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레는 프랑스 북부에 위치한 항구도시이다. 플랑드르 지역의 지배를 두고 벌어진 백년전쟁 초기 영국은 프랑스의 칼레를 정복하였는데 칼레의 시민들은 1여 년 격렬하게 저항하다 결국 항복하였다. 칼레를 정복한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칼레의 시민을 모조리 죽이려 했지만 주변의 만류로 칼레 시민 몰살 명령을 철회하면서 조건을 내걸었다. 칼레 시민의 몰살을 막으려면 시민 6명이 대신 처형되어야 한다는 것.
칼레 시민들은 에드워드 3세의 잔인한 선택 앞에서 고민하였다. 그때 칼레의 귀족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Eustache de Saint Pierre)가 자신이 칼레 시민을 대신하여 죽음을 달게 받겠다고 나서면서 지도층 인사 6명이 기꺼이 희생자로 나섰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은 바로 이 용감하고 고결한 칼레 지도층 인사 6명을 기리는 말이다. 프랑스어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은 ‘귀족은 의무를 갖는다’라는 의미이다.
칼레의 시민 이야기가 유명해진 계기는 로댕이 제작한 ‘칼레의 시민’ 때문이다. 1894년 칼레 시는 칼레를 구한 여섯 명의 이야기를 동상으로 제작해 시청 앞에 세워둘 계획으로 로댕에게 작품을 의뢰했다. 영웅적인 모습으로 시민들에게 자부심을 주기를 원한 칼레 시의 의도와는 달리 로댕의 작품은 죽음 앞에서 고뇌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담고 있었다. 칼레 시는 로댕의 이 작품을 시청 앞에 전시하지 않았다.
세월이 흐른 후 ‘칼레의 시민’은 프랑스 로댕박물관에 전시되었고, 칼레 시민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널리 알려졌다. 에드워드 3세 왕비의 간청으로 용감한 칼레 시민 6명의 사형은 집행되지 않았지만,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공동체를 위해 내어놓았던 칼레 시민의 이야기는 공동체의 위기 상황에서 리더의 자질에 대한 견본으로 남게 되었다.
12월 3일 밤 국회 앞에는 불법 계엄을 막기 위해 밤늦은 시간 달려온 ‘칼레의 시민들’이 있었다. 자신의 기득권만을 지키기 위해 속이 빤히 보이는 짓거리를 벌이는 어떤 국회위원 무리들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을 아는지, ‘칼레의 시민’을 아는지 물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