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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

by 디디온

박완서의 짧은 소설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은 제목이 암시하듯 세상을 떠난 남편에 대한 이야기이다. 폐암을 선고받고 일여 년 남짓 투병을 하는 동안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담담한 수채화처럼 투명하고 기품 있게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인상적이다. 일상을 그대로 소설로 옮겨온 듯한 박완서의 소설은 묘하게도 평범한 시간에 숨은 무늬와 아름다움을 끄집어내 보여준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그가 선택한 인간다운 최선은 가장 아까운 시간을 보통처럼 구는 거였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에게 순간순간 열중하는 것’이라는 구절처럼,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통과의례를 통해 삶이 다시 찬란해지는 역설의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매개는 남편의 ‘모자’. 암 투병으로 인해 드러난 민둥머리를 감추기 위해 등장한 모자는 삶의 중요한 고비마다 두 사람이 함께 건너온 시간을 품고 있다. 연애시절부터 신혼의 서투른 행복에 적절한 소도구처럼 끼어들었던 모자 그리고 세월이 지나 병에 포로가 된 남편에게 새롭게 느끼는 감정에 이르기까지 모자에 대한 추억 속에 그들 삶은 따뜻하면서 슬프고, 슬프면서 슬며시 웃음이 나오는 모습으로 담겨 있다. 죽음을 앞둔 짧은 시간들은 오히려 살아있음에 대한 매혹을 느끼게 해 준다.


남편이 떠나고 아내는 그가 세상에 남기고 간 모자 여덟 개를 보며 삶의 덧없음을 바라본다. 소설이 잘 안 써져 예민해져 있을 때 거짓말이 막혔다고 놀리며 커피를 타주던 남편은 이제 갈색 쎄무 캡을 비롯해 8개의 모자만 남기고 흔적 없이 사라졌다. ‘생명의 가엾음이 티끌과 다름없다’고 작가는 이야기한다.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이 실려 있는 박완서 소설집에는 단편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 실려 있다. 김현승 시인의 시 ‘눈물’에서 따온 제목으로, ‘나종 지니’는 “가장 마지막까지 갖고 있는 것”이란 뜻이다. 가장 사랑하는 것을 잃은 사람의 슬픈 절규가 들어 있는 이 소설은 빼어난 만큼 읽는 사람의 마음을 미어지게 만든다.


독자로서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같은 소설을 만나는 것은 행복한 일이지만, 이렇게 좋은 소설을 읽는 행복을 누릴 수 없더라도 작가가 이런 소설을 쓰지 않아도 좋은 상황이었으면 좋았겠다. 그러나 그 또한 모두 지난 일. 작가는 사랑한 아들을 잃은 시간들을 견디며 20여 년을 더 산 뒤, 2011년 그토록 사랑하던 아들 곁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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