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생활 2년 후 다섯가지 키워드
22년 6월 22일에 인천공항을 떠나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 도착했으니, 어느덧 미국 생활을 시작한 지도 2년이 넘었다. 2년이라는 시간이 어찌 보면 짧은 시간이겠으나, 한국에서의 군대 생활이 대략 2년 정도 된다고 생각해 보면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시간이다. '회고록'이라고 까지는 너무 거창하기도 하나, 그동안 정말 수많은 변화와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고 나니 마치 20년처럼 느껴지는 시간들이기도 했기에, 짧게나마 그 소감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미국 생활을 계획하거나 궁금해하는 분들에게는 살짝이나마 경험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다. 몇 가지 키워드로 표현해 보았다.
1. 리셋(Reset)
미국에 와서 가장 크게 느낀 건 바로 나 자신이 제로 베이스로 리셋 되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의 학력, 경력이 없는 경우에 내가 한국에서 무엇을 했던, 어떤 대학을 나왔건 나는 다시 바닥부터 시작해야 한다. 내가 가지고 있던 한국에서의 다양한 인적네트워크, 이력서를 가득 채운 이런저런 경력들은 그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한다. 마치 발가벗겨진 채로 세상에 홀로 서는 그런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정식 영주권이 나오기 전에, 돈도 벌 겸 경력도 쌓을 겸 한국계 회사에서 풀타임으로 일을 한 적이 있다. 기존 경력 다 무시되고, 엔트리 레벨로 들어가서 마치 사회 초년생이 된 것처럼 대우를 받고 일하게 되었다. 하루 10시간 넘게 좁고 어두운 사무실에서 단순 업무를 해야 했는데, 중간에 자주 "내가 왜 이런 일을 하고 있지?" 하는 이른바 '현타'가 찾아오곤 했다. 한국에서 한 직장에서 오래 다니면서 '자리 잡았다'는 느낌이 얼마나 소중한 자산인지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바꿔 말하면 그만큼 각오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2. 한인사회 패러독스(미국 시 일리노이 구)
이민 생활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같은 나라 사람이 그립고, 말과 문화가 편하다 보니 한인사회를 접하게 된다. 한인 교회에 가서 사람들을 사귀고, 한인 마트에서 장을 보고, 한인 타운에서 주말을 보내는 게 자연스럽다. 하지만, 주변 한국 분들에게서 듣거나, 온라인 한인 커뮤니티에서 자주 접하는 사연들은 바로 '한인 조심하세요'라는 것이다. 한인끼리 친하게 지내다가 사기당한 경우, 친했던 사람이 돌변하여 소송을 하거나, 손절하는 경우 등의 사연을 대부분 하나 이상은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한인 커뮤니티에 상당히 '조심스럽게' 접근하게 되고, 새로운 관계를 깊게 갖게 되는데 어려운을 느끼기도 한다. 원래 한국에서도 좁고 깊은 관계를 지향했던 스타일이라 그런지, 미국에 왔다고 갑자기 폭넓은 인간관계를 만들지는 않게 되었다. 미국이지만, 한인들의 사는 모습은 한국과 거의 비슷하다. 엄마들의 교육열은 한국 못지않게 높고, 남들과 비교하는 문화도 존재한다. 이른바 '학군 좋은' 동네의 공립학교에는 한국 엄마들의 치마바람이 상당하다고 한다. 담임 선생님 도시락까지 돌아가면서 싸간다는 얘기에 혀를 내둘렀다. 미국 시 일리노이 구에 사는 기분이다.
3. 이방인
미국은 잘 알려졌듯이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이다. 다만, 유색인종들은 뒤늦게 와서 그런지, 아직도 이방인 취급을 당하거나, 그렇게 스스로 느끼곤 한다. 최근 히스패닉, 아시아계 인종 비중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미국은 70% 가까이가 '백인'인 나라이다. 일상생활에서 눈에 띄게 '인종차별'을 당하거나 하지는 않지만, Bamboo Celing(아시아 계는 회사에서 상위 포지션으로의 진급에 한계가 있다) 같은 표현들이 자주 등장하고, 은연중에 '너는 어디에서 왔어?' 같은 질문을 받기도 한다. 나는 영어 발음이 이민자 티가 난다고 하더라도, 여기에서 태어나서 영어가 편하고, 미국 문화가 익숙한 2세 한인들은 상당히 억울할 거 같기도 하다. 단순히 외모가 아시안이라고 이방인으로 여겨지니 말이다. 그래서 영원히 주류에 편입되지 못하고 여행자처럼 살게될지도 모른다. 음.. 이건 나쁘지 않으건가?
4. 가족 가족 가족
지난 2년간 가족과 함께 보낸 시간들은 아마 지난 10년간의 시간과 맞먹지 않을까 싶다. 새벽 출근에 밤늦은 귀가, 해외 출장, 장기 파견 등 가족과 떨여 저서 상당히 많은 시간을 보냈었다. 코로나 시국 때문에 나 홀로 필리핀에서 6개월 격리되어 있기도 했다. 미국에 와서 가장 좋은 점은 바로 가족과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보다 일하는 시간도 줄고, 이런저런 약속도 없다 보니, 자연스럽게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었다. 거의 와이프 독박 체제였던 육아도 이제 제법 내가 많이 관여하게 되었다. 전혀 하지 않았던 요리도 이제 욕심을 내고 있다. 최근 쉽게 뚝딱 만들어 먹을 수 있는 배우 '류수영'식 레시피로 다양한 요리를 시도하고 있다. 미국 생활에 가장 큰 보람이자, 미국에 온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때로는 늘어난 시간 때문에 아이와 마찰을 겪기도 했다. 함께하는 시간이 늘면서 그동안 못 봤던 아이의 단점도 (또는 내 단점도) 서로 보게 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서로 맞춰가는 기분이다.
5. 그래서 영어가 늘었는가? 글세요.
아마 가장 궁금해하는 부분 중의 하나는 미국에서 2년 정도 살면, 영어 실력이 늘었는가? 일 것이다. 내 대답은 YES이기도 하고, NO 이기도 하다. 확실히 리스닝은 조금 늘게 되는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영어를 접하는 일이 많아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부분은 있다. 그렇다고 리딩, 스피킹, 라이팅이 다 늘었는가 하면, 그건 잘 모르겠다. 어학연수 다녀온 분들은 대부분 공감하겠지만, 해외 생활과 영어실력은 그 기간에 비례하지 않는다.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영어를 쓰는지, 본인이 얼마나 노력하는지에 따라 더 크게 달라진다. 이민생활하는 한인들이 자조적으로 쓰는 말이 바로 '영어도 안 늘고, 한국어만 까먹는 언어 바보'가 된다는 것이다.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다 보니 영어가 많이 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요즘은 어디 커스터머 센터에 전화하는 게 예전만큼 두렵지는 않아 졌다. 살아남으려다 보니 강해지나 보다.
그래서 미국 생활 만족스럽나요?
나는 아직도 영주권을 기다리고 있으며, 아직도 제대로 '정착'했다는 느낌은 갖고 있지 않다. 가끔씩 운전하면서 아무생각없이 미국 도로를 다니다 보면 내가 지금 여기에서 무얼하고 있나라는 상념이 들때도 있다. 마치 주재원 생활 하듯이 언젠가는 한국으로 돌아갈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다만, 가족이 있는 곳이 집이라고, 가족과 함께 지내면서, 여기 미국 생활에 점차 '적응'해 나가고자 한다. 자연환경이라든지, 자녀 교육이라든지하는 미국 생활이 줄 수 있는 장점들을 최대한 만끽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미국 생활 만족스럽나고요?
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