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양고기 요릿집 으슥한 구석, 남자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앉아 있다. 그들을 제외한 다른 삼삼오오 무리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저마다의 즐거움을 누렸다. 하지만 두 사람이 차지한 공간은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한 것처럼 무거운 정적만이 흘렀다. 테이블 위 화로가 둘 사이에서 튀기는 불꽃을 간신히 가로막았다. 겉이 하얗게 변해버린 숯은 자신을 바스러뜨리기엔 아직 멀었다는듯 더 큰 화기를 빨아들이며 제 할 일을 해냈다. 일그러지는 주변 공기를 더 이상 견디지 못했는지, 이윽고 서로는 상대에게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안쪽에 앉은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갑자기 여기까지 오시라 해 죄송합니다.
가끔 만나는 친구 두 놈이 있는데, 자신들이 이 근처에 산다고 강 건너 있는 절 기어이 여기까지 불러내지 뭡니까. 별도리 있나요. 둘에게 하나가 따르는 수밖에. 양고기 드실 줄 압니까? 드셔 보세요. 깨끗이 먹었어요. 이쪽은 아예 손도 안 댔다니까요.”
이창주는 불판 구석에 남아있던 고기를 집게로 한 두 번 뒤집더니 오고절 쪽에 가져다 놨다. 맞은편 남자는 다른 사람들이 먹고 갔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자리를 우두커니 바라만 봤다. 이리저리 하얀 양념을 발라먹다 남겨진 양배추 샐러드, 전혀 손대지 않은 장아찌. 국물만 비워진 소고기 국, 반대로 건더기를 빼먹고 빨간 국물만 남은 뚝배기, 찌꺼기가 그대로 붙은 채 군데군데 주황으로 얼룩진 하얀 냅킨, 끈적한 테이블 위에 놓인 젓가락과 숟가락. 뼈 째 뜯기다가 질긴 살이 실처럼 뻗친 어느 동물 신체 일부. 이거 저거 입에 들었던 게 뱉어져 뭉쳐진 일회용 물티슈. 그 순간 고절에게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나는 듯 하자 그는 의식적으로 그걸 멈췄다.
“아니요. 혹시 다 드신 거면 자리를 옮길까요? 사방이 왁자지껄해서 자칫 목소리가 커질까 염려되네요.”
이창주는 훗 하며 살짝 웃었다.
“뭐 재밌는 일이라도 생각나셨나 봅니다.”
“아뇨, 아뇨. 저는 당연히 드실 줄 알았는데요. 제 생각이 틀렸나 해서요.”
여러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었다. 오고절은 대꾸하지 않았다. 이왕 일을 수락한 이상 모든 만남과 언행은 비즈니스일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더군다나 앞으로 어떤 사태가 펼쳐질지 모를 상황에서 자질구레한 것들에까지 감정이나 판단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옮기시기 싫으면, 얘기 나누면서 천천히 마무리하시죠. 아예 여기를 다 치워달라고 할까요?”
“아닙니다. 아녜요. 나가시죠. 봐둔 카페가 있습니다.”
이창주가 먼저 일어나 계산대로 향하는 동안에도 오고절은 잠시 자리를 지키다 일어났다. 그들이 나오니 양 쪽으로 늘어진 식당들의 분위기는 한껏 무르익고 있었다. 골목이 허락하는 유희는 결코 과하지 않았다. 술 취한 이들의 난동도 부랑자들의 방황도 찾기 어려웠다. 고절이 사는 동네에는 흔한 명함 건네는 호객꾼도 없었다. 꽤 오래된 가게들이 안정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온 건지, 나름 점잖은 손님들이 이 골목을 차지하고 있어서 인지는 정확지 않았다. 둘은 조용히 걸었다. 이창주가 반 보 정도 앞섰다. 마침내 다다른 곳은 층고가 상당히 높은 이층짜리 건물을 통째로 사용하는 카페였다. 밤 11시가 넘었음에도 안은 여전히 환했고, 널찍한 공간에 사람들은 드문드문 자리 잡았다.
“뭘로 하시겠습니까.”
“따뜻한 아메리카노로 하겠습니다.”
“제가 차에 잠시 다녀와야 해서요. 이거 부탁드리겠습니다. 편한 자리 잡고 계세요.”
이창주는 진동벨을 건넸다. 들어온 문을 열고 나간 이창주는 카페 바로 앞에 세워진 검은색 세단에 올라탔다. 주문한 음료는 금방 나왔다. 오고절은 쟁반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마저 올라서니 서로의 손을 부여잡고 마주 보는 젊은 연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위층은 마치 서로를 열렬히 은애 하는 남녀만을 위해 따로 마련된 장소처럼 은밀하고 아늑했다. 고절이 바로 그 공간을 침범한 것이다. 그는 맨 가장자리에 앉아 통창 넘어 바삐 오가는 차들을 관찰했다.
'그들이 어디로 향하는 걸까. 이 늦은 밤 기꺼이 움직일 정도로 반가운 장소로 갔으면 좋겠다.'
남자는 사색에 잠기며 뜨거운 커피잔을 들었다. 까만 액체에서 올라오는 김으로 코와 눈을 쐬었다.
“아이고, 자리 잘 잡으셨네요. 일단 이거부터 받으시고.”
이창주는 쇼핑백 하나를 오고절 옆자리로 옮겼다. 안에 담긴 상자엔 유명한 신발 브랜드가 박혀있다.
“이게 뭡니까?”
“보이잖아요. 신발이에요. 정장에도 잘 어울리는 검은 운동화로 하나 샀습니다. 앞으로 불철주야 힘들게 뛰어다니셔야 하는데, 로퍼는 영 능률이 나지 않을 거 같아서. 바깥쪽 달린 다이얼을 돌리면 꽉 묶여서 아무리 뺑이쳐도 안 풀릴 겁니다.”
“감사합니다. 얘기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제게 주어진 시간이 굉장히 짧습니다. 실마리조차 얻지 못했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합니까?”
“에이, 우리 함께 일하게 됐는데 서로에 대해 얘기도 좀 하고 그럽시다.”
오고절은 싱긋 웃었다.
“그럴까요?”
“뭐, 지난번에 짧게 소개드렸다시피 제 직업은 변호사입니다. 근데 법을 달달 외우지는 못해요. 풋내기시절부터 어디 몇 조 몇 항보다는 끈끈한 사람들의 권능으로 일했거든요. 여하튼 요점은 이겁니다. 나는 오고절씨 뒤 봐주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물론 일에 갈피를 못 잡을 때마다 함께 해결책을 고민해 볼 수도 있는데, 기본적으로는 한 발 물러난 입장이란 셈이죠."
“그 뒤를 봐준다는 게 어느 정도 범위인 겁니까?”
"고절씨가 아무리 머리를 싸매도 '아 이건 도저히 불가능해.'라고 하는 문제를 내가 가능하게 할 겁니다. 내 권한을 일일이 열거하긴 어려운데, 하여튼 일단 무엇이든 물어봐 보세요."
"감이 잘 오지 않네요."
“오고절씨가 판단하기에 이 일을 마치기 위한 거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마세요. 혹시 역사책에 관심 있습니까? 인류는 자신들이 세운 세월을 오륙천 년 동안 기록했죠. 그 흔적들을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절로 욕 나올 사건, 사고가 수두룩해요. 근데 만일 그 악행들이 바로 이 일을 위해 벌어진 거라면 모든 게 정당화될 겁니다. 그만큼 이 일은 중요합니다. 그 외 것들은 깡그리 무시하세요. 오고절씨 똑똑하잖아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으시죠?”
“네, 하지만 제가 간이 작아서 한계가 있을 겁니다.”
“에이, 오고절씨. 요구한 돈이 얼만데 그러십니까. 근데 오고절씨는 결국 잘 해낼 겁니다. 믿어 의심치 않아요.”
“네, 최선을 다 해야죠.”
“이쪽 세계로 발 들이신 이상. 그런 무책임한 단어는 꺼내지도 마세요. 불쾌합니다. 아시잖아요. 최선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 라니, 다음에 라니 이런 거 여기엔 존재하지 않다는 거. 이미 충분히 느끼시고도 남았을 분께서 왜 그러십니까.”
“네, 저도 살짝 무서워서 그냥 해본 말입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한편으론 조금 설레네요. 한 번쯤은 그렇게 일해보고 싶었거든요.”
“잘됐습니다. 역시 저는 단박에 알아봤다니까요. 이 일에 딱 들어맞다는 걸.”
오고절은 대답 대신 커피를 한 모금 조심스레 들이켰다.
“대신 오고절씨, 한 가지만 명심합시다.”
오고절은 턱을 들고 남자를 바라봤다.
“그 자리에서 잡히지만 맙시다. 어느 장소라도 상관없어요. 그 누구에게도 절대 붙들리지 마세요. 그땐 일이 복잡해집니다. 설령 신이 잡는다 해도 거기선 일단 빠져나와야 하는 겁니다. 뒷일은 나중에. 오케이?”
오고절은 천천히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이창주도 그때야 비로소 한 모금의 커피를 마셨다. 그는 찻잔을 내려놓더니 손목에 찬 시계를 바로 하여 찬찬히 헤아렸다. 빛나는 광택을 머금은 갈색 가죽에 메달린 크림빛깔의 다이얼, 은색 테두리, 또렷한 아라비아 숫자, 견고함을 응축해 놓은 용두, 참으로 탐나는 호사품이었다.
“약간 짬이 나는데 우리 재미로 팔씨름이나 해볼까요?”
“고등학교 때 이후론 해 본 적이 없는데.”
그러면서 오고절은 마다하지 않고, 재킷을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었다. 왼팔에 찬 메탈시계도 끌러 안주머니에 넣었다. 이창주도 똑같이 행동했다. 그리고 둘 다 셔츠 손목 단추를 풀고 소매를 걷어 올렸다. 좌우에 남긴 면적이 공평하도록 둘은 신중하게 팔꿈치 위치를 여러 번 고쳐댔다. 같은 층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연인은 어느새부턴가 남자들의 분주한 모습을 신기하게 구경했다. 처음엔 장난을 진지하게 임하는 사십 대 아저씨들이 신기해 피식피식 웃으며 바라봤는데, 이내 그들의 얼굴에 웃음기가 쫙 빠져있음을 눈치챘다. 다소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남자의 한쪽 팔뚝을 꼭 부여잡을 만큼 긴장감이 감돌았다. 서로는 겨루는 데 사용하지 않는 손으로 테이블 모서리를 꽉 붙잡았다. 조금씩 바꿔지던 자세가 드디어 멈췄다. 과연 누가 이길지, 덩치는 확실히 차이가 나 보였지만, 작은 남자도 상대적일 뿐이지 결코 왜소한 타입은 아녔기에 예측이 어려웠다. 둘은 서로 잠시 눈을 마주쳤다가 시선을 내리곤 본격적으로 힘을 줬다. 오고절은 상대의 팔을 비틀고 손아귀를 쥐어짜 으스러뜨려야 한다는 각오로 눈을 번뜩였다. 이창주야말로 더하면 더 했지 결코 덜 하진 않았을 것이다.
“에이, 그냥 해본 말인데 안 빼셔가지고 장단 좀 맞춰드렸습니다.”
이창주는 싱겁게 웃으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한 발 뺐다. 고절은 시큰거리는 손을 쫙 펼쳐댔다.
“저도 오랜만에 재밌었습니다.”
“시간 다 됐네요. 움직이시죠.”
“네? 어디로 또 가는 겁니까?”
“아까 이 일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안 온다고 하셨잖아요. 알려드릴게요. 인간세상의 진짜 은밀한 질문은 어디로 던져져야 하는지. 그리고 그 답이 어떻게 나오는지. 요즘 AI에게 궁금한 걸 물어보면 척척 대꾸한다지만 제가 보기엔 백 년은 일러요. 때로 인간은 자신이 뭘 모르는지조차 모르거든요. 우리가 가려는 덴 기계가 인간의 껍질을 모조리 다 벗겨보기 전까진 절대 미치지 못할 영역이에요.”
남자들은 급히 나가 바깥에 있는 차에 올라탔다.
“받은 차는 집에 두고 오셨어요?”
“제가 사는 곳엔 주차장이 없어서, 근처 건물 주차장에 정기권을 끊어 세워뒀습니다.”
“차 중간이랑 보조석 콘솔박스 열어 보셨죠?”
“네, 머가 있는지는 봤습니다.”
“카드는 한도 없으니까 마구 긁으시고, 현금은 상대가 요구할 때 개의치 말고 쓰세요. 이천만 원이니까 한 달 일처리 보는데 충분할 겁니다. 합당한 이유가 있으면 제가 얼마든지 더 채워드릴 겁니다. 고절씨는 나중에 실비처리 따로 안 해줘요. 그러니까 일 하는 동안에는 껌 한 통도 개인 돈 쓰지 마세요. 증빙서류 요구도 안 할 거니까 일일이 영수증 받지도 마시고. 근데 업무 처리에 막히지 말라고 드린 건 아시죠? 안 그러시리라 믿지만 혹시나 해서 확인시켜 드리는 겁니다. 함께 있을 땐 제가 돈 낼 거고 앞으로 고절씨 독고다이로 다니다 보면 별 일 다 겪을 텐데. 그때마다 고민하거나 주저하지 마세요. 우리 1초의 가치는 일반인들과 단위가 달라요. 일에만 집중해 주세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쪽에선 임무완수 또는 실패뿐입니다. 일반 회사에서는 목표 미달에 대해 베네핏을 주고 안 주고를 논하거나 기껏해야 직장인으로서 탈락이겠죠. 근데 이건 이야기가 아예 다릅니다. 나조차도 이 일로부터 비롯된 책임이 가늠이 안 돼요. 무슨 말인지 아시죠?”
늘 여유롭던 이창주의 말투에 실패라는 단어가 나오면서부터 약간은 빨라지고 미세한 떨림마저 섞여있었다.
“제가 약속받은 금액, 제 목숨 값을 아득히 뛰어넘는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답변해 주니 제가 더 고맙네요. 우리 첫 만남에 다소 무례하게 군거 알고 있어요. 근데 오고절씨보다 이 일에 적합한 사람은 없어요. 적어도 제가 보기엔 그래요. 시간도 부족하고 그래서 예민해진 상태에서 오고절씨를 확 끌어당길 뭔가가 필요했습니다. 이해하시죠?”
“이미 한 배를 탄 마당에 지난 일 얘기해 뭐 하겠어요. 하지만 그런 상황이었다면 이해했다고 답변드리죠.”
이창주의 입가는 묘한 웃음을 지었다. 차의 속도가 차츰 줄어들었다. 도착한 장소는 오고절에게 상당히 낯익은 동네였다. 아까 식당이 있던 공간과는 완전히 상반된 분위기,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환락이 겹겹이 쌓인 골목. 액체도 고체도 아닌 비정형 형체가 아슬아슬하게 흘러넘치는 장소. 이곳에 터 잡은 인간들은 욕망에 이끌려 지방 곳곳에서 빨려 들어왔다. 눈물을 머금고 스스로의 다짐을 몸에 새긴 이들, 쌀쌀한 바람에도 그들은 각오를 드러낸 채 마구 돌아다녔다. 그들은 타인의 욕구를 극한까지 이뤄주는 대가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했다. 아무리 미래를 위해 현재의 모습을 흐트러뜨린다지만, 그 끄트머리에는 반드시 구체화된 끝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들은 어지러운 세계에 노출되는 동안 그들이 귀하게 움켜쥐던 소망을 하나 둘 놓쳐버렸다. 남은 건 오로지 자신을 제물 삼아 불사름으로써 얼른 아침이 찾아오길 비는 것뿐. 아름다운 청춘들은 산화하여 녹슬어갔다.
이창주는 차량이 지나다니는 길 한가운데 아무렇게 차를 세웠다. 오십 줄은 되어 보이는 남자가 추운 날씨에도 칠부바지를 입고 잽싸게 달려왔다.
“형님 오셨습니까. 상당히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끌끌 끌, 수작 부리고 있네. 엊그제도 왔수다.”
“제가 그날 마침 쉬는 날이었나 봅니다.”
“열심히 사는 아자씨네.”
이창주는 오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꺼내 와이퍼 사이에 끼웠다. 가뜩이나 싱글대던 아저씨는 광대뼈를 있는 대로 끌어올렸다. 그의 표정은 보는 이로 하여금 거부감이 꿈틀거리게 했다.
“들어갑시다. 오고절씨 이런데 안 와봤죠.”
“못 와봤죠. 단속할 때 빼곤 들어와선 안 될 곳이니까요.”
처음 와 본 건물이었지만 오고절은 직감적으로 안에 어떤 종류의 영업이 이뤄질지 알것 같았다.
“여긴 무조건 예약해야 돼요. 거기다 검증된 사람의 소개 없인 위치도 번호도 모르고, 여하튼 엄청 비싼 뎁니다. 또 위험한 곳이기도 하고. 처음 온 거 너무 티 내진 마세요.”
오고절은 무표정하게 따라갈 뿐이었고, 이창주는 연신 벙글거렸다. 강단 있어 보이는 늘씬한 여자가 그들을 맞이했다. 큰 기업에서 꽤 오랫동안 근무하는 동안 주변으로부터 좋은 평판은 못 얻었을지언정, 실력만으로
충분히 살아남을 인상. 외모 관리가 철저하여 피부엔 윤기가 흘렀으나 풍기는 분위기론 적게 잡아도 40대 중반, 키는 충분히 커서 낮은 굽의 구두를 신고 있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인물이라는 건 누구라도 눈치챌 수 있었다.
“늘 시간 딱 맞춰서 오시더니, 오늘따라 성미가 급해지셨나. 무슨 일로 이리 일찍 오셨대요?”
“로봇 같은 김실장님이 말장난도 할 줄 알아? 오늘 귀한 손님 모신다고 긴장했나 봐. 시간을 착각했어. 얼른 상미 방으로 불러.”
“에이 상미는 안 된다고 미리 말씀드렸잖아요. 아무리 이변호사님이라고 해도 걔는 한 달 전에는 말씀하셔야 한다니까.”
“실장님, 죄송합니다. 오늘은 부탁을 드려야 할 때가 아니라서요. 상미 어느 방에 있습니까? 내가 직접 데리고 나올게요.”
남자는 여자를 살벌하게 노려봤다. 여자는 움츠려 들었다기보단 상황 파악이 빨랐다. 그녀는 무전으로 사람을 불러 사내들을 안내할 것을 지시했다. 두 남자는 방음벽에 걸러진 소리를 뚫으며 어두운 통로를 통과했다. 그것은 비명인지, 환호인지, 신음인지, 탄성인지 모를 기괴한 소음이었다.
“이 방입니다.”
남자는 마스터 카드키를 전자자물쇠에 갖다 댔다.
“옛날 실력 좀 보여주세요.”
뜻 모를 말을 던진 이창주는 종업원이 문을 열자마자 성큼 안으로 들어서며 소리쳤다.
“류상미. 당장 나와.”
들어간 곳은 오고절이 예전에 쳐들어갔던 그런 공간이 아녔다. 벽마다 모조품인지 진품인지 분간 안 될 큼직한 명화가 하나씩 걸려 있었고 가운데에 대리석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엉덩이와 팔을 걸칠 부분은 푹신하지만 구조만큼은 상당히 단단해 보이는 의자, 그 위에 남자 여섯 여자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좌우에 남자들은 숨죽인 채로 뒤편에 앉아있는 남자와 여자의 긴밀한 대화에 귀 기울이고 있던 모양새였다.
“뭡니까? 뭐야. 어떻게 문을 열었어.”
그나마 인상이 뚜렷한 하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위협적인 태도를 취했다. 오고절은 잽싸게 파고들어 왼손바닥으로 성난 상대의 옷깃을 잡아 테이블로 끌어내렸다. 거칠기는커녕 부드럽고 천천히 그의 한쪽 볼을 차가운 대리석에 바짝 붙였다. 시선은 나머지 사람들에게 돌렸다. 그의 팔꿈치엔 힘이 단단히 들어가 한 남자를 완전히 굴복시켰다. 상석에 앉은 남자는 갑작스러운 폭력에도 그다지 놀라 보이지 않았다. 평온하게 어딘가로 전화를 걸려는 찰나, 그의 대각선에 앉은 남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휴대폰을 손에 쥔 남자는 오고절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오로지 이창주만을 바라봤다.
“우리 어디서 한 번 뵌 적 있죠?”
“에이, 다 기억하시면서 민망스럽게 뭘 묻고 그러십니까. 이렇게 갑작스럽게 쳐들어와 죄송합니다. 원래 쓸모 있는 물건은 사용 순서가 다 있는 법이라서요.”
“그 순서라는 게 미리 약속 잡고, 차례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걸 얘기하진 않는 거고요?”
“그런 거 지켰으면 의장님도 지금 그 자리까지 오셨겠습니까? 충분히 쓰고 돌려드릴게요. 기다리실지는 여러분의 선택. 자, 상황 정리 다 됐으니까 나갑시다.”
안쪽에 앉아 있던 여자와 오고절은 방밖으로 나섰다.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따갑긴 했으나 위협적이진 않았다. 오고절의 육감은 뛰어났다. 감당 못할 위험이 주변에 도사리면, 그의 심장은 먼저 뛰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맥동은 어느 때보다 순했다. 그들은 밖에서 대기하던 종업원의 안내로 어느 아늑한 방에 들어갔다. 그곳은 아까 여자를 빼내오던 데 완 또 다른 분위기가 펼쳐져 있었다. 멋들어진 원목 테이블에 차 마시는 도구가 개인별로 놓여있었다.
“제가 술을 못 마셔서요. 고절씨도 마찬가지죠?”
“네, 뭐 그다지 좋아하진 않습니다.”
이창주가 자기 자리를 잡으니 나머지도 자연스레 착석했다.
“자, 이제 그럼 질문, 아니 심문해 보세요. 영화에서 보던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봅시다.”
오고절은 의아하다는 듯 남자를 쳐다봤고, 이창주는 눈을 땡그랗게 뜨고 아래턱을 쭈욱 내밀어 여자를 가리켰다. 이 건물에서 홀로 여유가 넘쳤다. 영문 모를 일이지만, 고절은 그냥 무작정 질문을 해보기로 했다.
“이름이 뭡니까?”
“아까 들었잖아요. 류상미.”
“이 방에 왜 들어온 지 알고 있습니까?”
“아저씨, 귀가 어두우신가 봐요? 쓸.모.있.는.물.건.이.니.까. 불려 들어왔지요.”
“당신이 뭐에 그렇게 쓸모 있다는 겁니까? 기가 막히게 술을 잘 따르는 거 같진 않고, 알려줘 보세요.”
“아, 오빠. 이 사람 뭐야. 어서 이런 촌뜨기 같은 놈을 데려와서 날 간 보게 하는 거야. 내가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 급은 아니잖아.”
오고절은 앞에 놓인 찻잔을 내려다보며 자신이 대체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싶어 자괴감이 들었다. 아랫입술 안쪽을 지그시 깨물었다.
“끌끌 끌. 미안. 미안. 근데 아가리 닥치고 저 아저씨가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줘라. 싸구려 오크통 속에서 술로 절여지고 싶지 않으면. 그 언젠가 내가 얘기해 줬었지?”
“알겠어. 그만, 그 얘기 듣고 나서 석 달간 잠을 제대로 못 잤어.”
오고절은 다시 여자를 빤히 쳐다봤다. 그녀의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송아지처럼 순해 보이는 눈망울을 지닌 그녀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길고 진한 속눈썹을 붙였다. 그간 수많은 사람들을 봐왔으나 이 사람처럼 직업에 어울리지 않는 이도 드물었다. 이유가 있을 터였다. 자신과 여자가 마주 앉아 있는 건. 오고절은 잠시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상황을 이해해 보려 애썼다. 이창주는 옆에서 가만가만 작은 호를 들어 찻잔을 채우고 있었다.
“혹시 내가 왜 이 자리에 온 지 압니까?”
자신이 던지고도 스스로 납득가지 않을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놀라웠다.
“그 사람은 안 보여, 아주 꽁꽁 숨어있어서. 근데 장소는 어렴풋이 보이네.”
“거기가 어딥니까?”
“우리나라에서 가장 터 좋은 데는 강의 남쪽도 북쪽 산 아래도 아냐. 사방으로 널찍히 트이고 평평한 곳이 따로 있어. 이 땅으로 고운 기운이 통째로 흘러드는거야. 벌써 백 오십 년 전부터 거길 떼놈과 왜놈, 양키가 번갈아 차지하고 있으니 우리가 이 땅에서 기를 못펴는게 당연하지.”
“짐작조차 안 가네요. 정확히 알려줄 수 있습니까?”
“대주역을 빠져나가 광장을 가로질러 곧장 직진해. 택시 승강장이 있는데 잡아타고 몽토타워로 가자고 해. 그 건물 있는 부지를 돌아다니다 보면 괴이쩍은 장소를 발견할 거야. 거기가 바로 아저씨가 찾는 데야. 아주 작아.”
국내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몽토그룹, 오가며 들었을 뿐이지 위치가 어딘지는 정확히 몰랐다. 거기다 그 안에 들어가 수상한 장소를 찾으라니. 알다가도 모를 소리였다.
“뭐 더 해줄 말 없습니까? 내가 이 일을 잘 해내기 위해.”
“아저씨는 어차피 내가 말해줘도 안 들을 거잖아. 다 얘기했어. 더 이상은 완전 무리야.
근데 참 슬프다. 아저씨의 지나온 인생이. 그리고 참 안쓰럽다. 남은 날들이.”
오고절의 가슴 속 폐와 폐 사이가 젖은 솜뭉치로 턱 막힌 것만 같았다.
“그게 보입니까? 내가 발버둥 쳤던 게 하루하루가.”
“응, 너무 잘 보여. 진짜 불쌍하다 그 집 남자들. 못나기도 지지리 못났고.”
오고절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야, 이제 그 방으로 돌아가.”
“왜? 벌써 나 다 써먹은 거야?”
“말꼬리 한 번만 더 잡으면.”
“알겠어. 알겠다고. 나갑니다요. 근데 진짜 그냥 나갑니까?”
상미는 두툼한 손바닥을 수평으로 하여 교차시켰다.
“에라이, 받아라.”
남자는 카드를 휙 하니 던졌다. 검은색 플라스틱 가운데 투구 쓴 남자가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한도는 뭐 항상 똑같고. 너 자주 가는 백화점 별관, 이번 주 목요일 임시휴업이라니까 들어가고 싶으면 가. 미리 얘기해놨어.”
“진짜, 늘 고마워. 근데 어차피 나 막 쓰지도 못하는 거 알잖아. 남들이 못 보는 거 대신 봐주는 대가로 난 업을 쌓는거야. 거기다 그 알량한 재주로 재물까지 욕심내면 감당 안돼. 적당히 딱 몸살 날 정도로만 쓸게.”
“펑펑 써, 그리고 지옥에나 떨어져.”
“매력적이다. 매력적이야.”
여자는 또각또각 소리를 뒤로 자리를 떴다.
“에휴, 우리 고절씨는 지구의 환경오염에 관해 고민해 본 적 있어요?”
“예전에는 한참 섭씨 1.5도를 넘으면 끝장이니 뭐니 하는 얘길 들은 거 같은데, 이젠 그것도 옛말인지 잠잠하네요.”
“나는 북극곰이 참 좋거든요. 그 아기 북극곰들 보면 진짜 한 마리 키우고 싶더라니까. 오죽하면 내가 그린피스에 정기적으로 후원을 해요.”
“그런가요.”
“그래요. 이 좁은 지구에 81억 명이 넘게 산다는데, 그거야 말로 기가 막힌 현실이지. 무가치한 인간 한 4분의 1만 사라져 봐. 그들이 들이마시는 공기랑 처먹는 음식도 절약되고, 뿜어대는 가스도 사라지지. 얘기하고 보니까 지구를 깨끗하게 하려면 환경단체 말고 테러리스트들에게 돈을 보내야 하나.”
남자는 지가 말하고도 웃기는지 피식피식 해댔다.
“고절씨는 쓸모 있다는 걸 보여줘 봐요. 계속 소고기 뜯어먹고, 가죽옷 걸치며 살고 싶으면. 알겠죠? 자, 오늘 우리의 만남은 여기까지. 일어납시다.”
그들은 짧게 인사를 나눈 뒤, 각자의 길로 떠났다.
다음날 아침, 오고절은 대주역 주차장에 도착했다. 행여 여자가 일러준 말에 숨은 뜻이 있을지 몰라 그녀가 말한 그대로 따르기로 했다. 역을 등지고 곧장 광장을 지나 택시 승강장 맨 앞에 세워진 차에 올라탔다.
“몽토타워로 가주세요.”
“아니 걸어서 오 분 거리를 거참. 젊은 사람이. 아니 내가 여기서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기사의 투덜대는 목소릴 들으니 그 여잔 자신이라면 걷지 않았을 테니까 택시를 타라 한 거구나 싶었다. 고절은 아내가 건물 지하주차장 입구에서 겨우 일이십 미터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웠다며 진심으로 화내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 조금 걷는 게 그렇게 싫어?’
‘아니, 걸을 수 있지. 근데 뻔히 가까운데 자리가 있음에도 굳이 왜?’
'나갈 때는 손쉽게 나갈 수 있잖아.'
'말을 말자.'
“다 왔어요. 내리세요.”
오고절은 조용히 카드를 리더기에 대고 내렸다.
'쿵' 하고 큰 소리가 나 뒤돌아보니 자신을 내려준 택시가 급하게 옆차선으로 옮기려다 골목에서 나와 좌회전하는 차의 옆을 들이박은 것이었다.
“아이씨, 재수 옴 붙었네. 별 그지 같은 인간 하나 태웠다가 이게 뭔 지랄이냐고.”
검은 세단에서는 조수석 쪽에서 자그마한 남자가 내렸다. 오고절은 거기까지만 보고 제 갈길로 갔다. 그는 일단 부지를 빙 돌며 주변을 살폈다. 높은 담벼락 속 용도 모를 벽돌 건물들이 늘어져 있었다. 옛 정취를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잘 관리되어 정갈하고 큼직큼직하게 나눠진 땅, 낮은 사방이 쭉 뻗은 까닭인지 공기가 더 시원시원히 잘 통했다. 기운이 좋다는 말을 들어서인가 자신이 살고 있는 찌든 공간과는 확실히 대비되는 것 같았다. 바깥으로 나 있는 길은 건물 정면과 후면 두 군데, 그런데 뒤쪽은 골목과 이어진다. 정면은 16차선 대로변과 바로 접해있다. 그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로비 여기저기에 설치 된 조형물이 건물과 그룹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프런트 데스크에는 안내 직원들이 남녀 뒤섞여 있었고 상층으로 올라가는 입구는 통제되었다. 지하 주차장 전용 엘리베이터는 탈 수 있고, 지하 상점가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가 두 군데 설치되어 있었다. 밑으로 내려가니 3층에 걸쳐 다양한 식당이 있었고, 몇 개는 이미 장사를 시작했다. 건물 후면 쪽으로 올라오니 창밖으로 흡연실이 보였다. 담배를 꺼내 들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사방이 막힌 부스 형태가 아니었고, 중간쯤에 창이 나 있었다. 지붕 쪽에는 공기를 빨아들이는 환풍기가 열심히 돌아갔다. 오고절이 담배 한 개비를 꺼내 한 모금 빨아들이려는 찰나. 한쪽 구석에서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저씨. 여기는 연초 금지입니다. 앞에 붙여 논 글자 안 보입니까.”
좁은 공간이라 그런지 스피커가 크게 울렸다. 천정엔 CCTV가 여러 대 설치되어 있었다. 함께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오고절에게 향했다.
“사칙이 꽤나 빡빡하네요.”
남자는 민망함을 숨기지 못하고, 넋두리하듯 중얼거렸다.
“우리 회사가 정한 건 아녜요. 회사 처음 오신 분들께 이런 상황 종종 생깁니다.”
“그러게, 피려면 제대로 허용해 주던가. 여기 사용료가 적지도 않다던데.”
오고절은 스피커와 CCTV 말고도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장치가 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자세히 보니 어두운 벽면에 닫힌 미닫이 문도 보였다. 그는 밖으로 나가 공간이 따로 있을법한 쪽으로 걸어갔다.
“아저씨, 누구세요? 왜요. 뭐 볼 일 있습니까?”
“아뇨. 그냥 신기해서요.”
오고절은 말끝을 흐리고 타워 안으로 들어갔다. 로비 한편에 카페가 있었고, 바깥을 쳐다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았다. 플레인 베이글과 데친 우유를 시켜 허기를 달랬다. 사건이 미궁에 빠졌을 때마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순간에 실마리는 튀어나왔다. 목소리 속 남자, 상당히 위압적이었다. 단순한 권위를 드러내는 말투가 전혀 아녔다. 누군가를 겁박하거나 위협할 때 필요한 몰아세우는 화법이다. 평범한 직장인에겐 좀처럼 찾기 어려운 그런 아우라. 흡연실을 들락거리는 많은 남자들은 얼굴도 옷차림도 다르긴 하나 대략 비슷한 범주로 묶인다. 오직 단 두 명, 자신과 작은 공간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을 남자는 평범한 직장인들과 섞이고 싶어도 물과 기름처럼 구분될 것이다. 그는 낯선 자를 찾아내려 눈을 부릅떴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찾던 남자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보통 집념이 아니다. 일반인은 확실히 아냐.’ ‘저 골방에 틀어박혀 규칙을 어기는 자에게 단호한 일침을 날리는 사명감,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냐. 꽤 터프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겠는데.’ 순간 곁방이 위치한 쪽의 쇠문이 열렸다. ‘드디어.’
후줄근한 회색 운동복을 입은 남자가 기지개를 켜면서 나왔다. 뒤통수는 납작하고 나머지는 사자 갈기처럼 풍성한 머리, 누가 봐도 꿀잠 잔 모습이었다. 배가 다 드러나자 정리되지 않은 거뭇거뭇한 털이 꽤 멀리서도 보였다. 하지만 두텁게 사각진 턱과 가장자리에 기른 수염이 역시 평범한 직장인이 아님을 나타냈다. 남자는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어슬렁어슬렁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고절은 눈치채지 못하도록 몸을 살짝 숙였다. 남자는 곧장 화장실로 들어갔다. 괜히 눈이 마주칠까 싶어 휴대폰을 꺼냈다. 어떤 연락도 오지 않았다.
‘날이 좋아유. 경치 좋은 브런치 카페라도 가세유.’ 간단히 문자를 전송했다.
“아저씨, 언제까지 여기 있을 겁니까? 경찰 뭐 이런 겁니까?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심장이 덜컥 배꼽까지 내려앉는 줄만 알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던 고절은 자신 뒤편에 있던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짐승같이 부리부리한 눈알이 떡하니 박혀있었다. 오고절은 최대한 눈을 예쁘게 뜨려고 노력했다.
“저 여기 지하 식당에서 약속을 잡았는데, 너무 일찍 도착했지 뭡니까. 그러다 담배 한 대 태우러 흡연장에 들어갔고. 아까 아저씨에게 한 소리 들었죠. 호기심이 들더라고요. 어떤 사람이 거기서 지켜보고 있는 건지. 무료해서 그랬어요. 불편했다면 미안합니다.”
“어물쩍 넘어가려 말고, 똑바로 말해. 약속시간에 몇 시간이나 빨리 올 리가 있을까? 그리고, 당신이 아무리 궁금증이 넘친다 해도. 이렇게 내 움직임이 보일 자리에서 꼼짝도 안 한다고? 아저씨, 지금 대충 넘길 수 있는 상황이 아냐.”
“아저씨가 못 믿는다면 나도 더 해줄 말이 없는데.”
고절은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보면서도 슬쩍 슬리퍼 앞에 튀어나온 발가락의 위치를 파악했다. 남자는 씨익 미소를 날렸다.
“김 차장님, 내가 그런 복장으로 회사 안까지 들어오지 말라고 몇 번이나 경고했죠.”
앞섬을 채운 검은색 정장을 착용한 남자 세 명이 대치중인 두 명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중 선두에 있는 남자가 크진 않지만 또렷하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죄송합니다. 안 나오려 했는데, 수상한 사람이 있어서요.”
“알고 있습니다. 가서 근무 계속하세요. 근데 제발 그 옷 좀 어떻게 안 됩니까?”
“나가볼게요.”
남자는 뒤도 안 돌아보고 자리를 떠났다. 이제 새로운 남자가 오고절 앞에 서 있었다. 포마드를 발라 말끔하게 머리를 빗어 넘긴 남자 역시 강렬한 안광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어울리지 않는 사슴처럼 곱고 긴 목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자리를 옮겨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요?”
“거절합니다. 제가 반드시 응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뭐가 잘못된 겁니까?”
“만약 여기가 공공부지라면 전혀 문제 될 게 없겠죠. 하지만 여긴 사유지고, 제가 여기 보안 책임자라서요. 콕 집어 이거라고 하지는 못하는데, 묘하게 싸한 그런 거. 무슨 말하는지 아실 거 같은데요?”
“아아 제 얼굴이 문제를 일으킬 거 같이 생겼단 겁니까? 더러워서 내 더 이상 여기 못 있겠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일부러 빵은 안 사 먹었을 텐데.”
“죄송합니다. 약간의 불안요소도 용납 못하는 체질이라 서요. 언짢은 기분 다 풀리시진 않겠지만, 개인적으로 성의를 표하겠습니다.”
남자는 안쪽 주머니에서 두꺼운 지갑을 꺼냈다. 얼핏 노란색과 푸른색이 도는 종이가 족히 백장 정도는 들어있었다. 오고절은 역시나 이상함을 감지했다.
“이 건물 보안 책임자라 했죠? 내가 그깟 돈 몇 푼에 얼굴 싸악 바꾸게 생겼어요? 참나, 별 희한한 꼴을 다 당하네. 그래요 얼마 줄 수 있는데요. 삼십만 원 줄 수 있어요? 나 이거 참. 이 건물 안에서 돈 쓰는 선량한 고객을 이리 대했다가 인터넷에 글이라도 올리면 어쩌려고요. 회사 이미지는 안 지킵니까?”
“이 공간은 일반 개인들이 잘 찾아오는 데가 아니라 괜찮습니다. 카페며, 식당 모두 회사와 연관된 분들에게 편의를 제공할 목적입니다. 자 여기 있습니다.”
남자는 오고절이 말한 액수에 한 장을 더 해 한 손으로 내밀었다.
“전 홀수가 좋아요. 그래야 다음 일이 이어질 거 같거든요.”
오고절은 지폐를 받으며 다시 한 마디 덧붙였다.
“약속장소를 옮겨야겠네요. 오늘 점심 장소가 여기 지하로 잡혀있었거든요. 근처에 어디 괜찮은 식당 있습니까? 손님이 흡족하실 만한 곳으로.”
“하. 정문 나가서 오른쪽으로 꺾어 이삼백 미터 걸어가면 해장국집 나오니까 거기로 가세요. 그럼 이만.”
“추천 센스가 영 꽝이시네. 아님, 비아냥이 수준급이거나.”
“떠나는 거 보고 저희도 움직이겠습니다.”
“갑니다.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