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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라

by 뜰에바다

2천 년 전, 신이면서 신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예수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나라'를 선포하고 가르치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수많은 예화가 사용되었다. 대부분 사람이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알아들을 수 있는 들이었다. 예를 들면 이렇다.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다."


겨자씨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알갱이다. 그런데 겨자씨를 땅에 심으면 싹이 나서 자란다. 그 싹은 곧 풀이되고 가지를 낸다. 후에는 큰 나무가 된다. 보통 1~2년생 풀이지만 1m 정도로 자라고,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약 3m까지 자라기도 한다. 큰 나무처럼 무성해지니, 당연히 공중의 새들이 깃들고, 사람들은 그늘에 와서 쉰다. 하여 예수는 겨자씨를 잘 아는 사람들에게 덧붙였다.

"겨자씨가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제자들은 겨자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가 하는 말의 요지를 잘 알아들었다. 유일하게 잘 못 알아들은 말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의 실제적인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목격하므로 완전히 반전되었다. 하여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제자 모두가 오히려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계기가 되었다.


여러분도 예수의 말을 잘 알아듣는가?

예수가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아는가?

오늘, 우리는 예수의 말들을 왜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일까?

장 쉬운 예화조차 못 알아듣는 이유가 무엇일까?

유대문화 배경이 아니어서?

꼭 그럴까?

아니다. 예수의 말뜻을 입안에 넣어줘도 못 알아듣는다. 의 나라는 내가 오늘 믿고 경험이 쌓여가면서 크게 자라 내 생각과 이성을 뛰어넘는 생명의 환희라고 누누이 가르쳐도 못 알아듣는다.


마하트마 간디가 젊은 날, 기독교회에 초대되어 3일간 전도 집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그의 자서전 《간디, 아름다운 영혼의 일기》 (이동진, 서희 역. 씨제이에스북, 2021)에서 고백했다.

"나는 그 집회에서 신 앞에서 경건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을 존경했다. 그들은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 교인이 되는 것만으로도 천국에 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만으로 천국에 갈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니, 그것은 좀 무리한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가까이 지내는 크리스천들에게 그 말을 이해할 수도 없고,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들은 내 말을 듣고 왜 그것을 믿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오히려 자신들이 놀라는 것이었다. 나는 내 말에 도리어 놀라는 그들의 태도를 보고 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나를 이해시키고 설득하기 위해 온갖 논리를 동원했지만 나는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그 말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들의 뜻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특히 예수가 자기 죽음을 통해 세상의 죄를 속죄했다는 말도 내 상식과 이성으로는 믿을 수가 없었다."


간디의 말은 지극히 일반적이다. 이 세상 보통 사람들의 생각이다. 선한 양심으로 무장한 도덕가들의 함의이다. 따라서 예수와 그의 나라는 이 세상의 승자이거나 좋은 편에 서 있다면 더없이 멀다. 그것은 겨자씨를 채소밭에 심었음에도 싹이 나지 않거나 썩는 이치와 같다.

"나는 예수를 순교자이자 자기희생의 전형적인 인물이며, 신성한 스승 중 한 분이라는 사실은 인정할 수가 있다. 예수가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은 위대한 교훈이며 가르침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을 신비화하고 신성화하는 점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경건한 생활을 하지만 그 외에 다른 종교를 믿는 신앙인들도 그리스도교인 못지않게 경건하게 사는 것은 똑같다. 그리스도교인만 경건하게 사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한다. 하지만 다른 종교인들도 그와 똑같이 죄를 반성하고 회개하고 산다. 반드시 기독교인들만 그렇게 사는 것은 아니다. 철학적인 이론으로 따져보면 그리스도교는 다른 종교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 자기희생이란 측면에서 보면 힌두교는 그리스도교보다 훨씬 뛰어난 점이 많다."


그 나라는 '종교'라는 관점으로 이해할 수 없다. 세상의 가치로 아무리 애를 써도 볼 수 없다. 이 세상에는 간디의 말처럼 더 철저한 도덕과 윤리를 가진 종교들이 많기 때문이다. 예수를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 그 나라를 나의 잣대 범위에 넣지 말라.

예수는 이해의 차원이 아니다. 종교의 차원도 아니다. 예수와 그의 가르침은 경험이다. 예수와 그의 나라는 작은 경험이 쌓여서 만들어내는 실제이다. 하여 누구에게든지 예수는 처음 선생이었다가 나중에는 위대한 나라 근원이 된다. 그러나 처음에는 누구에게나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알갱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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