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저린 팔을 주무르며 내 자릴 찾아 앉았다.
겨우 점심쯤 되었을 뿐인데
하루가 참 길고 고되게 느껴졌다.
그러나
하루가 길든 말든 무사히 기차에 올라탔으니, 앞으로 내게 요구될 건 한숨 푹 자고 일어나서
창문 넘은 풍경이 세비야로 변해가는 걸
지켜보는 일뿐이었다.
집에서 아침도 안 먹고 나와 허기졌다.
그럴 줄 알고 역 안에서 사놓은 연어 베이글을 꺼냈다. 얼른 해치워버리고
혈당 스파이크에 취해 잠이나 푹 잘 생각이었다.
베이글을 크게 한 입 베어 물려는데
내 옆자리에 누군가 앉았다.
커다란 후드티와 위로 올려 묶은 뽀글 머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난 계속 베이글을 씹었다.
실은 기차 내에 음식 먹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
꺼낼 때부터 좀 고민되었지만 침착하게 베이글을 씹었다.
이미 네이버에
유럽 기차 내 규정을 검색해놓은 상황이었기에
어글리 코리안 될 가능성은 적어 보였다.
아토차 역에서 산타 후스타 역에까지
달할 두 시간동안,
글래 못잔 만큼 점심 잠이나 퍼 자야겠다
계획했는데,
결과적으로 그 계획은 틀어진다.
계획은 틀어지고 대신 훨씬 값진 경험을 하게 된다.
둘 중 누가 먼저 본격적으로 말을 걸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내 기억에 둘 중 본격적인 태도로 대화에 임한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어쩌다 보니 이름 밝히고, 나이 밝히고, 각자 어디서 왔는지, 왜 스페인에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얘기하게 됐다.
아이야나는 영어에 능통했지만 난 그렇지 않았고
(내 영어 실력은 똥이고,)
다행히 아이야나가 나와 비슷한 수준의 스페인어를 할 줄 알아서 서로 영어와 스페인어를 섞어 사용했다.
나보다 두 살 정도 많은 아이야나는
전 세계를 여행하고 싶다고 했다.
그 로망을 직접 실천 중이고, 이곳저곳 누볐고 다른 나라를 여행한 후 그 다음 목적지였던 스페인에 온 것이다.
우린 각자가 좋아하는 가수,
아이야나가 좋아하는 한국 가수 (이를테면 비비), 좋아하는 노래, 싫어하는 장르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우리의 공통점은 둘 다 비비(BIBI)를 좋아한다는 점 그리고 EDM 팝을 무지 싫어한다는 점이었다.
유연하게 대화를 이어나가다 잠시 정적이 흐르면 기차 창밖에 꽤나 아름답게 펼쳐진 푸른 초원(?), 동그랗고 작은 나무들 백여 개가 빽빽하게 수풀 위를 매운 모습, 언뜻 본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허겁지겁 휴대폰을 들면 순식간에 찍기는 애매한 풍경으로 바뀌어 버리는 상황에 대해 좀 웃고 리액션을 했다.
Wow, Look, Guau, Beautiful, Que fuerte.
나중에 확인해보니 기차에서 찍은 사진 중에 잘 나온 풍경 사진이 없었다.
아직까진 기억 속에 그것들이 구체화되어 있지만, 다들 기억들로 뇌가 채워질수록 그 날 봤던 멋진 풍경이 희미해질까 봐 두렵다.
실제 모습과는 관련없이.
내게 아이야나의 첫 인상은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체이스 인피니티이고.
기차 안에서 함께 본 스페인 시골과 초원의 인상은
그 영화 엔딩에서 '윌라 퍼거슨'과 밥 퍼거슨이 전투한 장소로 남아있다.
스페인에서 돌아온 지 3개월 즈음 됐고 아이야나와는 종종 디엠을 주고받는다.
언젠가 미래에,
불현 듯 생각나 인스타를 켰을 때 아이야나와의 맞팔이 끊겨 있는 건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