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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위, 서울을 걷다

서울토박이, 서울의 시간을 천천히 걷다.

서울 위에 핀 길,

그 길 위에서

나는 나의 과거와

삶의 속도를 마주했다.

하늘 위, 서울을 걷다

서울토박이, 서울의 시간을 천천히 걷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늘 회색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도, 귀에 들리는 것도,

마음에 닿는 기운조차도 회색빛 먼지처럼 바쁘고 무심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무채색 도시는 내게 가장 따뜻한 색을 품은 고향이었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역 앞 전봇대와 가로수,

시내버스의 기계음과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광고 멘트,

모두가 내 유년의 배경이었다.


그 회색 풍경 안에는

내 인생의 모든 색이 숨어 있었다.

나는 그 길에서 소녀의 꿈을 꾸었고,

세월이 흐른 뒤에는 그 꿈을 딸에게 건네주었다.


시간은 걷는다, 나도 함께 걷는다


1970년, 서울역 고가도로가 처음 세워졌을 때

나는 국민학교 입학 전 일곱 살 소녀였다.


서울이 바쁘게 자라고 있던 시절.

고가도로는 차들이 하늘을 달릴 수 있는 세상의 상징처럼 보였다.


그 시절, 어른들의 얼굴엔

피곤함보다 ‘앞으로 잘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더 많았다.

말하진 않았지만 그 눈빛은

서울의 위상이 곧 우리의 미래라는 걸 믿고 있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2017년, 나는 딸의 결혼을 준비하는 엄마가 되었다.

그 고가도로는 어느새 ‘사람의 길’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여행자의 눈으로 그 길을 다시 걷는다.


서울의 시간은 흘렀고,

그 시간 위에서

나도 소녀에서 엄마로,

이제는 나를 위한 여행자로 변해 있었다.


그날 오후, 나는 시간을 걷기 시작했다


서울로 7017.

1970년에 세워진 서울역 고가도로가

2017년, 시민을 위한 공중 산책로로 재탄생한 공간이다.


숫자 ‘7017’ 속에는

서울의 과거와 현재가 겹쳐져 있다.


GTX-A를 타고 서울역까지 단 12분.

만리동에서 시작된 길 위,

첫 발을 디디는 순간 공기가 다르게 느껴졌다.


자동차의 매연, 바쁘게 오가는 발자국 소리,

익숙한 도시의 소음이 한 발아래로 내려가는 듯했다.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빠르게 흐르는 것들 틈에서

유일하게 천천히 걸을 수 있는 길.


서울의 높이와 나란히 발을 맞추는 일이 시작되었다.


도시 위로 내려앉은 봄


서울은 지금, 봄꽃이 도시를 감싸고 있다.

벚꽃이 터지고, 목련이 피고,

철쭉이 흐드러지듯 번진다.


그 꽃잎들은 마치 서울의 숨결처럼 느껴진다.

서울로 7017 위에도 그런 봄이 내려앉아 있었다.


회색 도시 위로 떨어지는 꽃잎 한 장 한 장이,

서울이라는 낯선 거인이 조심스레 내미는 따뜻한 손길 같았다.


바람이 불면 꽃잎이 흩날리고,

그 속을 걷는 내 마음도 어딘가 물들어갔다.


잠시 동안, 나는 도시의 중심에서

봄이라는 계절에 포근히 안긴 채,

서울과 가장 가까워졌다.


걷는다는 건, 살아온 날을 천천히 더듬는 일


나는 문득 생각했다.

“나는 왜 이런 길 위에서 멈춰 서고 싶었을까.”


서울은 여전히 바쁘고,

도시는 여전히 앞만 보며 달리고 있는데.


그런데 이상하게,

이 하늘 위 길 위에 서면

나도 모르게 속도를 늦추게 된다.


어쩌면 이 길은,

마음의 속도를 되돌아보게 해주는 장치였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늘 더 빨리, 더 멀리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이곳에서,

‘조금 느리게 가도 괜찮아’라는 말을

처음으로 믿을 수 있었다.

도시 위에 핀 정원, 그리고 어느 오후의 풍경


길가엔 이름표를 단 식물들이 조용히 인사를 건넨다.

‘참느릅나무’, ‘분꽃’, ‘으아리’…


도심 속 작은 숲, 그것도 하늘 위에 놓인 정원이라니.

꽃들이 피고, 바람이 스치고, 햇살이 내려앉는 이 공간은

서울 한복판에 숨겨진 작은 기적 같았다.


사람들도 이 작은 기적 앞에서 걸음을 늦춘다.

어깨를 맞댄 연인이 셀카를 찍으며 웃고,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노부부가 손을 맞잡고 걸었다.


갓 태어난 아기를 유모차에 태운 젊은 부부,

혼자 온 여행자도 있었다.


그중, 한 장면에 시선이 멈췄다.

어린 소녀가 꽃 사이를 뛰어다니며 엄마의 손을 잡아끌었다.

“엄마, 이 꽃 이름 알아?”

아이의 얼굴엔 봄 햇살이 맑게 번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나는 오래전 내 모습을 떠올렸다.

엄마 손을 잡고 걷던 일곱 살의 나.

고가도로를 올려다보며

하늘이 더 가까워질까 묻던 그 아이가 바로 나였다.


어느새 나는,

이 길 위에서

소녀였던 나와 엄마였던 나,

그리고 지금의 나를

모두 마주하고 있었다.


하루의 끝, 불빛 사이를 걷다


남대문 쪽으로 발길을 옮길 무렵,

하늘은 짙은 감청색으로 변해 있었다.


하나둘 가로등이 켜지고,

도시의 불빛이 별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


아직 퇴근하지 못한 누군가의 창이

조금은 지친 듯,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쩌면 회의가 끝나지 않았거나,

잠시 혼자 앉아 하루를 정리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그 불빛은 말없이 그 사람의 시간을 품고 있었다.


또 어떤 창은,

아직 잠들지 못한 마음의 자취처럼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거나,

무언가를 기다리는 중일지도.


나는 그 조용한 빛들 사이를

숨죽이며 조심스레 지나쳤다.


누군가의 하루 끝에

내 그림자가 괜히 스며들지 않도록,

그 소중한 고요를 방해하지 않도록.


도시는 불빛으로 다 말하지 않지만,

그 안엔 누구나 하나쯤

불 꺼지지 않는 사연을 품고 산다.

나는, 이 길을 기억할 것이다


서울로 7017은 단순한 길이 아니다.

이 길은 시간을 걷는 산책로이고,

마음을 쉬게 해주는 고요한 다리다.


나는 이곳에서

‘걷는 것’이 얼마나 정직하고 깊은 위로인지 다시금 느꼈다.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느린 걸음을 허락받는 일.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치유가 되었다.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데리고 산책 나온 것이다.


계단을 내려와 다시 땅에 발을 디디는 순간,

나는 비로소 그 길의 마법에서 벗어났다.


서울의 소음이 다시 들리고,

익숙한 분주함이 피부에 닿았다.


그러나 마음 어딘가엔

그 고요하고 따스했던 하늘 위 길의 감촉이 남아 있었다.


다음엔, 딸과 함께 걷고 싶다


언젠가, 이 길을 딸과 함께 다시 걷고 싶다.

그녀에게도 이 도시의 시간과 향기를

고요히 건네주고 싶으니까.


나는 오늘 하루의 끝을 조용히 접어 넣는다.

그날의 노을과, 그 바람과,

그 조용한 식물들의 이름을

마음속에 조용히 적어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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