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산토리 홀
냄비 라면보다 컵 라면을 좋아한다
여행보다 돌아다니기를 좋아한다
계획하여 동선을 정하는 것이 여행이라면 무작정 떠나서 돌아다니기가 내 취향
컵라면과 계획 없이 돌아다니기의 공통점
게으름이 개입한 결과물이라는 것
워킹맘으로 직장과 집안일에 얽매여 그렇게나 소원하던 자유시간을 보내는 지금.
가치 있게 후회 없이 이 시간을 잘 보내고 있나 하는 의구심이 드는 어느 새벽에 뭔가 다른 이벤트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피어올랐다
폭포처럼, 열대의 태양처럼 쏟아질 것 같은 자유시간도 상상만큼 여유롭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항상 뒤로 미루던 가사에 조금 더 충실하자는 의무감에 먹는 것, 치우는 것, 세탁하는 것에 조금 더 전문성을 가지려 노력한 탓이기도 했다.
대충 먹거나 건너뛰기, 외식 등을 자제하고 한 두 가지라도 장을 봐서 집에서 식사를 하려고 노력했다.
대충 치우던 귀차니즘에서 벗어나 서랍 속까지 꼼꼼히 정리하고 주기적으로 쓸고 닦았다
밤에 세탁해서 빨래 줄에 널린 채로 걷어입던 일상에서 벗어나 햇살 아래 충분히 말리고 어스름이 내리기 전에 걷어 정성껏 개고 다리고 정돈했다.
햇살 아래 바짝 마른 빨래를 손질할 때 빨래에서 느껴지는 햇빛 냄새가 달콤했다.
모든 것이 새롭고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잠에서 깬 새벽
갑자기 진부하다면 진부한, 그러나 먼지 한 톨만큼의 거짓도 없을 듯한 경구가 떠올랐다
<오늘은 어제 죽어간 이가 그렇게도 소원하던 내일이다>
살림하는 오늘이 그렇게 소원하던 내일이어서는 안 되겠다 하는 마음이 백사장 깊은 곳을 적시는 낮은 파도처럼 쏴아 밀려들었다.
계획 없이 떠돌기 좋아하는 인스턴트 형 인간이지만 바다를 건너줄 비행기와 밤에 이슬을 피하게 해 줄 숙소는 있어야겠기에 스마트폰을 열고 앱을 켜고 비행기와 호텔을 예약했다
이 외 더 필요한 것이라면 환전, 데이터 로밍 두 가지 일거리가 남았다
일이 좀 많네 하며 스마트 폰 캘린더에 출발 시간을 저장했다.
혼자 가는 여행은 그야말로 바람같이 떠돌기이다
바람 많은 날 모자가 휙 하고 날려 데구루루 구르듯 그야말로 마음 가는 대로 굴러가면 된다
동행과 행선지를 의논하거나 식사 메뉴를 논하거나 할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이 내맘대로다
도쿄 나리타
호텔에 가방을 놓고 뭘 할까 생각하다 산토리 홀 공연이나 볼까 하고 길 찾기를 이용하여 산토리 홀에 갔다
평일 오전이라 홀 주변은 조용하고 사람이 없다
티켓 창구에 가서 저녁 공연이 있는지 티켓 구매가 가능한지 물으니 창구에서는 알 수 없고 웹사이트에서 예매를 하라고 한다
스마트 폰으로 조회하니 티켓 예매하는 화면이 일본어로만 서비스가 되었다
어찌어찌하려고 하니 주소를 입력하란다
호텔 예약앱을 열고 호텔 주소를 찾아야 하나 생각하니 귀차니즘이 재발한다
그다음은 이름을 입력하는데 카다카나로 입력하란다
스마트 폰에서 카다카나라니
테크에 문외한이라 다시 포기
창구 직원이 저녁 여섯 시 반에 방문하면 창구에서 남은 좌석 티켓을 구매할 수 있다고 했다
일본은 이방인에게 친절한 나라는 아닌 듯하다
내수 시장만으로도 운영이 잘 되어서일까 관광객이 성가실 정도로 많아서일까
근처 공원을 산책하고 도쿄역 주변 쇼핑가를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고 다시 산토리홀로 갔다
다행히 남은 표가 있어서 티켓을 구매할 수 있었다
다른 외국인들 몇몇도 줄을 서서 현장 티켓을 구매하는 것이 보였다
홀에 입장하니 대부분 관객이 시니어들로 보였다
평일 저녁 공연이라 그런지 항상 그런지 처음 방문하는 입장에서 비교가 불가능했다
모두 조용히 자리를 잡고 앉아 돋보기를 끼고 프로그램을 정독하고 있었다.
입장객 99%가 프로그램을 읽고 자료를 찾아보고 있었다
메인 홀 밖 대기실에 조그만 음료 스테이션이 있고 거기서 와인이나 커피 등 음료를 팔았다
화이트 와인을 500엔에 사서 메인 홀 앞 스탠드 테이블에서 마셨다
은은한 샹들리에 조명과 벽에 설치된 간접등
프로그램을 읽으며 와인을 마셨다
깔끔하고 부드러운 맛이었다
와인 이름을 묻지는 않았지만 산토리 회사 제품일까 라는 추측을 해보았다
산토리 홀을 방문한 폰 카라얀이 도쿄 아카사카의 산토리 홀을 <음향의 보석상자>라고 극찬했다 한다
어떤 연주를 듣게 될지, 와인 한 잔 때문인지 산토리 메인홀에 대한 기대 때문인지 들뜬 기분으로 입장했다
도쿄 메트로폴리탄 심포니 교향악단의 연주였다
클래식 음악에 문외한이지만 머리를 비우고 싶을 때, 혼자 시간을 보낼 때 언어가 배제된 클래식 기악 음악 감상을 선호하는 편이다
연주를 직관하는 경우 가장 큰 즐거움은 지휘자를 보는 것이다
지휘를 하는 모습은 음악과 지휘자가 하나되어 푹풍에 맞서 대양을 항해하는 선장을 보는 듯한 강렬함을 느끼게 한다
지휘자의 신호에 맞추어 각양각색의 악기를 연주하는 수십 명의 연주자가 한 사람처럼 움직이는 것 또한 경이롭다
무대 위에는 단 두 사람만이 있는 듯했다
지휘자 한 사람과 한 몸, 한 마음이 되어 한 사람처럼 연주하는 수십 명의 연주자들
그러나 음량의 풍부함과 웅장함은 테트라포드를 때리는 파도처럼 울림이 크게 다가왔다
이슬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이었다
여름이 가을에 자리를 내주려 하는 즈음 우산을 써도 안 써도 그만인 정도의 비를 맞으며 도쿄 시내를 돌아다녔다. 공연 시간을 기다리며 보낸 하루. 제대로 멋대로 다닌 하루
연봉도 없고, 일당도 없으며, 최저 임금으로도 책정되지 않는 가사에서 잠시 벗어나 낯선 도시를 떠돌고 우연히 들어간 식당에서 따뜻한 파스타를 먹고 와인 한 잔 후에 듣는 교향악의 웅장함.
여섯 번의 커튼콜에 화답하는 지휘자와 연주자들
박수갈채로 화답하고 먼저 자리를 떠나지 않는 관객들
모든 것이 인상적이었던 도쿄와 산토리홀에서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