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대해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

비포 트릴로지

by 디디온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영화를 보고 후배와 늦은 점심을 먹는 중이었다. 최근 〈비포 선라이즈〉를 보았는데 이제 사랑의 판타지를 재미있게 볼 나이가 아니더라는 말을 했더니 후배가 ‘비포 미드나잇’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1995년 상영되어 “70년대 이후 처음으로 사이비 감정과 줄거리 조작이 없는 멜로드라마가 나왔다”는 평과 함께 로맨스 영화의 고전으로 자리 잡은 ‘비포 선라이즈’. 인기에 힘입어 하룻밤 서로의 끌리는 감정을 확인한 커플은 9년 후 다시 파리에서 만나 ‘비포 선셋’을 찍었다. 여기까지는 로맨스이다. 그러나 ‘비포 선셋’에서의 마지막 밤을 계기로 현실의 연인이 된 커플은 9년이 흐른 후 ‘비포 미드나잇’을 찍었다. 12년에 걸쳐 촬영된 ‘보이후드’에서 등장인물들이 실제로 나이 들어가는 모습이 영화의 리얼리티를 더했던 것처럼, ‘비포 트릴로지’도 세 편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동안 영화를 만든 사람도, 영화에 출연한 배우도 그리고 영화를 보는 사람들도 함께 나이를 들어가며 변화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우연히 기차 안에서 만난 청춘남녀의 하룻밤 사랑을 담은 ‘비포 선라이즈’는 이제 사랑의 유통기한을 알아버린 중년에게는 더 이상 매력적인 것이 될 수 없다. 말이 잘 통하는 순간 서로에게 끌리는 사랑의 작동방식이 시간이 지나면서 차이가 보이고, 좋아했던 상대의 장점은 단점이 되어 서로를 겨누는 화살이 된다. 시간 앞에서 변하지 않는 사랑은 없으니, 이를 어쩌란 말인가. 그래서 ‘비포 선셋’이 더 좋았고, ‘비포 선셋’보다는 ‘비포 미드나잇’이 더 좋았다.


서로에 대한 달콤한 환상에 젖어 있는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과는 달리 ‘비포 미드나잇’에서는 상대에 대한 신랄한 말이 나온다. 셀린은 제시가 “뒷정리도 면도도 잘 못한다”라고 불평하고, 제시는 셀린에게 “지랄병”이 도졌다면서 “사이코이자 똑순이”라고 쏘아붙인다.


“혼자가 아니란 기분을 느끼게 해 주고 나란 사람을 존중해줬던” 사람은 이제 “에덴동산이 따로 없는데도 내내 싸우”는 관계가 된다. “가끔 자긴 헬륨 마시고 난 산소 마시는 것 같았다”라고 셀린은 말한다.


나는 자주 미디어에서 연출하는 사랑의 환상에 거부감이 든다. 사람들의 환상에 기대어, 없는 것을 마치 있는 것처럼 만들어 돈을 버는 게 아닌가.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환상이 깨졌을 때 관계를 다시 만들어가기 위해 어떤 것이 필요한지 아는 것인데. 그런 면에서 ‘비포 트릴로지’는 ‘사랑’의 생로병사를 입체적으로 다루었다.


“상처 입은 일이 없다면 배우는 것도 없다” “난 내 자신이 내 것일 때 행복” “누군가 항상 곁에 있다면 질식할 것 같다” “로맨틱한 사랑에 목매지 말라”는 대사들을 보면 감독은 18년에 걸쳐 만든 사랑의 연작 시리즈를 통해 ‘사랑의 환상’에서 벗어나 환상 없이 상대와 더불어 지난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중년이란 12살 때보다 조금 더 어려울 뿐”이니까. 그래도 우리는 누구와 더불어 살아가야 하니까.


사랑의 생로병사를 제대로 보고 난 후 르네 마그리트의 ‘연인들’을 보니 영화와 그림이 꼭 닮았다. 각각 두건을 쓴 채 마주하고 있는 연인의 모습은 바로 나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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