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통제 없이 못 걸었던 천리행군

by 설계자K

392km를 걸어본 적이 있는가.


천리. 숫자로 보면 그냥 거리다.

하지만 30kg 군장을 등에 지고, 산길만 골라, 일주일 넘게 그 거리를 걷다 보면 숫자는 아무 의미가 없다.

남는 건 발바닥에서 터진 물집의 진물과, 한 알씩 줄어드는 진통제뿐이다.

1999년, 스물두 살의 나는 왜 걸어야 하는지를 묻지 않았다.


내륙종합전술훈련은 특전사가 2년에 한 번 실시하는 훈련의 양대 축 중 하나였다.

총 4주 간 처음 3주는 내륙 전술훈련으로 정찰감시, 타격, 폭파 등 실전 임무를 수행하고, 마지막 1주일이 천리행군이었다.

경상북도에서 경기도 부천의 9공수여단까지, 대한민국 내륙을 적지로 가정하고 걸어서 복귀하는 것이다.

적 후방에 침투한 뒤 임무를 수행하고 퇴출 작전 시 헬기가 오지 않으면 결국 걸어서 돌아와야 했다.

그 거리가 약 400km. 천리행군은 그 상황을 온몸으로 겪는 훈련이었다.


1999년 가을, 우리 대대는 C-130 수송기를 타고 경상북도 영천에 있는 육군3사관학교 사격장에 공중침투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당일 기상이 악화됐다. 강하는 취소되고, 우리는 60트럭에 몸을 실어 영천 일대에 도착했다. 거기서부터 3주간의 내륙 전술훈련이 시작됐다. 주왕산과 청송 자락의 산속에서 정찰감시 임무를 반복하고, 타격과 폭파 훈련을 수행했다.

3주가 지나고 하루의 정비시간이 주어졌다. 선임하사가 입을 열었다.

"내일부터 천리행군이다."


통상적인 천리행군은 중대별 5일, 지역대별 2일, 1일 정비, 대대행군 무박 2일로 구성됐다.

하루에 40km씩 산길을 걸었다. 하지만 나의 첫 천리행군은 천리행군이 아니라 천리구보가 됐다. 대대장이 선착순 행군을 18개 팀에 지시한 것이다. 도로 이동은 금지됐고, 늦게 도착하는 3개 팀은 그날 밤 경계근무를 서야 했다.


중대장과 선임하사는 마지막 구간에서 구보를 뛰는 전략을 짰다. 우리 중대는 그 전략을 밀어붙였고, 경계근무 없는 밤을 보낼 수 있었다. 며칠이 지나자 다른 팀들도 너나 할 것 없이 구보를 시작했다.

전입한 지 얼마 안 된 후임들의 발바닥은 눈 뜨고 보기 어려웠다. 물집이 터지고, 터진 자리에 새 물집이 올라오고, 겉살이 진물과 함께 양말에 달라붙어 찢겨지며 붉은 속살을 드러냈다. "행군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있었다. 베테랑 선임들도 그 말 앞에서는 예외가 없었다.


하루가 지날수록 대원들은 군장에서 하나씩 버렸다.

특전식량을 먼저 버리고, 칫솔 몸통을 잘라 솔만 남기고, 전투화 상단을 칼로 잘라 버렸다. 숟가락 손잡이도 잘랐다. 1g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다 잘랐다.

하지만 나는 통신이었다. 나는 무전기를 버릴 수 없었다. 줄이고 싶어도 줄일 수 없는 무게였다. 한 선임은 아무 말 없이 내 군장 지퍼를 열고 배터리 두 개를 자기 조끼에 옮겨 넣었다. 나는 그 등을 보며 눈물이 날 뻔했다. 사람은 자기가 가장 힘들 때 도와준 손을 평생 잊지 못한다고 했다.


선임하사는 진통제를 5일 차부터 나눠주겠다고 했다.

처음 한 알이면 하루를 버틸 수 있었다. 며칠이 지나자 휴식 때마다 한 알씩 입에 넣어도 고통은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진통제 없이는 한 발짝도 내딛을 수 없는 몸이 됐다.

천리행군에서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게 있었다. '빽도'. 올라간 산이 그 산이 아닐 때, 중대원 전체의 분노가 한꺼번에 터졌다.

청송에서 출발한 행군은 안동을 지나 문경새재를 넘어 경기도 이천까지 왔다. 마지막 100km 무박 행군을 앞두고 이름 모를 강가에서 하루를 쉬었다. 나는 동기들을 찾아 안부를 물었다. 한 동기는 수염이 산적처럼 자라 있었고, 다른 동기는 발바닥 전체가 벗겨져 있었지만 얼굴에는 이제 끝이라는 기대가 서려 있었다.


마지막 행군이 시작됐다. 열외자는 없었다.

아파서 차를 타고 온 사람도, 행정병이라 빠졌던 사람도, 계급이 높은 사람도 모두 자기 두 발로 여단 정문을 통과해야 했다. 진통제는 모두 바닥났다. 고통을 억누르던 것이 사라지자, 아픔과 함께 이상하게 머릿속이 맑아졌다. 이제 남은 건 악과 깡뿐이었다. 나는 땅만 보고 걸었다. 즐거웠던 기억을, 소중한 사람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그냥 한 발씩 옮겼다.

무박 행군의 새벽이 되자 대원들은 걸으면서 잠을 잤다. 걸으면서 자는 사람은 신기하게도 길 안쪽으로 비틀거리며 들어왔다. 무의식 속에서도 바깥으로 가면 떨어진다는 걸 몸이 아는 것 같았다. 부대가 가까워질수록 지형지물이 익숙해졌다. 새벽 여명이 보여준 것은 소래산이었다. 299.6m. 9공수여단 대원들이 수십 년을 밟아서 낮아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소래산을 넘어 사격장에서 마지막 휴식을 가졌다. 이번만큼은 아무도 졸지 않았다. 모든 대원의 얼굴 위에 웃음이 번져 있었다.


저 멀리에서 군악대의 연주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기적이 일어났다. 절룩이며 이를 악물던 동료가 허리를 폈다. 못 걷겠다고 울던 동료가 눈물을 닦고 발을 내딛었다. 앰뷸런스에 실렸던 동료가 아무 일 없다는 듯 대열에 합류했다. 천리가 끝났다는 엔돌핀이 그들의 모든 고통을 한꺼번에 씻어낸 것이었다. 그리고 정문 너머에는 가족들이 서 있었다. 그들 앞에서 우리는 특전사였고, 우리를 기다려준 그들이야말로 우리에게 특전사였다.

첫 천리행군 때, 나는 군악대가 연주하는 검은 베레모 군가를 들으며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막내 군번의 서러움과 천리길 위에서 떠올렸던 소중한 것들이, 그 군가 소리에 한꺼번에 가슴 위로 밀려왔다.


지금 돌아보면 1999년의 천리행군이 내게 남긴 건 인내심이 아니었다.


나는 이유 없이 걷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왜 이 길을 가야 하는지를 묻지 않았다. 이 명령이 합리적인지를 따지지 않았다. 발바닥이 벗겨져도 걸었고, 진통제가 바닥나도 걸었다. 첨병이 길을 잘못 잡아도 돌아가서 다시 걸었다.

그 복종이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군장을 나눠 메어주던 선임의 어깨, 걸으면서 잠든 동료를 안쪽으로 밀어주던 손, 정문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가족의 눈물. 그것들은 모두 진짜였다. 나라를 지키겠다는 마음은 거짓이 아니었고, 생사를 함께한 전우애는 연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걸으면서 나는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왜 이 방향인지, 이 고통이 정말 필요한 것인지. 물을 수 있었지만 묻지 않았다. 물을 필요가 없다고 배웠으니까.


1999년의 나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지금도 누군가는 그 길을 걷고 있을 것이다. 검은 베레모를 쓴 스물 남짓한 청년들이, 진통제를 한 알씩 아끼며, 물집 위에 물집을 쌓으며, 묻지 않고 걷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과연 걸으면서 한 번이라도 물어본 적이 있을까. 이 길이 맞는지. 이 명령이 옳은지.

'명령이 잘못되었을 때도, 그들은 묻지 않고 걸을까?'

그때의 나처럼.

그 질문은 1999년에는 오지 않았다. 하지만 내게는 곧 올 것이었다.


이전 10화제주도 한 달 살기(특전사 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