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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수리하는 데 장기를 왜 둬요? 2편

한판 더 하자

by 브라질의태양



누군가를 만나러 갈 때마다 마음속으로 항상 기도를 하며 간다.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고, 이해하게 하시고, 제 생각보단 그분의 생각을 존중하고 겸손하게 말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와 같은 식으로.

두 번째로 박형규 아버님을 만나러 가는 길. 평소 같으면 마음속으로 조용히 기도를 했을 텐데 갑자기 "와. 사랑 못 하긋는데요. 하. 도와주세요. 제 코를 마비시켜 냄새나지 않게 해주시고... 아, 아니... 진짜 진짜 그분을 위하는 마음을 주세요."라고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그렇게 집 앞에 도착해 박형규 아버님의 누님께 전화를 드렸다. 박형규 아버님은 핸드폰이 없어 누님을 통해 연락을 해야 했다.

"아이고 오셨습니까 슨생님. 행구 집에 있으낍니다." 누님을 따라 아버님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아... 코를 마비 시켜 달라고 기도했잖아요!'라며 속으로 짧고 굵게 짜증을 냈다.

누님은 거친 말로 아버님을 깨웠고 오늘도 술에 취한 채 잠들었다 깬 모습으로 나를 맞이했다.

"아버님 안녕하세요! 지난주에 왔었던 복지삽니다. 저 기억하시겠어요? 우찌 점심은 드셨습니까?"
"아니."
"아직 안 드셨나 보네요. 날씨가 많이 덥지예. 우리 시원한 냉면이라도 한 그릇 하러 가실례예?"
"아니."
"..."

일말의 공감대라도 있어야 무슨 대화라도 이어 갈 텐데. 솔직히 어떤 말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될지 막막했다.

"음... 아버님 평소에 뭐 하고 지내세요? 만나는 친구분들이나 주변 이웃분들이 있습니까?"
"아니."
"누님 말 들어보니까 강구안에 자주 가신다고 하데예? 거기 친구가 많으신가 봐요."
"..."
"거기 보니까 어르신들 많던데 모여서 약주도 한 잔씩 하시고 장기도 두고 하던데, 아버님도 장기 좀 두십니까?"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눈에 생기가 돌더니 갑자기 옆에 있던 옷장을 막 뒤지면서 "장기판이 어디 갔노." 혼잣말을 하셨다. 깊숙이 들어앉아 있던 바둑판을 이내 찾아 내 앞에 내려놓으셨다.

"알이 없노..."

우리가 하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누님이 "있으봐라." 짧게 말씀하시곤 어디론가 사라졌다. 한 10분 지났을까. 땀을 뻘뻘 흘리며 근처에 있던 문방구에 뛰어가 장기판과 장기 알을 사가지고 오셨다.

"아이고 날이 이리 더운데 거기까지 가서 장기판을 사 오셨습니까?"
"아. 하하. 아니 필요한 거 같아서."라며 억수같이 쏟아지는 땀을 소매로 슥슥 닦으며 멋쩍게 웃으셨다.

그렇다. 박형규 아버님에게 거칠고 험한 말을 쏟아내지만 누구보다 동생을 위하고 애정하는 사람은 누님밖에 없는 듯했다.

"아버님 저 진짜 장기 잘 못해요. 뭐가 몇 칸 가는지 밖에 모릅니다. 한수 가르쳐 주세요."
"그럼!"

난 진짜 규칙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계속 이기는 거다. 내가 공격을 해도 취해 있다 보니 이상한데 계속 두셨다. "아버님 제가 더 잘하네요!" 천진난만하게 너스레를 떨었다.

패배를 인정할 수 없다는 듯 "한 판 더 하자..." 장난기 어린 눈으로 수줍게 미소 띠며 내게 말했다.
세상 순진하고 푸근한 그 미소를 잊을 수가 없다.


1시간 넘게 장기를 두는 동안 누님께서는 멀찌감치 떨어져 흐뭇하게 바라보다 끝날 무렵 유유히 사라지셨다.

"내일도 저랑 같이 장기 둬요! 저한테 이기시려면 내일은 술 조금만 드세요."
"알았다."


1시간 넘게 장기를 두는 동안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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