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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ment designer Feb 25. 2021

1억과 맞바꾼 '집의 의미'

당신에게 집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첫째, 여름.

불안정한 일자리, 천정부지로 치솟는 집값, 물가 상승에 따른 생활비용의 지출 등의 사회적 압박 때문에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한 청년층 세대를 3포 세대라고 한다. 나와 남편도 그 범위 안에 들어가는 평범한 요즘 청년들이었다. 다행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게 됐지만, 현실은 모아 놓은 돈 5천만 원이 전부였다. 양가 부모님께 전혀 도움을 받지 않고 결혼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우리는 모아놓은 돈에 전세자금 대출을 받아 인천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둘 다 직장은 서울이었지만 가진 돈으로 직장 가까이에 집을 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출퇴근이 조금 힘들긴 했지만,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고 1년 만에 선물 같은 첫아이가 찾아왔다. 기쁘고 설렜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맞벌이하면서 어떻게 아이를 키우지?'

'아이는 누가 봐주지?'

'어린이집은 몇 시부터 아이를 맡길 수 있지?'

'회사를 그만둬야 하나?'


여러 가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에게 미안할 정도로 많은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그 생각의 끝에 다다른 결론은 '걱정만 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걸 하자'였다. 엄마가 되었지만 아이 때문에 나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일도 하려면 직.주근접이 돼야 했고 남편과 나는 직장 가까이 집을 옮기자는 결심을 했다. 그렇게 우리는 금전적으로는 무리였지만 우리의 미래 가치에 투자하기로 했고 받을 수 있는 최대치의 전세자금 대출을 받아 작은 옥탑방과 옥상, 정겹고 낡은 나무계단이 있는 예쁜 복층 집으로 이사했다. 그렇게 이사한 집에서 첫째 여름이가 태어났고 우리는 세 가족이 되었다. 많은 금액의 대출 이자는 큰 부담이었지만 우리 가족을 더 열심히 움직이게 하는 씨앗이 되었고 점점 더 자신감이 생겼다. 안정적인 보금자리가 생기자 일과 삶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우리 모두는 이 집에서 조금씩 더 성장하고 자라났다.


둘째, 하늘.

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이듬해에 둘째 하늘이가 찾아왔다. 이번에는 첫째 여름이 때와는 달랐다. 걱정보다는 설렘이 앞섰고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아마도 첫아이를 키우면서 나의 마음도 한 뼘 더 자라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두 번째 아기천사를 기다리며 행복한 일상을 살아가던 만삭의 임산부였던 나에게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위기가 찾아왔다. 평범한 보통날이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남편의 얼굴이 어두웠다. 그러고 보니 몇 일째 밥도 잘 안 먹고 잠도 잘 안 자고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남편에게 물었다.


“여보, 요즘 무슨 일 있어?”

“아니야, 일은 무슨...”

눈도 안 마주치고 대답하는 남편의 모습에 촉이 발동했다.

“뭐야~ 무슨 일인데~”

하고 한 번 더 물었고 남편이 털어놓은 이야기는 청천벽력 같았다.

경제공부 삼아 시작했던 주식과 비트 코인으로 돈을 잃었다고 했다. 나는 믿을 수가 없었고

“여보가 돈이 어디 있어서?”라고 되물었다. 남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대출을 좀 받았어.” 

마음을 다잡고 물었다.

“얼마나..? 금액이 커?” 돌아온 대답은

“좀 커. 일억 정도” 


이럴 수가.. 믿었던 남편이 이런 일을 벌일 거라곤 정말이지 생각도 해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난 잘 살아보겠다고 대출을 받아 집을 마련하고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는데 나 몰래 대출을 받아 일억이라는 큰돈을 잃었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2살짜리 첫째 아이를 안고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었다. 한참을 울고 또 울었다. 울다 보니 내 품 안에서 나를 꼭 안고 있는 아이의 온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또 한 명, 뱃속에서 세상에 나올 준비를 하며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 둘째 아이가 ‘꿈틀‘ 하고 움직였다. 정신이 번뜩 들었다. '무너지면 안 돼. 나는 엄마잖아'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고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남편이 보였다. 고개를 푹 숙이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한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니 화보다는 연민의 감정이 들었다. 그동안 말도 못 하고 혼자서 얼마나 속병을 앓았을까 하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남편은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우리 결혼생활이 많이 미안했다고 했다. 다른 친구들처럼 집도 사주고 차도 사주고 다 해주고 싶었다고 돈 많이 벌어서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내가 원한 건 그런 것들이 아니었는데... 임신으로 인한 입덧 그리고 육아, 일, 등등 다른 것들에 신경 쓰느라 정작 남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랐던 거다.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고 다시 일어설 힘을 내야 했다. 더 열심히 일하고 더 절약해야 했다. 그때 내 마음에 가장 위로가 된 건 사람이 아닌 공간이었다.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우리가 사는 따듯한 이 집. 우리는 이 공간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책을 읽으며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다. 집은 우리를 더 성장시켜 주었다.


셋째, 바다.

이제 우리는 세 아이의 부모가 되어 꿈에 그리던 다섯 가족이 되었다. 이 집에서 우리는 자라났다. 이곳에서 첫째 여름, 둘째 하늘, 셋째 바다가 태어나고 자랐으며 남편과 나도 아이들과 함께 자라났다. 진정한 집의 의미는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집은 따듯한 엄마의 품과도 같다. 삶을 살아가다가 넘어졌을 때 힘든 일을 마주했을 때 엄마 품만큼 따듯하고 안전하며 위로를 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힘든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따듯한 위로를 주고 포근하게 안아주는 엄마 같은 존재가 바로 집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다섯 가족을 키운 고마운 이 집과 내년이면 이별을 해야 한다. 선물처럼 와준 세 아이 덕분에 우리는 청약에 당첨되었다. 어려운 고비를 넘고 넘어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뤘다. 기쁘지만 슬프기도 하다. 어젯밤 첫째 딸아이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물었다.


“엄마, 우리 아파트에 언제 이사가?”

“여름이 여섯 살 되면 갈 거야”라고 대답해 주었더니 한참 생각을 하다 말한다.

“엄마 나 그냥 아파트에 안 갈래. 우리 집처럼 옥상도 없고 장난감도 없을 것 같아”

“엄마도 그래, 새 집엔 우리가 가장 힘들고 가장 행복했던 그 시절의 흔적은 없을 것 같아”

라고 생각하며 딸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어렵고 힘든 일을 마주 했을 때 별 일 아니라고 말해주며 따듯하게 안아줄 수 있는, 큰마음을 가진 그런 엄마, 그런 아내가 되고 싶다. 마치 이 집이 나에게 그래 주었듯이.

'아직은 엄마도 더 많이 자라야 하지만 엄마가 너희들에게 편안한 안식처가 될 수 있게 큰 사람으로 잘 성장해 볼게.'라고 다짐하며 스르르 잠이 들었다.


2020년  어느 날의 여름, 하늘, 바다.


멋 훗날, 이 집이 너희들에게 어떤 추억으로 남을까?

너희의 유년시절과 엄마 아빠의 청춘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 집을 떠나는 날 엄마는 많이 울 것 같아.

그때까지 우리 많이 기록하고 기억하자.

너희들이 다 잊는다 해도 괜찮아. 

엄마가 기억해 두었다가 하나씩 하나씩 이야기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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