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하의 글을 읽는 재미, 《상관없는 거 아닌가?》
“마음이 말이 되고, 말이 음악이 되고, 그 음악이 다시 마음에 가 닿는다”
이렇게 읽으면서 읽는다는 수고를 안 해도 되는 책 읽기, 편안한 책은 처음이다. 뭐, 그래도 상관없는 거 아닌가? 아무것도 안 읽는 것 같이 읽을 수 있는 글. 장기하의 글은 장기하의 노래와 닮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만들어 낸 결과물이라는 것, 그리고 자기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담겨 있다는 점에서.
편안한 가운데 일상에서 관찰하고 느낀 것들이 솔직하게 이야기되는데 무엇보다 글을 읽는 것이 즐거웠던 것은 삶과 일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너무나 편안하면서 ‘맞아, 그렇네’ 하는 마음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글을 잘 써야겠다는 욕심 없이 자신이 느낀 것들을 그저 솔직하게 꺼내어 내보이는 글이어서 그럴 수 있는 것이다. 그의 노래처럼 그의 글도 일상을 세심히 관찰한 가운데 그만이 전달할 수 있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을 목소리 높이지 않으면서 조곤조곤 들려주고 있다. 그의 무심함이 편안했고, 음악과 사는 일에 대한 그의 생각들은 깊이 있으면서 편안하였다.
음악에 대한 그의 생각 그 가운데서도 노래를 만드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들이 흥미로웠다. 그것은 그가 삶에 대해 가지는 생각이 노래로 연결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장기하와 얼굴들’ 1집 성공 뒤 화려하게 만든 2집을 제외하면, 그의 모든 음반 작업은 불필요한 것을 줄여나가는 과정이었다고 한다. 3~5집 모두 소리는 줄이고 여백은 늘리기 위해 노력했고, 5집에서는 스피커 한 개만으로 들어도 상관없는 모노 방식 택했고 그렇게 간소화해도 아무 문제가 없어서 기뻤다고 한다.
특히 오늘의 장기하를 만든〈싸구려 커피〉창작과정의 에피소드가 인상적이었다. 판소리를 차용한 듯한 랩이 들어간 중간 부분(‘뭐 한 몇 년간 세숫대야에...’로 시작하는 부분)은 원래 기타 솔로를 넣을 생각이었다고. 하지만 군복무 시절 휴가를 받아 서울로 가는 버스 안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멍 때린 상태에서 서른 두 마디가 떠올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 창작경험 자체가 즐거웠다는 고백도 인상적이고 좋았다.
사실 나는 장기하의 팬이다. ‘싸구려 커피’ 음반이 나왔을 때 그것을 몇 번이나 들으면서 감탄했다. 장기하에 대한 나의 팬심을 확고하게 한 것은 몇 년 전 배철수 특집에 출연한 장기하를 접하고서다. 그날 나온 다른 출연자들과는 달리 배철수를 그리고 배철수의 음악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좋아하는 사람으로 그 자리에 출연한 모습이었다. 그날 그가 ‘산꼭대기 올라가’를 불렀는데 그 노래가 그렇게 좋은지 그때 다시 알게 되었다. 그런 장기하의 모습이 좋다.
그런데 내가 장기하를 더 좋아하는 데는 좀 독특한 구석이 있다. 그는 이전에 내가 좋아하는 가수들과는 너무나 다른 타입의 뮤지션이다. 오랫동안 나는 뛰어난 예술은 재능에 불행의 조합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고수했다. 젊은 시절 내가 좋아했던 예술가들은 거의 그런 부류에 속했다. 그런데 장기하란 가수를 알게 되면서 그런 선입견이 깨져버렸다. 그의 노래를 좋아하면서 들음으로써 나는 즐겨 듣는 음악과 좋아하는 가수들의 폭이 더 넓어졌다. 일상의 소소한 일들을 재미있게 소중하게 꾸려나가는 사람, 심리적으로 균형감각을 가진 사람이 만들어내는 예술의 매력을 나에게 알려준 가수이다, 장기하는. 그래서 좋아한다. 일상에서의 일들을 그렇게 솔직하고 새로운 시각에서 들려주는 노래를 그만큼 잘 보여주는 가수는 없었다, 나에게는.
책의 모든 글이 진솔하게 좋았지만 그 가운데 특히 “찬란하게 맑은 가을날”이 가장 좋았다. 그의 글이 좋은 것은 그가 잘 쓰려고 글을 쓴 게 아니라 자신이 음악으로 다하지 못한 것들을 풀어놓는다는 생각으로 글에 접속했기 때문이다. 그의 노래처럼 그의 글은 장기하만이 쓸 수 있는 ‘글’의 매력을 담고 있다.
같은 시대 장기하 같은 뮤지션이 만든 노래를 듣고 글을 읽을 수 있는 것만으로 더할 수 없이 행복한 하루였다.
tmi _ 장기하와 그의 팬들에 관한 어떤 글에서 그런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보통 공연장에서 팬들이 가수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데, ‘싸구려 커피’의 랩 부분이 워낙 길어 제대로 끝까지 부른 팬이 없었다는 이야기. 그 이야기를 읽고서 내가 한번 ‘싸구려 커피’를 끝까지 부르는 최초의 팬이 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운 뒤, ‘싸구려 커피’의 가사를 몽땅 외워 동네 술자리에서 가끔 완창을 이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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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을 하나하나 줄여나가다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생명에 대한 욕심마저 딱 버리고 죽으면 정말로 멋진 삶이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나는 기분만큼 믿을 만한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스스로의 기분이 어떤지를 잘 살피는 일이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생에서 좋은 기분보다 중요한 것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분명한 건 내가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에 대해 지나치게 신경 써왔고, 또 그게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는 사실이다.
서퍼는 바다 위에서 즐겁다. 바다에 의해 좌지우지되면서도, 작게나마 나름의 역할을 하며 재미를 찾는다. 인공지능이 추천해 준 멋진 음악을 들을 때, 나는 내가 패배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슬퍼할 필요가 없다. 그냥 그 음악을 즐겁게 듣고, 작게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정도의 창작을 해나가면 그만이다. 마치 서퍼가 거대한 바다 앞에서 작디작은 자기 자신에 대해 슬퍼하지 않고 어찌어찌 파도를 타고 나아가며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