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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빈 적막 가운데

이누즈카 쓰토무(犬塚 勉) , 〈나의 여름방학(私の夏休み)〉

by 디디온

지난 9월 29일, 이누즈카 요코 여사에게서 메일이 왔다. 이누즈카 쓰토무가 그린 《나의 여름방학》을 책의 표지에 써도 좋다는 내용의 메일이었다.


화가 이누즈카 쓰토무를 알게 된 것은 재일교포 강상중 교수의 책 《구원의 미술관》(일본어 원서 《あなたは誰?私はここにいる》)을 통해서이다. 브런치에 올린 글들이 출판문화진흥원 오디오북 제작지원 사업에 선정되어 오디오북 제작과 더불어 종이책 출간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책 표지에 쓸 수 있는 그림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구원의 미술관》을 읽다가 표지 이미지로 쓰고 싶은 그림을 만났다.


이누즈카 쓰토무의 그림들을 소개하는 홈페이지에서 《나의 여름방학》을 본 순간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나를 흔들었다. 슈퍼 리얼리즘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이누즈카 쓰토무의 그림들은 대상을 사진처럼 묘사한다. 하지만 《나의 여름방학》은 그림 아랫부분은 현실의 풍경이 그려 있지만, 그림 윗부분은 비현실적이다. 풀, 구름, 커다란 바위, 잘려나간 나무들은 모자를 쓴 단정한 차림의 여자아이와 묘하게 엇박자를 이루고 있다.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몰랐던 깊은 적막이 나를 어디론가 멀리 데리고 갈 것만 같다.


보는 순간 그림이 그토록 나에게 강렬했던 것은 커다란 바위 아래 모자를 쓴 그림 속 여자아이에게 마음이 투사되었기 때문일까. 그림 앞에서 떠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의식이 닿지 않는 깊은 곳의 무의식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집요하리 만큼 사실적 묘사에 몰두한 이누즈카 쓰토무는 생전 “끝까지 리얼리티를 추구하지만 리얼리티에만 머무르지는 않는다”라고 늘 말했다고 한다. 그의 그림 속 풀, 돌멩이, 나무, 잘려나간 나무밑동들은 사진으로 착각할 만큼 정밀하지만, 사진으로는 담을 수 없는 감정이 깃들어 있다. 그것이 보는 사람을 느끼게 만들고, 순수하지만 두려운 심연의 문 앞에 세워놓는다.


어릴 적부터 그림을 무척 좋아했던 화가는 1988년 다이가와 산에 스케치를 하러 간 뒤 악천후를 만나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50여 점의 그림을 남기고 38세에 화가는 세상과 작별했다. 재능을 활짝 꽃 피우지 못하고 일찍 떠난 무명의 화가는 작고한 지 20여 년이 지난 2009년 NHK 〈일요미술관-나는 자연이 되고 싶다〉에 소개되며 조금씩 그의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누즈카 쓰토무의 그림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가 보인다. 그는 천상 화가였다. 그림이 아니면 그에게 세상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었을까. 그의 그림들에는 세상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사람의 포즈가 담겨 있다. 《나의 여름방학》은 1987년 23회 가나가와현 주최 미술전 입선작품으로, 그림 속 여자아이는 출품 전날 갑자기 그려 넣었다고 한다.


그림 《나의 여름방학》을 만난 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커다란 바위 아래 모자를 쓰고 홀로 서 있는 여자아이는 왜 나를 만나러 온 것일까. 추석인데 비만 내리고 내리는 비를 보며 적막 아래 서 있는 여자아이를, 적막 아래 혼자 서 있던 나를 생각해본다.




나의 여름방학_이미지.JPG 이누즈카 쓰토무, 나의 여름방학(私の夏休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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