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랜만에 백양로를 걸었다. 오래전 대학을 다닐 때와 너무 달라졌지만, 백양로를 다시 걸으니 그 시절의 나를 만날 것만 같았다. 철없지만 순수하기도 했고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비밀을 나 혼자 지키려 안간힘을 쓰기도 했었다. 매일 몰려다니며 학생식당에서 밥을 먹고 세미나를 한 뒤에는 교문을 나가 늦게까지 술집 순례를 하며 젊음을 탕진하였다.
젊음을 남김없이 탕진한 뒤에 나는 평안을 찾았다. 그 평안 속에서 예전에 알던 사람들을 새로이 만나기도 하였다.
오늘은 봉원사 입구에 있는 ‘존재의 이유’에서 한참 후배를 처음으로 만났다. 러시아에서 핀란드 남자와 만나 사랑을 하고, 그의 아이를 낳아 핀란드에 살며 핀란드 책을 번역하는 후배의 고향은 대구이다. 대구에서 핀란드까지. 반은 아빠의 피를 물려받은 후배의 딸은 시크한 서양인의 모습이어서 매력적이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였다.
백반집 이름으로 ‘존재의 이유’는 너무나 철학적인데, 멋있고 맛있게 늙어가는 두 ‘세뇨르’가 인상적이었다. 은발의 짧은 커트 모습이 포스가 있어 보이는 주방장의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맛’은 다정하였다. ‘간’이 딱 맞는 해남 막걸리를 예쁜 유리병에 담아 내어주었다. 다음 방문할 때는 백반집 이름 ‘존재의 이유’에 대해 꼭 물어보고 싶다. 핀란드 남자가 건넨 ‘꽃’을 받아 든 후배의 이야기도 궁금하다.
‘존재의 이유’를 나와 일산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걸으면서 ‘다 시어 꼬부라진 옛날 순정’을 떠올려보았다. 그런 건 잊은 지 오래다, 라고 하면 그냥 가버리는 것일까. 갑자기 바대부채길인가 트래킹코스로 유명해진 고향바다 강릉바다가 그리워졌다. 그쪽 언저리에 ‘헌화로’가 있다는데. ‘꽃을 든 남자’와 헌화로를 한번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