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 어린 마음, 믿을 수 있는 사람, 편한 관계
"선생님! 선생님이랑 약속한 이후로 진형이가 지각, 결석 한 번도 안 하고 학교를 잘 가고 있어요! 학교 늦을까 봐 밤에도 일찍 자고 아침에 꼭 깨워 달라고 해요. 이런 모습 처음입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수화기 너머로 진형이 어머니의 들뜬 목소리를 들으니 환하게 웃고 계실 표정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이게 다 어머니께서 잘 깨워주시고 챙겨봐 주시니까 진형이도 힘을 내는 것 같아요! 은근히 진형이도 어머니에게 실망스러운 모습 보여주기 싫어 학교를 잘 가는 것 같기도 해요!"라고 답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2학기 동안 지각, 결석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 진형이는 무서울 정도로 약속을 잘 지켰다. 시험 기간이면 공부해야 된다고 공 차는 것도 미루었다. 의외로 학교에서는 잠이 안 왔다고 한다. 잠을 안 자니 심심해서 수업을 듣게 되었고 수업을 들으니 성적이 올라 학기가 끝날 때쯤 "선생님. 저 학교에서 학력우수상 준대요. 성적이 많이 올라서 준대요."라며 무심한 듯 시크하게 자랑까지 했다.
사례관리, 이렇게 쉬운 거였어? 진형이가 바뀔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메시 유니폼 때문에? 음... 유니폼은 그래, 솔직히 조금은 영향을 미쳤을 것 같지만! 암튼 생활 패턴이 바뀌니 그 속에서 친구들, 어머니, 그리고 나까지. 환경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장하다!
다시 돌아와 축구 이야기. 아니, 나의 성찰 이야기.
만약 진형이를 만난 사람이 여자 사회복지사였다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나만 할 수 있는 사례를 공유하는 것은 '나 잘났소.'라고 자랑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어렵겠지만, 진형이와 운동할 수 있는 친한 친구를 찾고 같이 운동할 수 있게 주선하거나 친구가 없다면 형 같은 사람을 찾아 연결해 주면 되지 않을까? 아님 골때녀도 있잖아! 여자 사회복지사도 할 수 있지 왜!라고 억지를 부려봤다.
실제로 진형이 사례를 교수님과 동료 사회복지사들 앞에서 사례발표회를 한 적이 있는데 '이건 사례관리가 아니네요. 복지사님이 다 해줬네요. 그냥 좋은 멘토였네요.'라는 혹평을 들은 적도 있었다. 교수님의 말에 손이 떨릴 만큼 속상했다. 아마 진형이의 자기 결정권을 무시한 채 내가 다 해 준 것처럼 보여서 그랬을까. 발표회가 끝나고 치기 어린 마음에 전화까지 했지만 받지 않으셨다. 그래서 사례관리가 뭔데!
이렇게라도 변명을 하자면,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고 생활 패턴도 불규칙적이며 학업 포기 상태인 진형이에게 어떠한 공적 서비스를 연계했어야 했는가? 청소년 상담 복지 센터에 데려가 진로 상담을 받게 해야 하나? 학교 사회복지사, 심리상담사를 연결해서 상담을 받게 해야 하나? 우울증이 심하니 병원 처방을 받게 해야 하나? 집 밖으로 아예 나오려고도 하지 않는 진형이에게?
물론 내 말이 다 맞다는 건 아니지만 그때의 나의 판단은 어떠한 서비스 보다 진형이에게 필요한 건 애정 어린 마음, 믿을 수 있는 사람, 편한 관계가 먼저라고 생각해서 같이 축구를 하며 마음을 나눈 것이었다. 진형이가 한 사람에게라도 마음을 열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아무튼, 진형이와 축구를 시작하기 전부터 언제까지 단둘이서만 축구를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운동하는 게 어색하지 않을 때쯤, 다른 사람과 운동할 정도로 마음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진형이에게 어울릴 만한 팀에 소속되어 정기적으로 축구를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운동한 지 두 달이 되어 갈 때쯤
상현 : "선생님이랑 축구하는 거 어때?"
진형 : "좋아요. 선생님이 편하게 해 주니까 운동하는 것도 편해요. 근데 둘이만 하니까 진짜 축구를 하고 싶기도 해요."
상현 : "오 그래? 그러게. 너도 이제 좀 체력도 올라오고 자신감도 붙은 거 같은데, 학교에 친구들끼리 하는 축구팀 없어?"
진형 : "없어요."
상현 : "음... 장애인 복지관에 이순신FC라고 있는데 거기 한 번 가 볼래?"
진형 : "장애인 축구팀요? 에이. 장애인들이랑 어떻게 해요."
상현 : "와... 야! 지금 장애인이라고 무시하는 거야?"
진형 : "아니 무시가 아니라요. 쌤. 그렇게 얘기하면 제가 이상해지잖아요!"
상현 : "거기 있는 친구들 너보다 훨씬 잘해. 같이 뛰면 따라잡지도 못할걸?"
진형 : "진짜요? 한 번 가보고 싶긴 하네요."
상현 : "요 녀석 봐라(웃음). 은근히 자신감 있어하네."
대화가 끝난 후 이순신FC 담당 사회복지사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