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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는 마음

세 번의 봄밤에 대하여

by 디디온

그해 봄밤을 잊을 수 없다. 8년 전 일산에 위치한 독립서점 ‘버티고’에서 소설가 권여선과 보냈던 봄밤을. 그날 서점 버티고에서 그해 2월 출간된《안녕 주정뱅이》저자 북토크 행사가 있었다. 소설을 무척 좋아하는 주인장은 인터넷서점에서 일하다 일산병원 근처에서 ‘독립운동’하는 심정으로 서점 ‘버티고’를 운영하는 중이었다.《안녕 주정뱅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늘 술을 마시기에, 그날 북토크는 참가자와 저자가 맥주를 마시면서 진행하였다는 이야기를 뒤늦게 전해 들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북토크가 끝난 뒤 서점 옆 조그마한 식당에서 화기애애한 뒤풀이가 진행 중이었다. 처음 마주한 소설가는 자신의 팬들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그 덕분에 ‘하늘 같은(?)’ 작가 곁에서 웃고 마음껏 떠들 수 있었다. 그곳에서 나와 다시 버티고에서 술자리가 이어졌다. 홍상수 영화 스태프로 일했다는 것도, 조금 늦게 시작한 작가로서의 출발에 관한 이야기도 그때 들었다. 봄밤은 조용하게 무르익었고 우리 모두는 정말 행복하였다. 새벽이 되어서야 아쉬움을 달래며 작별인사로 우리는 포옹했다.


그 깊은 봄밤 며칠 지나 버티고에서 가져온《안녕 주정뱅이》를 읽기 시작하면서, 깜짝 놀랐더랬다. 너무나 좋았기 때문이었다. 첫 단편 〈봄밤〉을 다 읽고 나서, 좋은 것을 만났을 때 차오르던 행복을 느꼈다. 짧은 〈봄밤〉을 끝내고, 행복한 마음을 오래 간직하기 위해 두 번째 소설을 읽지 않고 며칠 그대로 그 행복을 만끽했다. 그리고 다시 두 번째 단편을 읽으면서 권여선이라는 작가의 매력에 사로잡혔다. 그 길로 소설을 놓지 못하고 한걸음에 모두 읽어버렸다.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해 술자리에서 내 단골멘트는《안녕 주정뱅이》를 꼭 읽어보라는 말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받은 행복을 열심히 전도(?)하였다. ‘인간의 고통을 품격 있게 말하는 소설’은 그해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렇게 매혹당했던 소설집《안녕 주정뱅이》에 나오는 〈봄밤〉이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봄밤을 떠올렸다.


영화 〈봄밤〉에는 절망의 시간에 갇힌 두 사람과 절망에 갇힌 사람의 마지막 희망인 술 그리고 병(病)과 가난이 있다. 어디를 보아도 도저히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영화 내내 어두우면서도 숨 막히게 답답한 감옥 같은 풍경은 그 안에 있는 사람도 보는 삶도 절망의 늪으로 잡아끈다.


더 나아갈 길이 없는 절망 속에 만난 두 사람은 간신히 서로를 버티어주지만 그것으로 충분해 보이지 않는다. 영화는 내내 어둠 속을 고통의 미로를 헤매다가 알 수 없는 지점에서 그 미로에 대해 더 이상 질문하지 않겠다는 결심처럼 그리고 미로와 미로의 어둠을 그냥 품은 것처럼 갑자기 끝나버린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흘러나오는 김민기의 〈나비〉를 들으면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절망으로 범벅이던 어느 봄밤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런 봄밤에 마시던 술이 생각났다. 술이 주던 위안과 다시 술이 주던 절망이 기억났다.


8년 만에 다시 〈봄밤〉을 다시 읽었다. 알코올중독자인 영경과 신용불량자인 수환의 사랑은 더없이 투명하고 슬프고 아름답다. 두 번째 읽으면서도 다시 〈봄밤〉에 매료되었다. 영화는 소설 〈봄밤〉의 매력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지만, 소설〈봄밤〉에 바치는 오마주이기에 그것만으로도 영화 〈봄밤〉은 좋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서점 ‘버티고’는 그 후 그 자리에서 못 버티고 떠났고, 소설 〈봄밤〉에서 취한 영경이 길을 걸으며 읊는 김수영의 시 〈봄밤〉이 오늘은 정겹게 들리는 듯하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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