지어 아침에도 참가자들의 양해 따윈 구하지 않고 열렸다. 그래서 당시엔 어린아이였던 남자와 어머니는 늘 불안과 초조에 시달렸다.

폭군이 집안을 비운 동안 누릴 수 있던 평온함은 가여운 모자를 매번 배신했다. 늦은 새벽, 다급히 울리는 전화벨에 그들의 심장은 덜컥 내려앉았다. 그건 그의 아비가 어디선가 사고를 쳤다는 신호였다. 확실치는 않지만 그래서인지 남자의 휴대폰은 항상 진동 상태였고, 잠이 들 무렵에는 무음으로 바뀌었다.

자신을 멋대로 이 세상에 내놓은 남자에 대한 결론은 늘 같았다. 자신을 닮은 그 얼굴에 반드시 주먹을 내질렀어야 했다고. 나쁜 기억은 폭력과 앙갚음이란 구렁텅이를 만들어 남자를 강제로 밀어 넣었다. 자신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조롱하던 상사 멱살을 잡아 얼굴을 끌어당겨 이마로 콧등을 뭉게 버렸어야 했는데, 믿음을 배반한 동창 녀석의 뒤통수를 몽둥이로 후려갈겼어야 했는데, 피해자들은 몸져누워 식음을 전폐하건만 뻔뻔하게 밥을 처먹던 놈들의 입에 달궈진 숯을 쑤셔 넣었어야 했는데. 또, 또, 또.


진창을 연달아 건너다 보니 종국에 마주한건 절벽 낭떠러지에 걸터앉은 자신, 밀어버리고 싶을 정도의 꼴보기 싫은 나. 그는 과거에 목메어 괴로웠다. 그러다보니 그는 현재 자신의 목을 매다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떠올렸다. 최악의 전개, 피하고 싶은, 벗어나야만 하는, 그리만은 되서는 안 될, 정해진 노선.


남자는 다시 휴대폰을 낚아챘다. 알람 울리기 1분 전, 그는 다시 10분 뒤로 시간을 미뤘다. 그러나 지저분한 기억에 중독된 뇌는 그 타락의 맛으로부터 자력으로 빠져나올 의지를 잃었다. 똑같은 과정이 세 번이나 반복되고, 네 번째가 돼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더 이상 지체할 여유 따윈 없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그는 전신거울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전기면도기를 켰다. 윙윙거리며 돌아가는 면도날이 밤새 자라난 수염들을 꼼꼼히 밀었다. 이 정도면 말끔하다싶어다. 하지만 세면대 거울 앞에 서면 꼭 어디 한 군데 꼴사나운 털들이 몇 가닥 남아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입 가장자리나 턱에서부터 목으로 이어지는 굴곡이 단골자리였다. 의식하며 여러 차례 훑었지만, 결과는 같았다. 아무래도 잠이 덜 깬 통에 시력이 회복되지 않은 까닭이려니 했다.


베란다 창호를 그대로 떼다 설치한 미닫이 화장실 문을 열었다. 전기면도기 헤드 뚜껑을 열어 세면대에 탁탁 털어내니 검은 가루가 한 움큼이나 떨어져 나왔다. 벌써 몇 년째 그대로 써온 저 골동품을 언제 바꿔야 할까 잠시 고민하지만 그때뿐이었다. 전기플러그를 뽑아 서랍장으로 사용하는 냉장고를 열어 25킬로짜리 검은색 중량원판을 꺼냈다. 순간 방안은 고무냄새로 가득 찼다. 블라인드는 걷지 않은 채,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는 벌써 스물다섯 해째 똑같은 몸짓을 해댔다. 25분간 그는 자신의 몸을 반복적으로 움직였다. 밤새 에어컨이 틀어져 있어 방은 냉골이었는데도 온몸에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그제야 그는 수건 하나를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휴대폰을 찬장 구석에 두고 10분짜리 뉴스를 틀었다.


그에게는 샤워 순서도 정해져 있었다. 가장 먼저 비누로 손을 깨끗이 씻고, 샤워기를 벽에 꽂아 머리부터 물을 맞는다. 샴푸로 북적북적 거품이 일 때까지 머리카락을 헤집어 그대로 둔 다음, 비누채로 몸 구석구석을 닦아낸다. 그다음 칫솔질을 하며 동시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헹군다. 맨 마지막으로 손바닥에 세안제를 짜 비빈다음 부드러워진 액체를 얼굴에 문지른다. 그리고 샤워기 쪽으로 고개를 들어 씻어낸다. 그 김에 몸에 혹시 남아 있을지 모를 비눗기도 한 번 더 흘려보낸다.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어느 정도 털어낸 다음 몸을 닦아냈다.


화장실 문을 열자마자 갇혀있던 습기가 순식간에 퍼졌다. 주인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작은 방 물품 하나하나 위로 내리앉았다. 그는 팬티를 입은 다음 블라인드를 올려 환기를 시켰다. 얼굴에 로션을 듬뿍 바르고, 침대에 걸터앉아 오분가량 머리를 매만졌다. 바깥에서 얼마나 헤맬지 모르니 선크림도 필수였다. 그는 빡빡한 왁스를 찍어 앞머리를 들어 올리고, 옆머리를 눌렀다. 다시 손을 씻은 다음 향수를 손목과 뒷덜미, 가슴에 뿌렸다. 얇은 줄무늬 와이셔츠를 걸치고 검은 양말을 신었다. 짙은 회색 정장을 골라 입은 뒤 시계를 차고, 오른쪽 주머니에는 만년필을 왼쪽 주머니에는 클립형 지갑을 넣었다. 쓰지도 않을 오만 원짜리 지폐 여섯 장은 그대로였다. 방이 하도 좁아 발걸음을 옮기지 않고 몸뚱이만 이리저리 돌려도 다 해낼 수 있었다. 그는 갈색 로퍼를 신고 마침내 바깥으로 나섰다. 문을 열자마자 온도차로 인해 안경알에 성애가 가득 찼다. 그는 안경을 벗어 안쪽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넣었다.


그의 일터는 걸어서 채 15분이 걸리지 않았다. 회사 건물 앞 횡단보도 앞에 서서 손목시계를 봤다. 분침이 사십 이분에서 삼분 사이에 놓여 있었다. 도착 시간이 아슬아슬하긴 해도 지각을 하진 않았다. 그는 사무실이 있는 11층까지 계단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이미 책상 대부분엔 사람들이 들어찼다. 다들 분주하게 저마다의 일을 하고 있었다. 다들 뭘 그리 열심히 하고 있나, 뭣 때문에 저리 아등바등 살고 있을까. 그는 잠시 제자리에 서서 아련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봤다. 자신이 출근한 걸 어찌 알았는지 마부장이 개인 공간에서 요란스럽게 나왔다.


“오팀장님, 잠시 제 방으로 들어오세요.”


조환생명 특별조사 2팀 팀장, 오고절. 그가 눈꺼풀을 감자 시신경 끄트머리에 남아있던 따가운 피로가 감지됐다. 그는 예의를 차리기 위해 살그머니 문고리를 돌려 들어갔고, 굳이 몸을 돌려 조심스레 문을 꾹 닫았다. 행여 소리가 나 상사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노심초사하는 심경이 등에서부터 드러났다.


“부장님, 주말 잘 보내셨습니까?”


“바쁘니까 잡담은 됐고, 일단 앉아 봐요.”


오팀장은 알고 있었다. 그의 상사는 예의를 상당히 중요하게 여긴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마땅히 갖춰야 할 예절들을 나름 목록화하여 갖고 있을 정도다. 간밤의 안부를 묻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네, 부장님. 말씀하세요.”


오팀장은 미끄러지듯 슬며시 그의 상사에게로 바싹 다가가 앉았다.


“이 사람에게 전화해서 자초지종 잘 들은 다음 원칙에 맞게 오늘 중으로 처리하도록 하세요.

이 건은 내가 오팀장 위해서 특별히 배정하는 건이니까. 실망시키지 마시고.”


그는 조환생명이라고 옅게 프린트된 하얀 메모지에 전화번호를 휘갈겨 적은 다음 오팀장에게 건넸다.

오팀장은 귀한 전언이라도 되는듯 소중히 받아들였다.


“네, 감사합니다.”


더 물을 것도 따질 것도 없었다. 일단 전화해 보면 될 일이었다.


“혹시 더 하실 말씀 있으실까요?”


“아니에요. 얼른 나가서 일 보도록 하세요.”


남자는 지겨운 사무실에서 얼른 나갈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 어차피 가벼운 말 한마디 나눌 이조차 없었다. 사무실 말단에 자리 잡은 이름 모를 직원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다가오는 그를 보곤 파일철 하나를 서류꽂이에서 검지로 쓱 빼냈다. 오팀장은 펜을 들어 법인차 사용일지에 목적지와 사용처를 대충 적었다. 맨 오른쪽 끄트머리에는 이름과 서명을 남기고 담당자가 확인할 수 있도록 바로 펴놨다. 직원은 책상 밑 서랍에서 차키 하나를 꺼냈고, 이미 준비되어 있는 남자의 손바닥 위로 툭 가볍게 올려놨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네, 안전 운전하세요.”


메마른 대화가 겨우 오고 갔고, 남자는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갔다. 청량한 공기가 그의 몸을 감쌌다. 해방감에 그는 조금 들떴다. 차량이 어디에 주차되어 있는지를 안 물어본 게 불현듯 떠올랐다. 하지만 이제와 다시 들어가 묻기엔 실없어 보일 것만 같았다. 그래서 맨 아래층부터 차키의 열림 버튼을 눌러 위치를 파악하기로 마음먹었다. 복도를 끝까지 걸어가 비상계단 쪽 지하주차장으로 직행하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지하 5층부터 자신이 찾고 있는 차를 수색해 가며 한 층씩 올라갔다. 2층에 다다라 법인차량들이 주차되어 있는 쪽으로 버튼을 누르니 삐빅 하는 소리가 들렸다. 법인차량은 당연히 정해진 주차칸이 있었고, 거긴 언제나 이곳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늘 처음부터 끝까지 확인해야 직성이 풀렸기에 그대로 행했을 뿐이었다. 겉은 중형차였지만, 대부분의 기능이 날 것 그대로인 깡통차였다. 차문을 열자마자 찌든 담배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직전에 누가 사용했었는지 몰랐기에 그나마 불만이 구체화되려다 멈췄다. 시동을 켜 에어컨을 최대치로 틀고, 네 짝의 문을 활짝 열었다. 뒷 트렁크에 등을 기대 선 채 양발을 교차시켜 잠시 대기했다. 그는 눈을 감았고 여전히 가시지 않은 따끔거림을 온전히 느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누군가 공회전을 하면 안 된다고 지적할까 신경이 쓰였다. 남자는 차례로 문을 닫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재킷 안쪽 주머니에서 메모장을 꺼내 휴대전화로 번호를 눌렀다. 혹시나 통화이력이 남아 있을까 싶었는데, 처음 찍는 숫자였다. 녹색 전화표시를 눌러 신호가 떨어지자 스피커로 전환했다.


“여보세요?”


상당히 감이 먼 소리가 들려왔다. 나이 든 남자였다. 적게 잡아도 60대 중후반.


“안녕하세요. 마부장님 지시로 전화드렸습니다. 마부장님 아시죠?”


“누구라고요? 누구? 누굴 찾어요? 난 몰라.”


발음이 새는 걸로 보아 이가 고르지 않거나 빠져 있는 것이다. 전화 속 상대방의 노년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 짐작했다. 만만치 않은 고객이란 예감이 팍 하고 스쳤다. 고절의 경험상 잃을 게 없는 류의 사람과 이성적인 대화로 뭔가를 해결하리란 현실적으로 무리였다. 순탄치 않을 하루가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마용성 부장님이요. 조환생명 사고조사본부요.”


“아니 글쎄, 난 모른다니까. 그쪽은 누구요? 어디서 전화 건 거요?”


뻔히 아는데도 모르쇠로 잡아떼는 꼴이라니, 앞으로 어떤 협상이 펼쳐질지 모르겠지만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어 가려는 상대 의도대로 호락호락 넘어가 줄 오팀장이 아니었다.


“왜 그러십니까. 보험 관련된 일로 전화드렸습니다.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시죠. 선생님 계신 곳이 어디십니까?”


오팀장은 목소리가 앳된 편이었다. 그래서 늘 만나서 이야기하는 편이 잘 통했다.


“찾아온다고? 여기가 어디냐면 행수도 굴진면이고 불암리 청수마을 입구에서 ·····.”


남자는 스피커를 껐다. 들을수록 이상했다. 족히 네 시간은 걸릴 지역, 그것도 배 타고 들어가야 할 섬으로 찾아가 일을 처리하라고 하다니 마부장이 아무리 배려 없는 상사라 할지라도 적어도 셈은 빠른 사람이었다.


“아무래도 제가 전화를 잘못 드린 거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뭐라고요? 그래서 온 다는 거.”


남자는 뚝하고 통화를 종료했다. 메모장의 숫자와 통화목록에 찍힌 번호를 대조해 봤다. 아뿔싸 중간에 36을 63으로 찍은 것이었다. 손가락을 곧게 세워 화면을 제대로 찍고 녹색 버튼을 눌렀다.


‘지금 거신 번호는 고객님의 요청으로 통화가 제한되어.’


“아 대체 뭐 하자는 거야.”


남자는 마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부장님. 아까 주신 전화번호 말인데요. 수신이 정지되었다고 하는데요.”


“뭐라고? 그럴 리가 없지. 내가 아침에도 분명 통화했는데 뭔 소리야. 잡도 공업사 한사장이 왜 전화를 안 받아. 제대로 건 거 맞아?”


“네? 한사장이요? 한사장 번호는 제가 알고 있는데, 적어주신 건 전혀 모르는 번호라서요.”


“이 사람이 뭔 소리야. 내가 제대로 적어 줬더니만 헛소릴 하고 있어.”


“아닙니다. 제가 한사장에게 전화해 보겠습니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마부장은 매몰차게 전화를 끊었다. 아무래도 회의 중이었던 모양이다.

오팀장님 한사장에게 연락했다.


“한사장님, 저 오고절입니다. 마부장님이 전화 걸어보라고 하셔서요. 무슨 일입니까?”


“안녕하세요. 오팀장님, 아니 다른 게 아니라 오늘 새벽에 내가 가로수를 들이받은 차 한 대를 끌고 왔는데, 운전자가 아무리 봐도 음주 상태였단 말이지. 젊은 친구가 딱해 보이기도 해서 그냥 모른 체하고 넘어가려 했는데 알고 보니 조환쪽에 가입했었더라고. 그러니 내가 넘어갈 수가 있나? 마부장님에게 딱 제보했지.”


대충 들어봐도 상황이 파악됐다.


“사장님, 그래서 상대가 음주했다는 걸 입증할 녹취라도 있습니까?”


“거사람 참. 내가 하루 이틀 이 일 하나? 내 견인차에 있는 걸로 운전자를 조수석에 태운 다음 물어봤지.”


“일단 그 녹음파일 보내주시고요. 그 사람 번호랑 이름도 알려주세요.”


“그래 알겠어요. 아주 악질이야. 내가 애써서 차를 옮겨왔더니 아침에 지 이모부가 하는 공업사래나 뭐래나 암튼, 끌고 가버리더라고. 수리비가 못해도 팔구백은 나올 사이즈였어. 나나 되니까 그 정도지 지저분한데 들어가면 돈 천은 쉽게 깨질 텐데. 뭣하러 조환이 그런 부담을 떠안나? 그런 놈은 법의 심판을 받게 해야지.”


악감정이 서린 중년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그간 그의 행적은 분명 법이니 정의니 도덕과는 거리가 멀었다. 음주운전에 대한 협박은 아마 차 수리가 끝난 뒤 슬슬 시동을 걸 셈이었을 것이다. 따로 오십이나 백만 원 정도 웃돈을 받을 계획이었을텐데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자 원한을 품고 상대를 곤경에 빠뜨리려 한 것이다. 물론 여기서 떨어질 콩고물도 염두에 뒀을 테지만.


“알겠으니까, 보내주세요. 알아서 처리하고 연락드릴게요.”


“아니, 오팀장. 말 참 이상하게 하네. 그 알아서 처리한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제대로 말을 마무리 지어야지. 나 원참.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건수를 잡았다 싶었는지 한사장이 선을 넘었다. 오팀장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한사장님, 지금 내 도움 받아서 일 쉽게 처리하려 한 거 아닙니까? 부탁을 하려거든 똑바로 해야지.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내가 한사장님에게 이래라저래라 들을 자립니까?”


남자는 순식간에 싸늘함을 내비쳤다.


“아이고, 우리 오팀장님. 아침에 뭐 안 좋은 일 있으셨나. 지금 바로 보낼 테니까. 잘 좀 부탁해요.”


“네, 전화 끊습니다. 연락드릴게요.”


통화가 종료되자마자 진동이 부르르하며 연달아 울렸다.

이름을 확인한 뒤 보내 진 숫자를 그대로 눌러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이정섭 씨 전화 맞죠? 조환생명 오고절이라 합니다. 오늘 새벽에 차 사고 나셨죠? 그 건으로 몇 가지 확인할 게 있어서요. 지금 걸린 번호로 위치 남겨주시면 제가 그쪽으로 가서 다시 연락드릴게요.”


“아, 제가 지금 회사여 가지고. 만나 뵙기가 어려울 수 있을 거 같아서.”


“지금 무슨 상황인지 모르고 하는 말 같은데, 위치 안 찍으시면 저는 그냥 경찰서로 갑니다.”


오팀장은 뚝하고 전화를 끊은 다음 문자로 자신의 명함을 이정섭에게 보냈다. 답변은 곧장 날아들었다. 외곽에 있는 한 산업단지 주소가 남겨졌다. 내비게이션을 찍어보니 40분 정도 걸리는 것으로 나왔다. 그는 시동을 켠 뒤, 남성 합창단이 부르는 '전쟁의 신'이라는 웅장한 음악을 틀었다. 그는 인생이 한 편의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때마다 상황과 기분에 어울리는 음악을 고르곤 했다. 반복되는 노래에 고절은 어느새 목적지 부근에 도착했다.


커다란 정육면체 건물에 중소 규모의 기업들이 빼곡히 들어섰다. 셀 수 없이 박힌 작은 창문들은 가식적이고, 형식적이며, 기만적이었다. 닭장에 벌어진 틈과 다르지 않았다. 신호등에 사로 잡힌 사이 짧은 감상을 마치고 주차장 입구로 들어갔다. 지하와 지상으로 나뉜 양갈래에서 지상을 택했다. 최대한 덜 붐비는 공간에 차를 세우고 싶기도 했고,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까지 가고 싶기도 했다.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층에 다다랐지만 여유가 많지 않았다. 내키지 않았지만 차와 차 사이로 후진 주차했다. 양측에 공간을 공평하게 남기려 했으나 역시나 자신이 내리는 쪽에 일이십 센티의 공간을 더 확보했다. 문을 열기 전에 차량 블루투스를 끄고 이정섭에게 전화를 했다. 신호가 꽤 흘렀지만 받지 않았다. 통화를 종료하고 차밖으로 나섰다. 바닥은 녹색 방수처리가 되어 있어 밑창이 탁탁 걸렸다. 괜스레 짜증이 밀려왔다. 세상일은 수월하게 풀리면 누군가 어디 덧나는 걸까? 왜 꼭 한 번씩 더 확인해야 하고, 두 번 말하게 만들고, 전화를 서로 번갈아가면서 해야 하는 걸까? 그는 본능적으로 건물의 계단을 찾아 옥상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문은 열려 있었다. 그는 사무실에서 챙겨 온 필라민트 5mm를 주머니에서 꺼내, 한 개비를 살짝 깨물어 갑에서 빼냈다. 담뱃잎과 필터 사이의 볼을 질겅하고 씹으니 톡 하는 소리와 함께 화사한 향이 입안으로 순식간에 퍼졌다. 살짝 고개를 틀어 노란색 라이터를 켠 다음 불을 붙였다. 치이익 하며 타오르는 궐련이 마음에 여유를 선물했다. 애연가들에 따르면 그가 피우는 담배는 거짓, 즉 입담배였다. 남들은 연기를 폐까지 빨아들인 다음 순환시켜 코와 입으로 동시에 하얀 구름을 뱉어냈다. 그도 시도는 해봤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기침이 너무 심하게 나왔고 또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에게 담배는 그냥 깊은 한숨의 대용품이었다. 주변마저 기운 빠지게 만드는 긴 탄식 대신 몸속의 스트레스를 내보낸다는 목적으로 연기를 입에 머금었다가 뿜었다. 최대한 길고 진하게. 그에게 처음 담배를 알려준 건 대학교 1학년 때 만난 여선배였다. 전도연의 찡끗 웃는 모습을 닮은 그녀. 잠시 기억에 빠지려던 찰나. 안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네, 조환생명 오고절입니다.”


“제가 회의 중이라 전화를 받지 못했습니다. 지금 어디신가요? 도착하셨을까요?”


“네, 알려주신 지식산업단지 B동 옥상에 있습니다. 이쪽으로 올라오시죠. 제가 사무실로 찾아가거나 밖으로 나가는 건 괜히 번거로울 거 같으니.”


“지금 올라가겠습니다.”


남자는 전화를 뚝 끊었다. 언짢음이 전화기 너머로도 똑똑히 전해졌다.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구먼, 화내야 할 때 숙여야 할 때도 분간 짓지 못하다니. 이런 건 부모들이 가르쳐줘야 하는데 말이야.’


담배 한 대를 더 꼬나물고 있으니, 키가 훤칠한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목구비도 뚜렷하고 몸도 탄탄해 보였다. 딱 봐도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을 것 같았다. 근데 회사에서 이쁨 받을 타입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청바지는 그렇다 쳐도 딱 달라붙은 브이넥은 일보다는 이성을 유혹하는데 어울림직 했다. 새벽에도 어떤 상황이었을지 자초지종을 듣지 않아도 대충 감이 왔다. 오고절 팀장은 남자를 보는 대신 바깥을 내려다봤다. 남자도 눈치가 있는지 그의 옆에 쭈뼛쭈뼛 대며 다가왔다. 약 10여 초 간 입에 문 담배를 말없이 태웠다. 허리를 숙여 담배를 끈 다음 꽁초는 이전 것과 가지런히 난간 위로 올려놨다. 그리곤 난데없이 상대를 보고 생긋 웃더니 명함케이스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상대에게 건넸다.


“전화드린 오고절입니다. 바쁘실 텐데 올라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혀 고마운 마음은 없었지만, 세상 모든 일은 예의라는 형식을 갖춤으로써 시작되는 법이다. 심지어 그게 협박일지라도. 남자도 주머니에서 구겨진 명함을 꺼내길래 거절의 손짓을 건넨 다음 말을 이었다.


“담배 피우시나요?”


그러곤 갑을 상대 쪽으로 열어보였다. 남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제가 담배를 안 피워서요.”


“그럼 저만 한 대 더 태우겠습니다.”


그러곤 다시 한번 라이터를 켜 불을 붙였다. 다시 오고절은 남자에게 침묵을 강제로 권했다.


“새벽에 가로수를 들이받으셨다고요. 어쩌다가 그런 사고를 내셨습니까? 뭐라도 갑자기 튀어나온 겁니까?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너무 직진으로만 쭉 뻗은 흔적뿐이라. 상황 설명 좀 해주시죠.”


남자의 두 손은 어느새 공손히 앞으로 모여 있었고, 입은 우물쭈물 해댔다. 인물이 아깝게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오고절은 어린 친구에게 괜히 못할 짓을 하는 것 같아 그만두기로 했다.


“이정섭 씨, 술 마셨죠?”


남자는 눈을 있는 대로 크게 뜨고, 입을 벌렸다. 손은 사시나무 떨 듯 바들거렸다.


“잘 아시겠지만, 보험 약관상 음주 같은 중대한 과실은 보장받지 못해요. 그래도 천만다행 아닙니까? 어떤 상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경찰에게 걸렸으면 아마 형사처벌을 피하긴 어려웠을 텐데 그나마 최악은 면한 거죠. 거기다 이렇게 두 다리로 멀쩡히 돌아다니시고. 인생 큰 경험 했다 생각하고, 그냥 돈으로 때우시면 됩니다. 그럼 지금부터 녹음 들어갈 테니까 솔직히 얘기하시고 얼른 끝내시죠.”


오고절을 남자의 눈도 마주치지 않고 바깥만 바라보면서 말을 마쳤고, 휴대폰의 녹음 기능을 켜는 시늉을 했다.


“제가 음주를 했다는 증거가 혹시 있을까요?”


‘이 자식 회의를 한 게 아니라 조사관 질문에 대응하는 방법을 어설프게 찾느라 시간을 끈 거고만. 하긴 네깟 놈이 무슨 회의에 열중 했겠냐. 근데 틀렸다. 일단 음주 운전이 아녔다고부터 답했어야지. 하긴 어차피 금세 꼬리 내렸겠지만.’


오고절은 아까 공업사 한사장에게 전달 받은 파일을 재생했다.


- 저기요. 이거 봐요. 정신 차려보세요. 아니 술을 얼마나 마셨길래 이 모양이 됐대. 술 드셨죠? 술 마신 거 맞죠?

- 네, 조금 마셨습니다.

- 에이 조금 마셔서는 이렇게 취할 수가 없는데, 소주 두 병 마셨어요? 그 정도로 이렇게까지 취한 거예요?

- 아니, 네 병은 마셨겠지. 아 잘 몰라.


오고절은 말없이 녹음파일을 중지시켰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그날 취해서 기억이 잘 나질 않습니다.”


“아 됐어요. 나는 그냥 보험 처리 안 할 근거만 찾으면 되니까, 나에게 죄송할 거 없습니다. 공업사 말 들어보니까 차가 완전 반파 됐고, 가로수도 부러졌다네요. 한 천 삼백만 원이면 되지 않겠어요? 어쨌건 음주운전 인정 하시는 거죠?”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제가 진짜 돈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제발 한 사람 살리신다 셈 치고 어떻게 안 될까요? 부탁드립니다.”


“아니 이게 무슨 다른 방법이 있겠어요. 저도 회사원인데 규정과 원칙에 따라야죠. 눈 감아줬다가는 저 잘려요. 그런 말 마세요.”


“저 진짜 파산 직전이에요. 천만 원 제게 엄청 큰돈입니다. 살려주세요.”


‘그렇게 절박한 놈이 외제차 뽑고 음주 운전해서 그리 큰 사고를 내냐. 넌 지금 이 순간을 넘겨도 다시 크게 사고 칠 놈이다.’


오고절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면서 휴대폰을 두어 번 흔들더니 뒤돌아섰다.


“이제 가서 보고서만 쓰면 끝납니다. 다신 볼 일 없을 겁니다. 오늘 하루 잘 마무리하세요.”


“아 제발.....”


그는 출구를 향해 몇 발자국 걷다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정섭은 갑자기 울린 전화에 화들짝 놀랐다. 오고절은 다시 뒤돌아서 손을 내밀었다. 벨은 여전히 울리고 있었다. 남자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오고절은 매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전화기, 받지 말고 내놔.”


남자는 얼떨결에 휴대폰을 오고절에게 넘겼다. 오고절은 통화를 종료하고 남자 것의 화면을 켰다. 녹음되고 있었다. 정지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상대에게 전화를 돌려줬다.


“지금 그 녹음파일 나에게 보내요.”


“죄송합니다. 제가 어찌 될지 몰라서, 경황도 없고, 혹시나 해서, 뭐 다른 뜻은 전혀 없었습니다.”


“시끄럽고 녹음파일 보내던 가 싫으면 내가 한 걸로 제출합니다.”


물론 오고절은 녹음 따윈 하지 않았다. 남자는 거의 땅바닥에 머리를 닿을 때까지 허리를 숙였다. 그의 사과는 진심이었다. 그러나 그 미안함은 자신이 아니라 깨질 돈에 대한 것이었다.


“지워요.”


“네? 어떤 걸....?”


“당신이 녹음한 거 지우라고, 다른 방법 알려달라며.”


“아, 네네 감사합니다.”


남자는 휴대폰을 조작했다.


“내가 보이는 앞에서 지워.”


남자는 화면을 오고절이 보이도록 한 채 저장파일을 지웠다. 어차피 고절에게 불리할 대화 따윈 없었으나 앞으로의 흐름이 그가 시키는 대로 흘러가야 한다고 상대에게 각인시키려 한 행동이다. 남자의 얼굴에 어느 정도 안도감이 맴돌았다.


“육백만 원 마련할 수 있겠어요?”


“네? 갑자기 그렇게 큰돈을 어떻게.....?”


“내가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고, 오후 세시까지 근처에 있을 테니까 연락해요. 그리고 차 에먼데 갖다 맡겨서 서로 곤란하게 하지 말고 처음 공업사 사장한테 연락해서 실어가라고 하고.”


“지금 벌써 다른 공업사에게 수리 들어갔다고 하던데....?”


“토 다시는 거 보니.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보네요. 이따가 세시에 이 옥상으로 올라와 담배 피우고 있을 테니까 현금으로 뽑아 와요. 미리 준비되면 내게 전화 걸어도 되고, 분명히 말하지만 난 문자나 메신저는 못 봅니다. 똑똑히 기억해요. 두 번 말 안 합니다.”


오고절은 말을 마치자마자 옥상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계단으로 일층까지 곧장 내려갔다. 이마로 햇살이 내려쬐자 고개를 뒤로 꺾었다. 잠시 눈을 감고 어깨를 쭉 끌어모았다. 뚜뚝하는 소리에 몸이 개운했다. 두리번거리다 보니 햄버거 패스트푸드점이 보였다. 곧장 그곳으로 들어가 키오스크 앞에 섰다. 본격적으로 점심시간이 되려면 아직 삼십분이나 남았기에 내부는 비교적 한산했다. 법카 인정 범위인 만 이천 원 선에서 메뉴를 신중히 골랐다. 치킨버거 라지 세트 하나에 단품 버거 하나 추가. 딱 백 원이 남았다. 괜히 맞춰 주문한다고 시간을 보내느니 그냥 결제 버튼을 눌렀다. 주문번호를 들고 창가에 가 앉았다. 바깥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무 상관없는 이들이 어지럽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눈에 담는 건 무의미했지만, 그래도 휴대폰을 바라보며 식사하는 것보단 나았다. 홀로 식사할 때 휴대폰을 꺼내 놓지 않는 건 그만의 철칙이었다. 주머니에 넣기 전 그는 메시지 하나를 보냈다.


‘애기, 맘마 맘마?’


답을 바라고 보낸 건 아니었기에 얼른 주머니에 넣었다. 주문번호가 뜨는 알림판에 자신의 것이 떠오르자 픽업대로 가 표를 내고 음식을 받아왔다. 케첩을 하나 더 달라고 한 다음, 트레이 위 그나마 잉크가 덜 한 종이에 캐첩을 짜냈다. 시원한 콜라를 한 모금 들이키니 가슴에 체증이 다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눈 뜬 이후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겉은 바삭하면서도 속은 촉촉한 감자튀김 두 개를 가로로 집어 토마토소스에 듬뿍 찍었다. 언제 먹어도 고소하고 달콤하며 부드러웠다.


옛 선배에 대한 기억에 잠시 빠졌다.

그녀와 처음 만났던 시기는 분명했다. 대학교에 갓 들어온 신입생들을 가장 반갑게 맞이한 이학년들, 그 여럿 중 그 사람이 있었다. 오고절은 원래 무채색 인간이었다. 사람과의 교제가 활발하지도 않았으며, 인생을 딱히 즐길 줄도 몰랐다. 속마음을 충분히 표현할 만큼 말이 많지도, 이일 저 일에 크게 동요하지도 않았다. 마치 회색 세상의 분간 안 될 한 부분을 이루는 것만 같았다. 존재라는 표현이 무색할 만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 그의 삶에 세상이 컬러티브이라는 걸 일깨워 준 사람. 그녀에게 품은 감정은 이성에 대한 연정이라기보다 화려한 옷을 걸친 문명인을 처음 본 미개인의 동경이었다. 수 많은 사람들 틈에서도 빛이 났고, 어느 곳에서도 목소리가 카랑카랑 했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밝았고, 누구와 있더라도 잘 어울렸고, 저마다에게 즐거움을, 위로를, 안정을, 신비함을 각각 선사했다. 그녀와 함께한 사람들은 밤새도록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녀는 힐을 자주 신었다. 분명 매일 그렇진 않았을 텐데 그 시절에 관한 그의 기억은 그렇게 조각되어 있었다. 아직은 쌀쌀한 기운이 가시지 않은 봄, 이성과의 약속 따윈 없는 남자들끼리 밤마다 모였다. 하루는 누군가 그녀를 부르자고 제안했다. 그 시절은 문자로 통했다. 아마도 전화를 곧장 걸 용기 있는 자는 없었던 듯하다. 분명한 건 고절은 아니었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번호를 먼저 저장하는 습관이 들지 않았다. 어떤 기억할 만한 일이 있고 나서야 겨우 이름과 번호를 남겼다. 어쨌건 그녀는 사내들의 맘을 적당히 애태울 정도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문자로 화답했다. 우리가 어디서 울적하게 머무는지 물었고, 자신도 추한 모습이니 이해해 달라고 덧붙였다.


그날 그녀는 갓 소년티를 벗은 풋내기들에게 잊지 못할 웃음을 선사했다. 당시 유행하던 비닐 재질의 하얀 바지 운동복을 입고, 또각또각 하히힐, 어른스러운 백을 한쪽 어깨에 메고 나타났다. 그때 당시 고절은 무리의 뒤를 쫓아가고 있었다. 아슬아슬 걷는 그녀의 발걸음이 생생했다. 그 이후 일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별 시답지 않은 청춘들의 모습이지 않았을까?


오고절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을 내려다봤다. 어린 시절 아껴먹던 아이스크림을 냉장고에 넣듯이 소중한 추억에 대한 회상을 멈췄다. 그는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백 넘버의 해피엔드를 들으며 찬란했던 한 때의 여운을 마저 즐겼다. 충분히 만끽했다. 그리고 차에서 챙겨 온 책을 꺼내 들었다. 그는 원래 책을 한 권 선택하면 작가의 소개부터 발행일자까지 다 읽어야 직성이 풀렸다. 그러지 않고선 다른 것을 새롭게 펼치지 않았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바뀌었다. 집에서 읽는 책과 밖에서 읽을 것을 구분 지어 각기 장소에 비치해 뒀다. 그는 오늘 사무실에 있던 걸 챙겨 왔다.


- 변신 이야기 -

<슬픔과 고통은 사람을 강하게 하고 역경과 곤경은 사람을 창조적이게 하는 법이다.>

한 구절이 그에게 와닿았다. 손바닥을 책의 가운데 올려두고 잠시 초점 없이 창밖을 바라봤다.


'밀물처럼 닥쳐오는 이 시련들을 도대체 난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


오고절은 분주하게 돈을 마련하고 있을 이정섭을 떠올렸다. 그에게 타인은 관찰의 대상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녔다. 나름 시간이 빽빽이 채워지고 있을 무렵, 전화가 울렸다. 오늘 벌써 여러 번 본 뒷자리였다. 그는 받지 않은 채 부리나케 자리를 정리했다. 손에 들린 책이 거슬렸으나, 왠지 시간이 촉박할 것 같아 차에 들릴 순 없었다. 책을 허리 쪽 바지 안쪽으로 세워 넣었다. 서두른 덕에 그 자리에서 반가운 얼굴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이정섭은 거의 울 것만 같은 얼굴이었고 가만있질 못하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에게 다른 꿍꿍이가 들어설 여유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과감히 다가섰다.


“죄송합니다. 오백만 원밖에 구하지 못했어요. 이십 퍼센트짜리 이자를 물고 빌렸습니다. 제발 이걸로 봐주세요.”


‘일 년에 이십 퍼센트란 거 아냐? 한 달에 이십 퍼센트도 아니면서 뭘 그리 안절부절못해. 하긴 그러나 저러나 나완 상관없지만.’


“원래는 안 되는데, 한창 젊은 사람 실수 한 번 눈감아준 셈 칩시다. 보험처리는 그대로 될 테니까 안심해요. 더 이상 연락할 일 없을 겁니다. 이미 접수된 건으로 그대로 처리될 테니까. 아까 말한 대로 공업사에 차나 제때 갖다 줘요.”


그는 봉투를 뺏다시피 낚아채어 자리를 급히 떴다. 그 와중에도 누군가 지켜보진 않는지 사방을 샅샅이 살폈다. 뒷모습을 찍히지 않도록 남겨진 정섭을 뒤돌아 보며 계단으로 들어선 다음 발걸음을 재빠르게 옮겼다. 다행히 누구도 쫓아오지 않았다.


오고절은 차에 올라탔다. 시곗바늘은 오후 두시 삽십분을 가리켰다. 어디로 가야할지 딱히 떠오르지 않았으나, 얼른 그 건물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다소 거칠게 차를 몰았다. 출구에서 향할 수 있는 방향은 우회전뿐이었고, 곧장 따라온 왼쪽 차선의 차량 때문에 다시 우회전을 해야만 했다. 그는 그렇게 원치 않은 길로 들어섰다.


고민 끝에 시작한 일을 마무리 짓고자 회사로 향했다. 사무실로 들어선 그는 곧장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짧은 보고서를 썼다. 일자와 장소는 아무것도 적지 않은 채, 조사내용란의 한가운데로 커서를 위치시켰다. 꾸미는 일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이른 새벽 운전 미숙으로 일어난 우발적 사고, 보험 처리하지 않을 만한 사유 찾지 못함.>


프린터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곤 인쇄를 실행했다. 창을 닫으려니 저장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그렇다를 선택했다. 보고판을 집어 들고 가 프린터 된 종이를 사이에 끼웠다. 아직 따근 따끈했다. 곧장 부장실로 걸어갔다. 스티커 틈으로 보니 때마침 방에는 마부장 혼자 있었다. 남자는 노크를 했고, 부장은 누군지 알아보고 고개를 까딱였다. 오고절은 들어가면서 혹 누군가 따라 들어올 여지가 있는지 확인했다. 그런 낌새는 없었다. 마부장에게 다가가 아무도 자신들을 보지 못하도록 등으로 가렸다. 그는 능숙하게 안주머니에서 꺼낸 봉투를 보고판 속에 넣었다. 마부장 또한 여유롭게 그걸 받아들였다.


“얼마야?”


“오백입니다.”


“이게 전부야?”


“네 그렇습니다. 원래 육백을 요구했는데, 오백만 구했다길래 알았다고 했습니다.”


“참 말 안 듣네, 원칙이라는 게 있는 건데 그렇게 혼자 결정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그리고 내가 알아서 뺄 건 빼고 오라고 했잖아. 뭐 여기서 내가 직접 세서 주라고?”


그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놨다.


“아무리 그래도 제가 어찌 함부로 나누겠습니까?”


마부장은 아무 대꾸 없이 눈대중으로 지폐 몇 십장을 꺼낸 다음 보고판에 담아 돌려줬다. 오고절은 최소한의 몸짓으로 그것들을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가서 일 봐.”


“네, 그럼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내가 아침에 먼 친척 뻘 되는 당숙 전화번호를 잘못 줬더라고. 비슷해서 헷갈렸나 봐.”


“그럴 수 있죠. 괜찮습니다. 이따가 퇴근 잘하세요.”


‘전혀 비슷하지도 않은 번호였는데, 굳이 저런 말은 왜 덧붙이는 걸까.’


그는 나가자마자 세절기 입구에 종이를 걸쳤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는 살짝 꺼림칙했다. 스스로도 연유는 몰랐다. 자동센서가 작동하기까지 그 문서를 밀어 넣을지 말지 잠시 망설였다. 위이윙 거리며 갈리는 소리를 뒤로 그는 다시 사무실을 나섰다. 그 공간에 머무는 동안 그 누구와도 알은체 하지 않았다. 웹서핑이라도 할까 하다가 열심히 일하는 동료들에게 방해가 될 것 같아 그만뒀다. 거기다 우선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는 차량키를 반납하고 사용대장에 다녀온 장소를 대충 적었다. 법인차량 관리하는 직원도 오고절도 그냥 자신이 해야 할 일만 했을 뿐 대화는 일절 나누지 않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회사를 나왔다. 오후 세시 반, 이른 시간이긴 해도 한 건 했으니 누가 뭐라 할리도 없었다. 애초에 그가 해야 할 일이 그다지 많지도 않았고, 마부장이 특별히 시키는 일만 잘 처리해도 월급은 무난히 나왔다. 참으로 순탄한 회사 생활이었다. 그는 원효대사 해골물 이야기를 자주 떠올렸다. ‘일체유심조’ 모든 건 마음먹기에 달렸음을 잊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썼다. 지긋지긋하고 저급한 마부장의 태도와 말투도 그냥 단지 돈을 벌기 위해 겪어야 할 통과의례 같은 것에 불과했다.


‘그렇지. 그렇고말고. 이게 이 나이 먹도록 진짜를 움켜쥐지 못한 사람이 세상에서 빌어먹을 방법이야. 하기 싫은 일을 기꺼이 해내기 때문에 보상을 얻는 거지. 누구라도 하고 싶은 일이라면 그건 반대로 돈을 지불해야겠지.’


이런 잡생각을 하다 보니 엘리베이터는 어느새 일층에 도착했다. 건물 바로 옆 고은은행으로 갈지, 건너편 연주은행으로 갈지 잠시 갈등했으나 다음 장소를 고려하여 옆 건물로 들어갔다. ATM기에 입금 버튼을 누르니 투입구가 열렸다. 계수기가 지폐를 차르륵 세기 시작했다. 대체 얼마일까. 마부장이 다른 건 몰라도 눈대중은 나름 믿을 만 하단 말이지. 화면에서 넣은 돈이 185만 원이 맞냐고 물었다.


‘아니, 틀렸어. 200만 원이어야 했어. 썩을 놈. 그놈이 알고 있는 원칙이란 사실 반칙의 의미를 잘 못 알고 쓰는 건 아닐까?’


다가오는 10일에 출금될 원리금을 간신히 넘겼다. 치킨 값도 안 남겠단 계산에 돈이란 게 참 야속하단걸 깨달았다. 빚 갚는 데 사용되는 통장은 한 번 넣으면 인출이 불가했다. 원리금이 빠져나가는 날은 한 달에 총 세 번. 그 돈이 빠져나간 직후 다음 원리금 상환일 삼일 전까지 그는 행복에 잠겨 웃고 다닌다. 그러다 하룻밤 사이에 그의 기분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돈을 마련할 때까지 침묵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여윳돈이 생겼으니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이 더 늘어난 셈이다.


그는 이어폰을 끼고 음악 플레이리스트에서 Sweetbox의 ‘Everythings gonna be alright와 Life is cool이 반복 재생되도록 설정했다. 쏟아지는 햇살은 이보다 더 적당할 수 없었으며, 솔솔 불어오는 바람은 선선했다. 세상은 참 살만한 곳이라 확신했다. 이 순간이 아름다웠고 다신 오지 않을 거란 평범한 사실을 상기하니 도보에 닿은 발자국 소리마저 소중했다. 되도록 회사에서 멀리 떨어진 프랜차이즈 커피숍으로 향했다. 도착 오 분 전 전용 애플리케이션을 열어 니트로 콜드브루를 매장에서 먹는 것으로 주문했다. 풍미 그득한 거품이 시원한 기운과 함께 입안으로 들어와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걸 상상하니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도착하니 픽업대의 작은 전광판에 오종종이란 닉네임이 적혀 있었다. 기막힌 타이밍이었다. 유난스럽다 싶을 정도로 두 손으로 조심스레 잔을 들었다. 후루룩하며 거품을 아주 살짝 빨아들였다.


창가에 위치한 기다란 테이블 자리에 앉아 등 쪽에 꽂혀있던 책을 꺼내 들었다.

그는 겉표지에 적힌 제목을 보곤 그리스 신화 이야기가 어째서 변신 이야기 일지 추측해 봤다. 전능한 신과 인간은 똑같이 온갖 감정에 휘둘린다. 다만, 신은 갖가지 재주로 욕망하는 것들에 다다른다. 물론 독수리나, 황소 따위로 변신하는 장면이 심심치 않게 나오기에 변신이라는 단어를 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고절은 평범한 인간이야 말로 살면서 무수히 많은 모습으로 변함을 알고 있다. 타인에게 지독히도 못된 인간이 가족에게 자상하다 던 지, 강자 앞에서는 그리도 비굴하던 자가 약자 앞에서는 혀를 내두를 만큼 오만하고 교만할 수 있다 던 지.


그 변화무쌍한 내면의 변신이야 말로 인간이 가진 특성이 아닐까 생각했다. 헛생각에 잠겼던 그는 잔을 기울여 크게 한 모금을 마셨다. 거품에 숨겨진 액체가 넘어오니 감각기관 전부가 살아 숨 쉼을 느꼈다. 그 뒤로 그는 꼬박 세 시간을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중간에 다크 초콜릿 쿠키를 사 온 것 말고는 그는 책 속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다. 혹시 휴대폰 답장이 왔는데 못 알아챘을까 봐 액정을 봤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를 찾지 않았다. 밖이 어두워지자 창에 비친 남자의 얼굴은 또렷해졌다. 턱을 괴고 잠시 정면을 응시했다. 초점이 그의 얼굴에 맞춰진 것도 아니나 그렇다고 바깥의 배경을 보는 것도 아니었다. 멍한 시간을 보낸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그는 갑자기 마개가 빠져 물이 쭈욱 빠지는 욕조처럼 힘이 급격히 소진됐다. 눈은 점점 감겼다. 수없이 많은 사람 사이를 지나쳐 가면서도 아무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잠들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마치 누에고치 속 번데기처럼 작은 방에서 누워만 있을 자신이 견디기 어려웠다.


‘그 녀석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아름다운 형태로 변태라도 하지, 난 그냥 변태임을 증명하는 거고.’


오고절은 입었던 셔츠와 속옷을 세탁기에 돌려놓고 가벼운 러닝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집밖으로 나섰다. 그는 밤거리를 배회했다. 사부작사부작 이름 모를 골목들을 누볐다. 하늘엔 한 귀퉁이가 이지러진 달이 걸려 있었다. 음산한 기운의 구름이 주변에 깔려있어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매월 비슷한 달이 뜰 텐데 늘 그 모습이 색달랐다. 그 황홀한 광경을 담고 싶어 사진을 찍었으나 구식 휴대폰이 그 모습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그 자리에 서서 그 신비로움을 눈에 넣었다. 집으로 돌아와 천장에 매달린 봉에 차례차례 세탁물을 걸었다. 그리곤 아침과 마찬가지 순서로 샤워를 했고, 머리를 말린 뒤 잠자리에 들었다. 다시 휴대폰 액정을 켜봤다. 어디서도 연락은 없었다. 옆으로 누워 잡다한 영상을 보던 그는 맞춰진 알람을 확인하고, 전화벨과 메시지를 무음으로 전환했다. 그는 베개 하나를 배고 하나는 끌어안고 잠에 빠져들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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