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의 넷째 일요일 오후, 동네 친구들과 집 근처 동산에 올랐다. 백석도서관 바로 뒤에 있는 동산은 3층짜리 도서관보다 약간 높아 ‘산’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하지만 그런 민망함은 산을 걷다 보면 편안함과 친근함으로 다가온다. 산이라고 할 수 없는 산을 걸으며 ‘만만함’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해발 6000센티미터의 위용(!)밖에는 자랑하지 않는 동산은 만만해 보여 나처럼 산을 오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산에 가자는 친구를 쉽게 따다나설 수 있는 것이다. 걱정과 부담 없이, 아무 준비없이 산에 갈 수 있다. 그것은 동산의 매력이었고, 그 매력은 동산의 만만함에서 비롯되었다. 사람들은 ‘만만하다’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만, 동네 동산의 만만함은 편안함과 친근함의 동의어이다.
만만한 동산에는 제법 나무가 울창하고 산길도 호젓하여 바깥세상을 피하여 달아난 우리만의 아지트 같은 분위기였다. 그 조그만 산속 가운데 보금자리처럼 자리 잡은 아늑한 공간이 있었다. 그곳에 도착하자 커피 업력 10여 년의 커피도사가 배낭에서 커피 도구를 꺼냈다. 버너에 불을 붙여 물을 끓이고, 미리 갈아온 원두를 내리자 코펠 그릇에 옅은 갈색의 커피가 안겼다. 이런 드립커피는 호사스럽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산에서 마시는 드립커피라니! 산에서 정다운 이들과 마시는 커피라니!
지리산 산사의 스님들이 그의 커피를 마시고는 녹차에서 커피로 갈아탔다는 전설의 백석동 로맨스그레이 바리스타는 그날 동산의 드립커피에서 절정의 맛을 선물하였다. 절묘한 농도와 향긋한 맛과 향, 울긋불긋 단풍잎이 내려앉는 산속에서 다정한 이들과 마신 커피 맛은 마셔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알 수가 없다.
커피를 가리켜 “천 번의 키스보다 멋지고, 잘 익은 와인보다 달콤하다”고 작곡가 바흐가 말하지 않았던가. 무르익은 가을 단풍이 내려앉은 커피 맛은 바흐가 말한 바로 그 커피 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