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응준에 따르면 소설보다 산문이 더 쓰기 힘들다. 소설가가 아니어서 잘 모르지만, 이렇게 말한다.
“산문에서는 시인과 소설가가 자신의 모든 범박(汎博)함들을 요리조리 꽃꽂이해 버릴 수 있는 ‘수사학적 범죄면허’가 일절 통하지 않는다. 시와 소설에서는 미학일 수 있는 요소들이 산문이라는 철조망 둘러싸인 팔각의 링 위로 올라와서는 나약한 반칙이 되고 마는 것이다. 산문은 연극공연이 아니라 종합격투기다. 뛰어난 시인과 소설가들 가운데서조차 뛰어난 산문가가 거의 드문 것은 그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산문을 잡문으로 여기면서 창작물보다 하대하지만, 나는 글을 쓰는 이의 육성이 더 많이, 더 가까이 들어있는 산문 읽는 일이 즐겁다. 그렇게 읽은 책 가운데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김수영과 이윤기와 김훈의 산문집이었다.
술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허송세월》은 역시 김훈의 산문이었다. 청년 김훈이 있던 자리에는 세상사 아수라 한복판을 껴안고 있는, 늙어가는 일의 탄식과 기품을 아는 김훈이 있었다. 김훈만 나아갈 수 있고 김훈만 감각할 수 있는 세계가 김훈만의 언어로 이야기된다.
천천히 읽어야 문장의 맛과 작가의 생각을 제대로 알 수 있는《허송세월》에서 특히 좋았던 것은 술에 대한 이야기와 죽음에 대해 성찰하는 대목이었다. 와인으로 시작하여 사케, 막걸리, 소주 그리고 위스키에 이르기까지 술에 대한 이야기는 ‘소주’ 대목에서는 절정을 이루었다. 작가는 사케를 마실 때 “술이 나를 안아 주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는데, 그런 감각은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
‘부디 연탄보일러를 놓아드려라’는 유언이 나오는 이야기, 강운구 사진전에 관한 이야기도 좋았지만, 나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을 말하라면 ‘엄마’가 나오는 이야기를 꼽고 싶다. 그것은 아직도 작가의 심장에 남아 있는 ‘엄마’ 이야기여서 따습고, 추운 겨울날 절망과 비통을 감추고 양지바른 곳에서 쬐는 햇볕 같았다.
“소주는 아귀다툼하고 희로애락 하고 생로병사하는 이 아수라의 술이다. 소주는 인간의 기쁨과 슬픔, 소망과 좌절을 멀리 밀쳐 내고 또 가까이 끌어당겨서 해소하고 증폭시키면서 모두 두통으로 바꾸어놓는다. 소주는 생활의 배설구였고 종말처리장이었는데, 나 역시 거기에 정서를 의탁해서 힘든 날들을 견디어 왔다... 소주는 삶을 기어서 통과하는 중생의 술이다.”
*** 《허송세월》중
햇볕을 쪼이면서 생각해 보니 내 앞의 담장은 개념, 기호, 상징, 이미지, 자의식 같은 것들이다. 나는 이 언어적 장치과 그 파생물에 의해 시야가 가려지면서도 이 차단막에 의지해서 세상을 이해하려 했는데, 이 가려짐은 삶의 전 범위를 포위하고 있어서 부자유가 오히려 아늑하고 친숙했다.〈허송세월〉
이 불완전성은 세계의 본래 스스로 그러한 운명이다. 억겁의 세월이 흘러도 인간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정의 혹은 이념의 깃발을 들고 어깨를 거들먹거리며 땅 위를 걸어 다니는 자들은 어리석다. 이 세계의 불완전성을 이해하는 것으로 그 불완전성을 해결할 수 없지만 그 불완전성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은 세계와 인간을 대하는 마음에서 겸손과 수줍음과 조심스러움을 갖출 수 있다.
〈여덟 명의 아이를 생각함〉
불완전한 세상에는 그 불완전을 살아 내는 불완전한 방법이 있다. 이 방법은 허약하지만 소중하다.
〈여덟 명의 아이를 생각함〉
성품의 향기는 내 마음 안에 있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 안에 있다고 혜능은 말했다. 이러한 냄새는 스스로 풍겨 나는 냄새이고, 남에게 맛보라고 내미는 냄새가 아닐 터이므로 육신의 콧구멍을 벌름거린다고 해서 맡을 수 있는 냄새가 아니다. 〈인생의 냄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