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정문 한 복판 사람들로 북적이는 카페, 창가에 앉은 두 남자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대화를 나눴다.
“아까 전화로 말씀드린 대로, 이 서약서에 서명을 하셔야 다음 대화가 이어질 수 있습니다.”
똑같은 내용이 인쇄된 세 장의 종이가 맞은편으로부터 훅 들어왔다.
서약서, 본인은 이창주 변호사의 충분한 안내를 듣고 숙고할 시간을 갖은 뒤 자발적으로 본 서약서에 완전히 동의하였으며 아래 항목을 어길 시 그에 따라 발생하는 모든 손해를 배상하겠습니다. 또한 이와 별개로 서약을 지키지 않은 벌로써 3억 원을 이창주 변호사에게 지급할 것입니다.
1. 본인은 향후 25년간 본 업무 중 알게 된 인물, 배경, 대화, 내용에 관련하여 연관성의 유무,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그 어떤 일체의 사항을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일을 진행하는 과정 중에 필요에 따라 제삼자와의 협업을 구해야 한다면 의뢰인 또는 변호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한정적인 내용만 공유하겠습니다. 그 어떤 종류의 정부기관, 언론 매체를 막론하고 법적, 행정적 절차에 의거하여 불가항력적인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정보 발설은 반드시 이창주 변호사와 사전 합의를 거쳐 최소한으로 제공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약벌에서는 절대 자유롭지 못함을 인지합니다.
2. 본 서약에 서명한 이후 본격적인 일의 착수를 위한 구두 또는 서면 계약이나 합의를 체결한 뒤에도 서약은 여전히 유효하며, 본 내용과 배치되는 어떤 조항이나 약속도 서약을 무효화시킬 수 없음을 확인했습니다.
3. 상황 판단이 어려울 시 이창주 변호사와 상의하여 행동할 것이며, 그마저도 여의치 않을 경우 1번을 상기하여 최선의 선택을 할 것입니다.
4. 아래 추가 사항에 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습니다.
이창주 변호사와의 첫 만남부터 업무는 개시된 것으로 간주되며 그 종료는 오로지 이창주 변호사에 의해 확정됩니다.
업무에 관한 그 어떤 기록이나 녹음, 녹화가 불가하며, 유출에 대한 의혹이 발생 시 해명 책임은 본인에게 있습니다.
낱장으로 이뤄졌기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살아 움직이는 듯한 가시덩굴이 목표물을 옭아매려 달려드는 것 같았다. 오고절은 알고 있었다. 인간 사회 계약 대부분은 강자가 약자를 휘어잡기 위해 쓰이는 것임을. 아무리 통속적인 법의 상식을 일탈한 비인간적인 계약이라 할지라도 위법이 입증되고 적극적인 조치가 취해지기 전까지 빈약한 자는 강대한 자에게 자신의 목줄을 내어준 채 살아가야 한다. 서약서가 굉장히 엉성하다는 건 반대로 그만큼 자신 있다는 걸 의미했다. 상대의 생사여탈권쯤이야 제 손아귀에 있다는 확신. 오고절은 잠시 살갗이 파르르 떨리도록 싸늘한 기운을 느꼈다. 이런 불법적인 계약으로 약자를 유린하던 범죄자들이 가장 무서워하던 그가 이번에는 약탈당할 차례였다. 이 자리에 나오는 자체가 꺼림칙한 것 투성이었지만 상대는 궁지에 몰린 그가 쉽사리 거절 못 할 미끼를 던졌다. 하지만 건네진 종이 쪼가리의 첫 문단만으로도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고 그의 직감이 긴박하게 외쳤다.
“당혹스럽네요. 이건 제 생각과는 전혀 다릅니다. 서약을 어긴 벌로써 3억 원은 무조건이고 별도로 손해배상도 청구한다니 지나치다는 말론 부족하군요. 터무니없습니다.”
맞은편 남자는 말끔한 정장에 갈색 타이를 매고 있었다. 목이 길고, 날티 나는 인상과 자신감으로 가득 찬 표정. 키는 약 185센티미터, 몸무게는 80킬로 정도 나갈 걸로 보였다. 몸통은 앞뒤로 커다랬다. 검정 로퍼 구두를 신은 발을 보고 오고절은 조금 긴장을 늦췄다. 하지만 남자는 곧바로 육체가 아닌 조리 있는 말로써 상대를 제압할 능력이 있음을 몸소 알려줬다.
“오고절씨 사회생활 꽤 오래 하신 걸로 아는데 단순한 면접만으로 오백만 원을 받는다는 게 가당치 않다 생각진 않으셨습니까? 그거야 말로 도둑심보지요.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 왜 그러십니까.”
“물론 돈의 가치를 웃도는 뭔가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곤 생각했습니다만, 이건 저라는 인간이 감당할 정도가 아니기에 물러나는 겁니다. 제가 여기서 서명하지 않고 일어서면 피차 피곤할 일이 안 생길 테니 이쯤에서 멈추도록 하죠.”
“그렇죠. 뭐 이대로 일어나면 당신이 책임질 것도 제가 손해 볼 것도 없습니다. 제가 보통 수임료로 한 시간당 150만 원 청구하거든요? 물론 지금같이 아무런 결과물이 없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발생합니다. 이 테이블에 올려진 싸구려 커피 값은 법인카드로 긁은 거고요.”
남자는 말을 하다 말곤 컵을 옆으로 눕혔다. 식은 커피는 테이블 위를 흐르다 바닥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오고절은 빤히 남자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러나 상대는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그러다 그는 이내 유리컵을 들었다가 액체가 흘러내린 바닥에 놔버렸다. 잔이 깨지는 소리가 사방에 퍼지니 소란스럽던 가게 안이 순식간이 조용해졌다. 점원이 황급히 테이블 쪽으로 달려 나왔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손이 미끄러져서요.”
“괜찮습니다.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실까요?”
곧 종업원 한 명이 더 달려왔다. 테이블을 닦는 사람, 바닥을 대걸레로 훔치는 사람 두 사람이 분주히 움직였다. 남자는 씩 웃으면서 그들을 바라봤다. 연신 죄송하다, 감사하다, 친절하다는 말을 내뱉었으나 그는 종업원이 걸레질을 하는 동안에도 절대 발을 치워주지 않다가 걸레를 지그시 한 번 밟아 구두바닥에 묻어 있을 커피를 닦아냈다. 어느새 그의 얼굴은 환한 미소로 가득 차 있었다.
“보셨죠? 제가 이렇게 장난치는 동안에도 전 돈을 벌고 있다니까요? 하물며 저 친구들도 이 난장판을 2, 3분 동안 치우면서 몇백 원 정도 벌었겠죠? 근데 오고절씨만 저 넓은 강 건너 여기까지 왔다 갔다 하면서 아무것도 얻질 못했어요. 근데 그건 앞으로도 마찬가지 일거고요. 아아 근데 그건 아시죠? 이 불행이라는 게 있는 것뿐 아니라 없는 거 마저도 기어이 앗아간다는 거. 최근 조환생명 자금난이 상당해요. 오죽하면 우리에게 법정관리를 의뢰할지 말지 얘기하고 있다니까요. 아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돈을 만들려고 할 겁니다. 거기다 대고 제가 비싼 수임료 받으면서 아무런 조언도 안 해드릴 수 없잖아요. 이거 저거 던질 겁니다. 받아들이든지 말든지 하면서, 가령 배임횡령, 그 밖에 회사에 손해를 끼친 인간들에게 소송을 걸어서 손쉽게 회수 가능한 것부터 뺏자는 방법 그런 거 말이죠.”
남자는 아래턱을 쭉 빼며 즐겁다는 듯이 끌끌 웃었다. 오고절은 심장이 마구 뛰었다. 무서웠기 때문이다. 세상엔 두 가지 협박이 있다. 가해자 자신도 다칠 각오를 하고 벌이는 일과 가해자가 아무런 위험에도 노출되지 않는 안전한 유희거리. 이건 마치 작은 대야에 갇혀있는 개구리를 향해 개구쟁이 아이가 돌을 던지는 일과 흡사했다. 돌멩이에 대가리가 으스러지고, 내장이 찍 하고 삐져나와도 저항은 꿈도 못 꿀 힘의 차이. 당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감당 안 될 상황이다. 그것만은 피해야 했다. 오고절은 애써 태연한 척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상대의 표정이 정확히 말해주고 있었다. 오고절의 허벅지부터 엉덩이까지 땀으로 가득 찼음을, 그런데도 절대 일어설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는 걸, 그 빌어먹을 사실들을 너무나 속속들이 알고 있음을.
“변호사님, 제가 면접을 보고도 그 일을 거절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그쪽에서는 괜히 오백만 원만 날리는 거고, 의뢰인께서도 애써 낸 시간을 헛되이 쓰시는 거고. 도리어 더 번거로운 게 아닙니까? 물론 제가 여기에 서약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저랑 통화하신 일을 비롯해서 모든 걸 함구할 겁니다. 그러니 심장 약한 절 겁 주는 건 관두세요.”
남자는 피식 웃으며 창밖을 바라봤다.
“제가 뭐 불법적인 일이라도 했습니까? 떠벌리고 싶으시면 맘대로 하세요. 신고를 하시건 뭘 하시건 신경 안 씁니다. 아시잖아요. 이 나라 힘없으면 아무리 나쁜 일도 입증 못한다는 거. 하물며 법에 걸릴 짓이 일어나질 않았는데 제가 걱정할게 뭐가 있어요. 안 그래요? 그리고 면접에 응하신 뒤부터는 의뢰인이 처리하실 일입니다. 가셔서 거절하시는 건 제가 일을 못한 게 아니잖아요. 거기다 오백만 원은 돈도 아닙니다. 이쪽 세계에선 그래요. 그렇다고 거지에게 적선하지도 않겠지만.”
그가 사용하는 단어 중 거슬리는 게 여럿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거지라는 말에서는 잘못을 들킨 것처럼 뜨끔했다.
“면접만 보러 가면 제가 돈을 받는 거죠?”
남자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흰 봉투 하나를 꺼냈다.
“이 자리에서 바로 드릴 겁니다. 면접 결과랑 무관합니다.”
눈앞에 한 달치 월급이 놓여 있었다. 입만 다물면 되는 것이다. 25년 밖에 안 된다. 남자는 세 장의 서약서를 가지런히 정렬했다. 오고절은 챙겨 온 만년필을 꺼냈다. 뚜껑을 여는데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뚜껑은 분리됐고, 겹쳐진 두 장에 신중히 서명했다. 다시 겹쳐진 두 장에는 조금 더 천천히 서명이 그려졌다. 이미 시작된 이상 각 장의 하단에 있는 이름과 서명란은 신나게 슥슥 채워졌다. 남자는 가져온 서류철을 꺼내 문서를 꼼꼼히 챙겼다. 오고절은 두툼한 봉투를 얼른 안주머니에 넣었다. 자신도 나름 질 좋은 양복을 입었다고 생각했는데, 맞은편 남자가 걸친 옷과는 비교가 안 됐다. 하긴 자신의 옷은 벌써 십 년도 더 된 것이다.
“봉투 안에 시간이랑 장소, 방법 있으니까 그대로 하시면 됩니다.”
“아까 말씀하셨던 조환생명 건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에이, 오고절씨 선수끼리 왜 이럽니까? 그래서 큰 일 하겠어요? 앞으로 잘해봅시다. 혼자 결정하기 어려운 일 있을 때마다 나에게 전화하라고 쓰여 있잖아요. 우린 이제 한 팀이라고요.”
남자는 오고절의 팔을 툭 치더니 싱그러운 미소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내가 앞으로도 당연히 자기와 연락할 거라 믿고 있군. 내가 만나야 할 사람은 대체 어떨지 궁금하네. 난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평소라면 바로 은행으로 가 돈부터 입금했겠지만 그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휴대폰을 켜 메시지 하나 보냈다.
‘햇살이 참 좋아요. 애기랑 소풍이라도 다녀와요.’
무음이었던 상태를 진동으로 바꾸고 잠시 기다렸다. 해는 뉘엿뉘엿 기울어졌고, 세상은 조금씩 빛을 잃어갔다. 차갑고 진한 브루 커피를 한 잔 더 시켜온 고절은 누구라도 자신을 발견해주길 기다렸다. 수렁으로 빨려 들어가는 자신을 친절한 누군가 알아봐 주길 바랐다. 혼자서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더 빠르게 몰락한다는 걸 이미 경험한 바 있었다. 도움이 필요했다. 하지만 역시나 그는 세상에 덩그러니 던져져 있었다. 얼음을 와그작와그작 씹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서영에게 문자를 간결히 보냈다.
‘변호사와 만났어. 면접 보러 갈 거야.’
읽음 처리가 된 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과거 그들은 한때 서로의 찬란한 순간을 탐닉했었다. 하루는 오고절이 그녀에게 뜬금없이 메시지를 보냈었다.
‘당신은 내게 컬러 티브이 같은 사람이야.’
‘갑자기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당신이 나타나기 전까지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흑백티브이였는데, 당신이 나타난 뒤부터 세상에 색이 입혀지더라고.’
‘컬러티브이라. 어디 가서 그런 이상한 말 멘트로 날리지 마라.’
‘머저리, 미저리’
‘됐고, 이따 떡볶이나 주문해 놔.’
그때 그녀의 단호한 거절 표명에 더 표현하지 못했지만 사실 그녀가 그에게 선사한 의미는 남달랐다. 숨 쉴 때마다 그리 긴장하지 않아도 되는 거였구나, 내일에 대한 두려움만큼 어리석은 게 없구나, 오늘의 날 울상 짓게 만드는 건 과거의 아픔도 상처도 아니었음을. 그것을 허락한 건 바로 나 자신이었음을 알려줬다. 무엇보다 고마운 건, 그따위 고리타분한 망상은 가장 가까운 상대의 목을 조르는 가학행위라는 걸 일깨워 줬다는 점이다.
'제발 숨 막히게 하지 마. 너 자신도, 나도. 남 앞에서 함부로 슬픔을 드러내지 마. 석양을 무서워하지 마.'
아슬아슬했던 둑이 무너지듯 그녀에 관한 기억이 흘러넘쳤다. 밝은 웃음소리가, 누구나 눈길이 가는 보조개를 머금은 환한 미소가, 그 뒤에 숨겨진 서글픔이, 불의에 꼿꼿하게 맞서던 그녀의 태도가, 어디서나 존재감을 드러내던 그녀의 표상이, 그의 머릿속 오랜 슬라이드 사진 여러 장에 나눠 쌓여 있었다. 마음에 볕이 들 때면 그 빛을 이용해 낡은 환등기를 켰다. 그리고 그것들을 꽂아 딸깍딸깍 넘기며 바랜 추억을 영사했다. 그 사진이 투사된 배경은 손 대면 빨려 들어갈 듯이 까만데 네모 화면만은 촌스러운 아날로그 색상의 컬러였다. 따스한 색상이었다. 자신의 모습이 담겨 있진 않았으나, 분명 그 주변에서 멋쩍게 웃으며 은근슬쩍 자신도 그 영역으로 한 발 들어오고 싶어 하는 남자가 있었으리라. 오고절은 광정문 한복판에 자리 잡은 문고에 들어갔다. 이어폰을 꽂아 세상과 자신을 단절시킨 채, 숲을 배회하듯 서가를 돌아다녔다. 활자를 읽지 않고 손끝으로 만져가면서 한때 나무였던 것들을 인식했다. 미친 건지 모르겠지만 때때로 종이 위에 새겨진 문자의 볼륨이 가늠될 만큼 그는 그 안에서 얇게 존재했다.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만큼은 모든 게 순조로웠다. 하지만 반드시 끝이 있었다. 컴컴한 밤, 은행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닫혀있었지만, 그 옆으로 나 있는 공간은 더욱 환했다. 남자는 그 안에 자리 잡은 기계 중 하나에 대고 자신의 몸에서 뽑아낸 피를 수혈했다. 봉투에는 손바닥만 한 하얀 종이도 따로 들어있었다. 아무 데서나 접하지 못할 정도의 고집스러운 사람의 품이 들어간 정통 한지였다. 또한 그 위에는 면의 격에 어울리는 잉크가 알맞게 스며들어 있었다. 일정 고위 공직자에게만 수여되는 손글씨처럼 반듯한 글자가 또렷하면서도 결코 과하지 않으며, 일정하고 차분히 적혀있었다. 오고절은 천장에서 내려오는 밝은 빛을 향해 종이를 들어 비춰봤다. 흠잡을만한 점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그렇게 특이한 방식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납득했다 하기엔 너무 무기력했고, 순응했다고 하기엔 아직 눈이 빛났다.
“방안 공기가 평소완 다르네요. 밤새 숙면을 제대로 취하질 못했어요. 조치해 주세요.”
거울 속 자신을 한참 들여다보던 남자가 여전히 시선은 자신의 갈색 눈과 맞춘 채 물 흐르듯 이야기했다. 그의 뒤에는 고개 숙인 남녀 네 명이 서 있었다. 그중 한 명의 남자가 얼른 대답해다.
“네, 저 김홍집이 오전까지 문제를 파악한 다음 반드시 해결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답을 들은 남자는 대꾸 대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유럽풍 가구가 배치된 방 한가운데는 마력이 깃들어 있을 법한 커다란 타원형 거울이 웅장한 틀에 끼워져 있었다. 마치 동화 백설공주 속 왕비에게 진실을 말해주던 거울과 흡사했다. 엄밀히 따지면 그 집안에 있는 반사면에도 어느 정도 마법이 스며들어 있긴 했다. 누구에게나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서 씨 집안의 적통에게만 생의 진리를 답해주는 신비한 기물이다. 적어도 백 년은 족히 넘도록 서의 성을 지닌 이들은 매일 그 앞에 서서 묻곤 했다.
‘내가 오늘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물론이지, 네가 단 한 사람만 무참히 꺾을 수 있다면.’
그들에게 하루하루는 피비린내 나는 전투였다. 태어난 순간부터 전장에 들어선 것이고, 평화는 죽음이라는 의학적 판명이 내려져야지만 비로소 허락됐다. 그래서 늘 가슴 한편에 차갑고 날카로운 칼 한 자루를 품고 다녔다. 아무리 가죽이 두꺼운 짐승이라 할지라도 쑥 밀어 넣기만 하면 심장까지 닿을만한 명검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이 검은 약 이천오백 년 전 중국 남쪽에 있던 어느 나라 왕의 가슴을 꿰뚫은 적이 있다고 전해진다.
이야기는 대충 이렇다. 한 나라의 남자가 사촌동생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그는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듯한 분노가 일었으나 기회가 올 때까지 매 순간 스스로를 억누르며 버텼다. 그는 적당한 시기가 되자 원수처럼 여기는 왕이자 사촌동생을 집으로 초대하여 축하연을 열었다. 거짓된 왕좌를 찬탈한 왕은 암살의 위험을 두려워한 나머지 내로라하는 장인이 벼린 갑옷을 언제나 착용했다. 하지만 음식을 나르던 시종이 팔뚝만 한 물고기 뱃속에서 꺼낸 검으로 왕의 비곗덩어리 가슴을 찌르니 푹 삶아진 잉어의 살코기가 발라지는 것처럼 쑤욱 들어갔다고 한다. 왕은 단숨에 절명하여 숨 한번 제대로 들이마시지 못하였다. 그런 무시무시한 검을 왼쪽 가슴 한편에 품고 다니니 그들은 항상 죽음을 똑똑히 기억했다.
‘누군가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그게 너인지 아닌지만 결정해라.’
남자의 할아버지는 손자의 가슴팍에 짱짱한 소가죽 칼집을 달아주며 말했다. 집안에 엘리베이터가 있었으나 그는 이용한 적이 없다. 대리석 계단을 내디딜 때 나는 구두 소리가 행진하는 군대의 군화 소리같이 감미롭게 들렸다. 마음에 안정감이 찾아왔고 자신의 안위가 안전할 거란 믿음이 생겼다. 현관은 갈색의 오래된 나무로 짜여있다. 중세 유럽 상류사회 양식을 따른 집안에는 복식부터 기거하는 사람들의 자세까지 철저하게 획일적이었다. 절대 배를 쭉 내밀거나 팔자걸음을 걷는 이도 없었다. 허리를 바로 펴고 꼿꼿이 걷는 게 기본 중에 기본이었다. 문을 열고 나가니 너른 정면에는 미의 여신과 그의 아들이 조각된 분수가 자리 잡고 그 주변에는 자갈 깔린 회차로가 있었다. 옛 유럽 귀족만큼 너른 장원을 품고 있진 않았으나 한 국가의 수도 한복판에 이 정도의 부지와 여유로움은 검은 기와의 주인만 가질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남자에겐 그다지 부러운 자리는 절대 아녔다. 겨우 칠 년짜리 시한부 직책. 그 이후에는 반드시 죽음 또는 그에 못지않을 처벌이 기다리고 있는 그런 임시직은 누가 맡던 중요치 않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뭐니 뭐니 해도 ‘근본’이 중요했다. 하지만 사실 이 땅에는 애초에 그런 뿌리가 없었다. 그냥 어중이떠중이 착각쟁이들이 판치는 땅. 강자에겐 벌레처럼 비굴한 모습을 유지하며 그들이 먹다 흘린 부스러기를 주워 먹다가 비대해지면 자신보다 약한 이를 착취하는 게 당연해져 버린 사회.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반드시 지켜야 할 품격 따윈 이미 오래전에 잊어버린 군상들의 모습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지는 이 땅. 의식은 참으로 미개하지만 그 몸뚱이만은 아직 써먹을만한 이곳.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녔다. 그에겐 허깨비들이 아웅다웅하는 이 끈적끈적한 수렁에서 얼른 탈출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행동의 기준을 그때그때의 이해관계에 두고, 혹시나 힘 있는 자의 눈에 들지 싶어 더 악다구니를 부리는 이들을 보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포름알데히드나 암모니아가 풍기는 찌든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 손수건을 꺼내 코를 막고 싶은 적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현관문을 나선 순간 그는 그런 기색을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카모플라쥬, 포식자는 이 색다른 능력을 이용하여 먹이를 빨아먹는다. 쪽쪽 빨리는 쪽은 자신의 체액이 빨리는 것인지 영혼이 잠식당하는 것인지도 눈치채지 못한다. 그들을 은은히 달래 가며 안심시키고 수탈하는 것. 그것이야 말로 아랫사람들을 다스리는 존귀한 자가 갖춰야 할 덕목이었다. 높다란 담장 바깥 사방팔방에는 중진국들의 허세 섞인 대사관들이 성벽처럼 둘러져 있었다. 외부에서 이 공간을 들여다보는 건 허락되지 않았다. 비행금지 구역으로 지정된 탓에 헬기마저도 함부로 드나들 수 없다. 그 공간의 유일한 영주. 그가 바로 허리를 바로 세우고 당당한 걸음을 내딛는 서남은이다. 그는 국산차 중에서 가장 비싸고 안전한 뒷공간에 자리 잡았다. 상체보다 하체가 월등히 쭉 뻗은 그에게는 아무래도 외제차가 어울렸으나 앞 좌석에 앉은 왜소한 운전사가 자리를 바짝 당겨 앉으면 될 일이었다. 어깨를 포개지 않아도 세 명은 넉넉히 앉을 뒷 공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그의 어깨는 넓다 못해 광활했다. 서양인보다 움푹 들어간 눈두덩이, 산맥처럼 길게 뻗은 콧대는 코카서스인의 보기 좋은 외형을 떼다 박아놓은 듯했다. 남자는 여전히 허리를 편채 왼팔을 차문 거치대에 살짝 기댔다. 그가 편히 자리 잡는 동안 그를 태운 차량은 철제문을 통과했다. 그 좌우에는 정복을 갖춘 남자들이 고개 숙여 그를 엄숙히 배웅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허리를 최대한 숙여 그들의 진심 어린 존경을 드러냈다. 차량이 대로에 들어서자 대각선에 앉아 있던 사람이 뒤 남자에게 또박또박 말을 꺼냈다.
“공작님, 지금부턴 공작님을 총재님이라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일정을 얘기해 주세요.”
“지금 바로 천문대 병원으로 가셔서 이번 전염병을 이겨낼 수 있도록 앞장선 의료계 리더들을 만날 것입니다. 그들의 노고로 이 나라 의학 수준이 세계에서 모범적인 사례로 오르내릴 만큼 인상적인 평가를 얻었음을 언급해 주시면 됩니다. 총재님의 오른편에는 위서해 천문대학병원 원장이 앉을 것이고, 왼편에는 강태우 부처 차관이 앉을 겁니다. 나머지 인원들의 앞에는 명패가 있긴 하지만 일부러 직접적인 대화를 나눌 기회를 주진 않을 겁니다.”
“오늘 내가 그 자리에 참석하는 명분과 효과는?”
“총재님께서는 유망 의료인들에게 개인적으로 최대 장학금과 각 2차 병원들에게 고가의 장비를 기증하시는 대국민보건의료재단 이사장님을 역임하고 계십니다. 이 나라 의료발전에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크게 기여하고 계시죠. 그런 분께서 그들의 엘리트 의식을 고양시켜, 그들이 여느 길거리의 우매한 이들과는 생각이 달라야 함을 일깨워주시는 겁니다. 내년에 있을 작은 행사에선 우리가 내세운 사람이 사회자가 돼야 할 시기니까요.”
“내 상식으론 도무지 이해가 안 가. 이번 사태는 분명 지금 사회자의 리더십과 건전한 판단, 헌신적인 솔선수범이 없었다면 나라의 격을 두 단계 정도 격하시킬 대사건이었단 말이지. 근데 얼마나 지나지도 않아 비난이 여기저기서 난무하잖아. 사람들은 그 소중함을 깨닫지 못한 건가? 신의를 조금이라도 아는 인간이라면 고마움에서 비롯되는 도리를 조금은 자각해야 하지 않아? 그러면 비록 내가 내세우는 인간이지만 그 천박하고 지저분한 사람이 다음 사회자가 된다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인데 말이야.”
“총재님의 말씀 너무 옳으십니다.”
“하긴 그건 인간다움을 제대로 배운 사람에게만 통할 이야기지. 그냥 해본 말이야. 세상이 완벽한 곡선으로 이뤄져 있다면 헛돌 뿐이지. 군데군데 이가 빠진 톱니들이 맞물려야 돌아가는 것처럼. 우리가 이 모자란 모양을 억지로 끼워 맞추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인 거야. 완벽이 고귀한 이유는 불완전이 도처에 깔려 있기 때문인 게 바로 모순된 진실이고 인간세상이야.”
"죄송합니다. 저는 그 정도까진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오후부터 내일까진 일정이 비워져 있습니다.”
“벌써 한 달 반이 다 됐단 얘기네. 시간 참 빠르군. 지난번 그 여자인가?”
“아닙니다. 이 여사님이 말씀하시기론 새로운 사람이라고. 이유는 따로 여쭤보지 않았습니다.”
“그래 물어봐선 안 되지. 그건 자네의 영역을 벗어나는 일이니까. 그건 그렇고 조금은 서글퍼. 내가 처음 씨앗을 뿌리기 시작했을 땐 15일 간격이었어. 하지만 오 년에 오일 씩 휴지 기간이 늘어나. 미국 중부 소도시에 있는 클리닉에 방문할 때마다 난 노화를 선고받는 거야. 바로 그 전날까지만 해도 난 내 나이를 전혀 모르고 있다가 생체 진단이 끝나자마자 한 천 팔백일만큼의 나이를 한꺼번에 소급 적용받아 늙는 거지. 그러면 다음 날부터 거짓말처럼 모든 신체기능은 그녀 또는 그의 말에 딱 맞춰 노쇠하더라고.”
“총재님, 방금 전 말씀은 녹음에서 삭제하시는 게 어떨까요? 젊음을 그리워하시기엔 아직 이르십니다.”
“그래. 그러도록 하지.”
그들의 대화가 녹음되는 장치 따윈 없었다. 최비서의 제안은 일종의 우려 섞인 충언이자 강도 약한 경고였다. 더 이상의 감정에 파고드는 건 금물, 또한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총재의 말을 머릿속에서 싹 비워내는 걸 의미했다. 총재란 직책이 대물림되는 남자들에게 감정이라는 건 오로지 홀로 있을 때만 드러내야 하는 치부였다. 특히 후회나 아쉬움, 미안함 따위는 절대 품어선 안 될 독과도 같았다. 총재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가 빨아들이는 연기가 육체적 건강에는 해가 될지 모르나 허튼 말이 초래 할 결과보다는 덜 치명적이었다.
‘쿵’
총재의 손가락 사이에 끼운 담배의 큼지막한 재가 허벅지로 떨어졌다. 끄트머리에 남아있던 열기로 모직이 살짝 타들어갔다. 순식간이지만 미세한 그 잔향이 그의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운전석에서 뛰쳐나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길길이 날뛰는 상대 운전기사를 바라봤다. 그의 몸짓 하나, 말 한 도막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는 마치 사진작가라도 된 것처럼 쉴 새 없이 셔터를 눌러댔다. 그것도 모질라 고무판을 가져와 조각칼로 섬세히 새겼다. 사소한 것이라도 놓칠세라 숨까지 멈춰가며 응시했다.
‘아. 이건 계시야. 더 이상 참지 말라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국가 금융의 중심지, 이 좁은 땅에서 하루 거래되는 금액은 수십조다. 발에 땀나도록 뛰고, 온몸이 뒤 틀리도록 움직여 사람이 실제로 손에 쥘 수 있는 물건 하나가 지닌 가치보다 수만 배가 넘는 돈이 클릭 몇 번으로 만들어진다. 새벽부터 일몰 바로 직전까지 어마어마한 열기를 내뿜던 이 길거리는 밤이 되자마자 놀라우리만큼 한적해진다.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던 거인이 내일의 시작을 기대하며 일찍 잠자리에 든 것처럼.
오고절은 이름 모를 작은 공원 벤치에 앉아 있다. 아직 시간이 안 됐기 때문이다.
‘밤 열한 시 삼십 분 코모렉스 호텔 주차장 오른편, 장화 신은 남자에게 공고를 보고 왔다고 할 것. 어떤 질문도 의문도 제기하지 말 것이며 그냥 시키는 대로 할 것.’
시간이 되자 그는 정해진 장소로 이동했다. 거기에 한 고집스럽게 생긴 노인이 낡은 다갈색 점퍼를 걸치고 있었고, 안에는 민망할 정도로 늘어난 러닝셔츠를 입고 있었다. 신발은 분명 장화였다. 발밑에 흩어진 꽁초를 보니 적잖이 서성였던 모양이다.
“안녕하세요. 공고 보고 왔습니다.”
“씨펄, 장난하나 왜 이렇게 늦게 와? 돌았어?”
“시간이 그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아직 5분이나 남아 있는데.”
“입 다물어. 일을 하려면 삼십 분 전부터 와서 기다려야지. 요즘 것들은 하여간 정신이 썩어 빠져 가지고. 대신할 다른 새끼가 있으면 발로 고추를 걷어차 버리는 건데 말이야.”
그러더니 건물 한편에 숨겨진 통로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도 꽁꽁 숨겨져 있어 입구에 작은 백열전등이 달려있지 않았다면 누구도 모를 곳이었다. 오고절은 잠깐 멍하니 그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야 이 새끼야, 얼른 안 쫓아와?”
“네, 지금 갑니다.”
‘이 할배가 의뢰인인 건가? 엄청난 재물이 있는데도 저렇게 허름한 차림으로 밑바닥 일부터 한단 말이지. 정말이지 고전적이면서도 성공에 납득할만한 근면함이다. 신경 거스르지 말아야겠다.’
층이 높은 계단을 따라 내려갔고 또 미로처럼 복잡한 길을 굽이굽이 지나쳤다. 노인은 휙 하니 점퍼를 멋들어지게 벗었다. 아니나 다를까 지하의 열기로 인해 오고절도 땀이 삐질삐질 흘러나왔다. 둘은 조금 더 들어가 화물용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미친놈, 그 복장을 하고 일하러 온 거야?”
노인이 감춰 뒀던 이와 이 사이의 텅 빈 공허가 오고절의 눈에 확 들어왔다.
‘공적인 만남에서만 탈착식 임플란트를 착용하는 건가. 평소에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고수하는 거고. 무섭다 무서워.’
“죄송합니다. 급하게 오느라.”
“괜찮아. 누구나 잘못하는 거야. 갈아입을 옷 줄 테니까 걱정 마.”
갑자기 노인의 말투에 온기가 담겼다. 궁금한 점 투성이었지만 그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침묵은 오고절이 가장 좋아하는 상태였다. 그들이 도착한 장소 구석엔 어울리지 않는 철망 벽으로 세워진 사무실이 있었다.
“5번 사물함에 옷 있으니까 갈아입어. 장화는 저기서 발에 맞는 거 신고. 그 담에 저짝으로 튀어와.”
할아버지는 손가락으로 여기저기 휙휙 가리켰다.
“네 알겠습니다.”
‘내 몸에 혹 도청장치나 어떤 기기가 있을지 대비하는구나. 철두철미하다.’
함 안에는 새 거는 아니지만 세탁해 놓은 라운드 면티 하나 모시 재질의 반바지 하나가 개어져 있었고, 고무재질로 된 멜빵바지가 걸려 있었다. 사방이 틔여 있었으나 누가 볼 것 같지도 않아 오고절은 옷을 훌러덩훌러덩 벗었다. 의뢰인과의 첫 만남에 믿음을 주고도 싶었고, 날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노인의 모습이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그래서 자신도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면티에는 시큼한 냄새가 배어 있었으나 잘 말려져 있었고, 반바지는 통풍이 잘 됐다. 휴대폰을 비롯한 모든 물품과 옷가지를 함에 넣고 신발장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장화 중 하나를 신은 다음 노인이 간 방향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거기서 노인은 비슷한 연배의 다른 노인과 간이 의자에 앉아 함께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이 친구야? 오늘 일하러 온 게?”
“응, 미친놈이야 웬 정장을 입고 왔더라니까, 그래서 내가 내 거 남는 옷 빌려줬지.”
고운 모래 깔린 재떨이에 담배를 끄고 오고절을 올려다보던 노인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괴팍하게 소리쳤다.
“아니. 선생님, 왜 제가 퇴근할 때 입을 셔츠를 입고 계세요? 아니 멜빵바지 입으라 했지 누가 그걸 빌려드린다고 했나요?”
“아니, 그게 저는 사물함에 있는 옷으로 갈아입으라 하셔가지고, 죄송합니다. 지금이라도 가서 벗어놓겠습니다.”
“선생님의 피부에 닿은 옷을 제가 또 굳이 입어야겠습니까? 그냥 입고 일하십시오. 나원 참 별 꼴을 다 보십니다. 그려.”
오고절은 말문이 막혀 멋쩍은 표정으로 이 상황이 얼른 무마되기만을 바랐다. 다행히 옆 자리에 앉은 노인이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아줬다.
“아 내버려 둬, 모르고 그랬다잖여. 똑바로 말 안 해 줬으니까 그랬겠지. 안 봐도 훤하지 뭘.”
오고절은 속으로 격한 동의를 했으나 내색하진 않았다. 그러자 노인이 불같은 노기를 분출했다.
“아니 시봉거 상식이라는 게 왜 필요한데, 아니 그러합니까? 옷 도둑 선생님?”
오고절은 애써 웃음을 지었다.
“아 이제 그만해. 시간 다 됐어. 레스토랑 주방 다 정리됐을 거야. 얼른 가서 물건 빼야 돼. 안 그럼 저번처럼 난리 나. 그리고 나만 알고 있는 걸 남에게도 똑같이 강요하면 안 되는 거라고.”
“그래 그래. 내 모시 빤스만 안 입었으면 됐지.”
“저 친구 얼굴을 봐. 그 정도 지각도 없게 생겼는가.”
“얼른 가시죠. 물건 가지러 가셔야죠.”
셋은 바퀴 달린 통을 하나씩 끌고 화물용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오고절은 대체 무슨 물건을 가지러 가는 건지 계속 머리를 굴려봤다. 그런데 자신이 부여잡고 있는 건 누가 봐도 음식물 쓰레기통이었다. 에이 설마 하면서도 그 틈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냄새가 연신 자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그만 인정하라는 것만 같았다. 백색 노인은 47층에서 내렸고 오고절과 흑색 노인은 77층에서 내렸다. 그는 영업 끝난 뷔페로 안내됐고, 그곳의 음식물 수거와 접시 세척이 맡겨졌다.
‘빌어먹을 대체 나의 어떤 걸 시험하려고 하는 거야.’
시계나 휴대폰을 지니지 않아 시간 가늠이 되지 않았다. 온몸은 땀과 튀긴 물방울로 흠뻑 젖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그는 그에게 맡겨진 일을 다 해내야 끝난다는 걸 진즉 받아들였다. 중간중간 쉬는 시간이 있었으나 말수가 더욱 줄어들었다. 이건 분명 뭔가 잘못됐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제 마무리는 우리가 할 테니까. 옷 갈아입고 가봐.”
노인이 입을 꾹 다문 오고절에게 말했다.
“이제야 된 겁니까? 어디로 가면 됩니까?”
“뭔 개소리를 삐약삐약 내고 있어. 집으로 가 집으로. 홈. 크레이지 유 고 홈.”
그는 속에서 열불이 났지만 어디까지가 시험의 끝인지 몰라 순순히 옷을 갈아입으러 사물함으로 향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아무도 보이지 않자 순식간에 옷을 갈아입었다. 반바지는 옷걸이에 잘 걸어두었다. 잠시나마 마르기를 바랐다. 노인이 나타나자 오고절은 물었다.
“진짜 그냥 갑니까? 이게 끝입니까?”
“이 새끼, 그냥 가면 내가 입 싹 닦으려 했는데, 안 통하네. 자 받아. 만원 더 넣었어.”
오고절은 건네진 흰 봉투를 받아 들었다.
“따라와, 나가는 길은 따로 있어.”
그들은 또 굽이굽이 길을 지났고 이번에는 주차장을 지나 다른 통로로 향했다. 오고절 혼자 로비로 가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봉투를 열어보니 만 원짜리 지폐 열한 장이 들어 있었다. 다른 종이도 들어 있지 않았고, 표식 비슷한 것도 찾지 못했다.
“면접에 떨어졌다는 의민가. 어쩔 수 없지 뭐.”
시계는 새벽 4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잠시 눈을 감고 어떤 이유로 자신이 탈락했을지 추측해 봤다.
‘상식에 어긋나는 인간이란 평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팬티를 입었다고 솔직히 말하지 않아서 정직성 점수가 깎인 건가?’
오고절은 로비에서 내려 정문을 통해 나가려 했다.
“고객님, 고객님.”
처음에 오고절은 자신을 부르는 소린지 몰랐는데 그 큰 로비에 서 있는 건 자신 뿐인걸 알고 뒤를 돌아봤다. 이른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정갈하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호텔리어가 서 있었다.
“저를 따라오시죠.”
그는 역시나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여자는 엘리베이터에 타 버튼 하단에 키를 가져다 대고 맨 꼭대기 층을 눌렀다. 오고절은 자신의 몸에 찌든 음식물 냄새가 살짝 신경 쓰였다. 기계문이 열리자 대기하고 있던 남자들이 큰 방으로 향하는 문을 활짝 열었다. 안으로 걸어 들어가니 정면에는 한 단 위에 놓인 책상과 그 뒤편에선 중년 남자가 있었다. 키는 170이 살짝 넘어 보였고, 얼굴은 크고 사각졌다. 무서워 보이는 인상이면서도 입꼬리는 개구지게 살짝 올라가 있었다. 나이는 오십 대 후반, 몸매는....
“나를 훑어보지 말게나. 자네가 뭘 잘하는지 이미 알고 있어. 근데 내겐 그럴 필요도 없고, 그리 해서도 안 돼.”
그의 얼굴은 하얀 종이를 연상시켰다. 고생이란 모르는 순하고 연한 면이 얼굴에 그대로 뒤덮여 있었다. 그 순간 오고절은 민망함과 무력함을 강하게 느꼈다.
‘난 그물에 걸려 오도 가도 못하는 산토끼가 맞았구나. 사냥꾼이 와 내 털가죽을 벗겨야지만 끝나는 거야.’
'궁금하지 않나? 자네가 어째서 여기까지 오게 된 건지.'
'궁금하지 않나? 자네가 어떻게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지.'
'궁금하지 않나? 자네가 앞으로 얼마나 더 비참해 질지.'
하얀 남자는 그로기 상태인 상대를 완전히 자신의 뜻대로 처분했다. 오고절에게는 선택의 여지도, 판단을 내릴 여력도 남지 않았다. 어찌저찌하여 새벽 첫 지하철을 타고 그는 집으로 돌아왔고, 잠든 내내 심각한 악몽에 시달렸다. 몸속 기력을 깡그리 소진해 버린 그는 눈을 뜰 수도,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