엮은이는 아는데요

by BAAM

나는 무도 키즈다


주말이 기다려진 건 학교에 가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토요일 저녁 6시, 텔레비전 앞에 앉아

무한도전을 기다리던 그 들뜬 공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돌려봤으면 특정 장면의 대사만 들어도

다음 장면의 대사를 자동으로 술술 읊게 된다.


무한상사 면접장에서 길은 감명 깊게 읽은 책으로 ‘돈키호테’를 꼽았다.

저자가 누구냐는 압박 질문에 그는 당황하며 뱉었다.

“엮은이는 아는데요. 김경식 씨.”

그 찰나에 함께 웃었던 당신이라면 안다.

하지만 나는 그 웃음 끝에서 문득 멈춰 섰다.

어쩌면 이 실없는 대답이 쪼개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서글픈 자화상일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모두가 같은 광장에 서 있던 시간


무도 전성기 시청률은 20%~30%를 넘겼다.

5천만 중 천만 명 이상이 같은 시간,

같은 화면 앞에 앉아 있었다.

월요일 아침 교실과 동네 미용실에서

어제 무도 봤냐는 말 한마디로 대화가 시작됐다.


설명이 필요 없었다. 그냥 통했다.

지금은 다르다. 유튜브 구독자 100만이면 대단한 숫자다.

그런데 5천만 중 100만이면 50분의 1이다.

내가 열광하는 채널을 내 주변 50명 중 한 명만 안다.

쇼츠와 릴스와 틱톡이 각자의 알고리즘 안에서

각자에게 최적화된 것을 쏟아낸다.

콘텐츠의 양은 폭발하고 공감대는 쪼개졌다.

넓고 북적이던 광장이 좁고 깊은 골목들로 나뉘었다.


골목 안에서의 연결은 여전히 뜨겁다.

다만 골목 밖으로 나가면 아무것도 통하지 않는다.

같은 시대를 살고 있지만 전혀 다른 세계를 소비하고 있다.

무도는 모두가 같은 광장에 서 있던 마지막 시대의 기억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우리를 위해 편집한 시간


무도가 끝난 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까지 우리 곁에 머무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같은 멤버가 모이고 같은 포맷으로 돌아와도

그때의 그 감성은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질문을 조금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컨텐츠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도라고 해서 매번 완벽했을 리 없다.

명백히 망한 에피소드가 있었고,

식상하다는 평가 속에 억지로 끌고간 특집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우리 기억 속엔 그런 장면이 잘 남아 있지 않다.



대신 레전드라 불리는 장면들, 함께 울컥했던 순간들,

배꼽 빠지게 웃었던 그 찰나들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시간이 편집한 게 아니다. 우리가 그렇게 편집한 것이다.


인간의 기억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저장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때 느꼈던 감정을 저장한다.

감정이 짙었던 순간일수록 더 자주 꺼내 보게 되고,

꺼내 볼수록 그 기억은 더 선명해진다.

레전드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그러니 같은 멤버가 다시 모여도

그때의 맛이 나지 않는 건 당연하다.


컨텐츠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던 우리의

온도와 시선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어쩌면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 그 자체가 아니라,

무한도전을 보며 아무 걱정 없이

웃고 떠들던 그 시절의 우리 자신이다.




엮은이로 남으려는 우리의 예의


길이 뱉은 이 엉뚱한 대답은 사실 우리 모두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엮은이는 원작을 정리하고 엮어내는 사람이다.

내용을 가져와 형태를 만들고, 순서를 붙이고, 맥락을 연결한다.

저자가 왜 그것을 썼는지는 몰라도 된다. 엮어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무도의 완벽한 엮은이다.


어떤 장면에서 누가 무슨 말을 했고, 그 뒤에 어떤 자막이 깔렸는지.

왜 그 장면이 웃겼는지, 왜 그 순간이 뭉클했는지,

왜 그 에피소드가 레전드가 됐는지.

수백 번의 복습 끝에 우리는 그것을 완벽하게 엮어낼 수 있다.

10년이 지나도, 유튜브 영상을 다시 찾아봐도,

그 장면 앞에서 우리는 여전히 능숙한 엮은이가 된다.


그런데 정작 그 향수의 저자가 누구인지는 묻지 않는다.

왜 우리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영상을 찾아보는가.

단순한 추억 때문인가. 그 시절이 그리워서인가.


우리는 그 질문 앞에서 멈추기보다

그저 익숙한 대사를 한 번 더 읊는 쪽을 택한다.

어쩌면 그게 더 편하기 때문이다.


저자를 마주한다는 것은

이 그리움의 본질을 직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워하는 것이 예능이라는 껍데기가 아니라

그 시절의 나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설명 없이도 통하던 그 연결이

이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니까.

엮은이의 기억 속에 머무는 것은 따뜻하지만,

저자의 진실을 아는 일은 이토록 서늘하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저자가 누구인지는 모른 채,

익숙한 대사를 읊으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서로의 안부가 된 무모한 대사들


우리가 그 대사를 읊는 이유는

단순히 재미있어서가 아니다.

그 대사를 함께 읊을 수 있는 사람이

여전히 그 곳에 있기 때문이다.


설명하지 않아도 통하는 사람,

같은 광장에 서 있었다는 것을

서로의 눈빛으로 아는 사람.


그 사람과 대사를 주고받는 찰나,

사라졌던 광장은 아주 잠시 우리 곁으로 돌아온다.

그것은 도피가 아니라 생존이다.


공감대가 쪼개지고 알고리즘이 우리를 각자의 방 안에 가두는 세계에서,

우리는 한때 모두가 같은 곳을 바라봤다는 기억을 꺼내 들고 오늘을 버틴다.

그 기억이 교묘하게 편집된 것이어도,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남긴 결과물이어도 괜찮다.


그 편집된 기억이

지금 이 순간 누군가와 연결되는

유일한 언어가 되어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당신 곁에 아직 그 대사를 함께 읊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그리고 당신은, 그 사람과 나누는 그 찰나가

사실은 그 시절의 당신 자신을 그리워하는 것임을 알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