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내라도 내보자
2020년 8월 무더웠던 여름, 매일 막걸리를 3~4병씩 마시며 선풍기 하나에 의지해 여름을 나고 있던 박형규(가명). 열악했던 주거환경을 개선하면서 조금씩 삶의 변화가 생긴 박형규의 이야기.
※ 사례관리
'사례관리'는 당사자를 개별화하여 상당 기간 함께하면서 여러 자원을 활용하여 복지를 이루고 더불어 살게 돕는 일.
코로나가 한창 기승이던 20년 8월의 무더웠던 어느 여름날, 에어컨도 없이 선풍기 한 대에 의지해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주민센터 직원과 함께 방문했다.
집 앞에 갔을 때 당사자인 박형규 아버님의 친누나가 나와 우리를 맞이했다. "날도 더운데 오신다꼬 고생하셨지예. 행구 큰 누야입니다."
박형규 아버님이 살고 있는 집의 주인은 친누나였다.
주민센터 직원은 '복지관에서 도와주시러 온 분'이라고 짧게 소개했고 서로 인사를 나눈 뒤 아버님이 있는 집으로 안내해 주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박형규 아버님의 누님은 육 남매 중 맞이로 생활력이 강했고 야채장사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고 한다. 그렇게 장만한 집이었는데 "행구가 결혼할 때 갈 때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여기서 지내라고 했다."라며 본인은 1분 거리에 있는 골목 앞쪽 작은방을 얻어 지내고 계셨다.
가까이 지내며 박형규 아버님이 생활할 수 있게 반찬도 가져다주고, 빨래도 해주며 살뜰히 챙기긴 했지만 매일 술을 먹고 건강을 챙기지 않은 모습을 안타까워 "저 X자식을 어떡하면 좋습니까."라며 거친 표현을 서슴없이 쓰셨다.
대문을 열고 발을 내딛기도 전에 눈에 들어 온건 죽어 있는 바퀴벌레 사체들과 코를 찌를듯한 지린내가 집 상황을 대충 설명해 주고 있었다.
비위가 약한 편이 아니었는데도 본능적으로 몸이 멈칫하게 되었고 마스크를 쓰고 있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될 정도였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복지관에서 왔습니다. 잠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버님은 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하튼, 인사하고 신발을 벗고 들어서는데 음식물로 추정되는 알 수 없는 액체가 말라 양말이 닿을 때마다 찌직 찌직 끈적하게 소리를 내었다.
방 안 장판은 담배 자국으로 보이는 검은 동그라미가 군데군데 뚫려있었고 천장과 벽은 시커먼 곰팡이로 뒤덮여 원래 벽지 색깔이 검은색이었는지도 모르겠단 생각까지 들었다.
이내 시선이 닿은 곳은 아버님이 누워있던 자리다. 스티로폼을 매트리스 삼아 깔고 그 위에 오래된 이불이 깔려 있었고 베개 옆으로도 벽지가 해어져있었다.
뜬금없는 얘기이긴 한데 아버님의 첫인상은 덩치가 크고 가까이서 보니 인상도 포근해, 흡사 취해 있는 곰돌이 푸 같았다.
상현 "날이 많이 덥지예? 식사는 하셨습니까?"
박씨 "1,100원만 주세요."
상현 "네?"
박씨 "막걸리 사 먹게 1,100원만 주세요."
상현 "아이고 제가 지금 돈이 없네요. 술 좋아하시는가 봐요! 약 주는 조금 하십니까? 일주일에 몇 번 정도 드세요?"
박씨 "일주일에 일곱 번 다 먹지요. 속이 안 좋아서 많이는 안 먹고..."
상현 "그나저나 올해 장마가 너무 길어가지고 비가 억수로 왔네요! 아버님 댁은 괜찮으셨습니까?"
마지막 내 물음엔 답을 하지 않으셨고 충혈돼 있는 아버님은 바닥만 응시하고 있었다. 첫 만남에서부터 뭔가 '조사하러 온 사람'이라는 인식을 주고 싶지 않아 "다음에 또 올게요. 다음에 올 땐 시원한 음료수라도 하나 사 올게요!" 인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취해 있던 아버님은 살짝 휘청이며 일어나 "네. 안녕히 가세요." 하고 배웅해 주셨다.
첫 만남을 마치고 복지관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버님의 집을 다시 한번 떠 올렸다. 어떤 삶을 살아오셨을까. 하루아침에 집이 그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내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정수현의 사례관리 실천 기록 책에 '약자를 대할 땐 더욱 예와 성을 다해.'라는 글이 생각났다.
"대학교에서 배울 때, 혹은 교육을 받으러 가면 알코올 중독자들과 상담을 할 때 술에 취했을 때는 상담을 하지 말고 술이 깼을 때 상담하라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물론 술이 취한 상태에서 상담을 진행하면 횡설수설하셔서 제대로 진행되기 어려울 때도 있으나, 예를 갖추고 진심으로 대할 때면 아무리 술에 취해도 진심을 알아준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 나라고 못할 거 없지. 예와 성을 다해! 해보자! 흉내라도 내보자!
근데, 뭐,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지도 모르면서,
일단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가득 찬 나는 다음 상담 일정을 달력에 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