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길버트 1

by 엘레강스박

"나보다 잘 쓰네. 왔다가 간다."


우리 학교 축제 기간에 여는 시화전에 그가 왔었나 보다.

나의 시화 액자 감상평 봉투에 그가 남긴 쪽지가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 문예부 소속 시화전 안내 도우미였다.

그래서 그날 전시회장에 계속 서 있었으나, 방문한 그를 보지는 못했다.

저녁 먹으러 자리를 비운 사이 왔던 것일까.

행여 한번 더 발걸음 하지는 않을까.

아쉬움에 괜히 전시회장 입구를 서성거렸다.


내가 초등 4학년이던 가을에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고향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졸업한 초등학교로 전학했다.

아버지가 다니던 때에는 학생 수가 많았다는데, 내가 전학할 당시 시골마을 초등학교는 한 학년에 한 반 밖에 없는 작은 학교였다.

왁자지껄하던 교실이 한순간 조용해지면서 스무 명 안쪽 아이들의 눈이 쏠리던 그때가 그를 처음 본 날이었다.

어릴 적부터 함께 놀고 입학 후 같은 반만 되었던 아이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나의 전학은 흥미로운 사건이었나 보다.

그를 비롯한 남자아이 세 명이 똑같은 규격 편지지에 꼭꼭 눌러쓴 편지를 내게 쥐어주었다.

자신의 소개와 함께 내가 전학 와서 기쁘다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내용이었다.


5학년이 된 언제부터인가 그가 나를 좋아한다는 말이 들려왔다.

그의 집은 학교와 우리 집이 있는 마을과 제법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래서 등하교를 위해 버스를 타거나 한 시간가량 걸어야 했다.

아마도 그 마을에 사는 아이들 네 명이 함께 다니며 흘러나온 말인 것 같았다.

그에게는 6학년 누나가 있었다.

하루는 방과 후 집으로 가고 있는데, 그 누나와 같은 반인 우리 동네 오빠가 말을 걸어왔다.

그 오빠의 말인 즉, 본인은 그의 누나를 좋아한다고.

그녀의 동생이 엘레강스 너를 좋아하니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지나와서 돌아보니, 이성에 눈을 뜨고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한낱 귀여운 시절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작은 시골 학교 고학년들에게 있어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것은, 당시 최대의 화젯거리였다.


그가 나를 좋아한다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좋았다.

그는 반에서 공부도 가장 잘했고 체육시간에도 빛나는 아이였다.

외모 또한 빠지는 인물은 아니었다.

우월한 유전자에게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생리인가 보다.

그러나 나는 '나도 네가 좋다'고 표현하지 못했다.

그가 나에게 직접 고백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전학 왔을 때부터 살갑게 챙겨주던 친한 친구 L이 그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내성적이고 소심한 나와 달리 똑부러지고 말도 잘했던 L은, 그녀 입으로 그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학교에서 그녀의 눈은 항상 그를 쫓고 있었고 그녀의 머리는 그의 생일도, 그의 혈액형도, 그가 좋아하는 반찬도 알고 있었다.


6학년 과학시간이었다.

실험이 있어서 알코올램프에 불을 붙이려고 성냥을 그었더니, 담임선생님이 큰소리로 나무라셨다.

담임선생님은 신경질적인 얼굴로, 말투가 상냥한 분은 아니었다.

"엘레강스야, 성냥을 네 쪽으로 그으면 어떡하니! 바깥쪽으로 그어야지."

사실 나는 선생님의 가르침에 충실하고 말 잘 듣는 학생이었다.

5학년 담임선생님은 다른 사람이 위험해질 수 있으니 성냥불을 켜는 사람이 본인 쪽으로 향하게 성냥을 그어야 한다며 시범을 보이셨다.

그래서 배운 대로 했을 뿐인데 선생님의 질타는 나를 당황케 하였다.

또한 나에게 집중된 친구들의 이목에 얼굴이 빨개져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선생님! 작년 담임선생님이 엘레강스가 하는 것처럼 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는데요."

조용해진 과학실 공기를 깨뜨린 것은 그의 목소리였다.

"그랬었니? 그래도 본인이 위험해질 수 있으니 사람 없는 방향으로 그어야지."

선생님의 격양된 목소리가 한결 누그러졌다.


그날 이후로 그는 나의 길버트가 되었다.

짐작하겠지만, 여기서 길버트는 루시 모드 몽고메리 '빨간머리 앤'의 '길버트 블라이스'를 말한다.

앤 셜리를 좋아하던 나는 길버트 블라이스에게도 빠져있었다.

당시의 그가 아니, 나의 길버트가 가엾은 나를 동정해서 선생님께 변명을 해 준 것인지, 정의감에 불타서 대신 나서 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그는 더 이상 우리 반 시시한 남자아이들과는 다른 특별한 사람으로 내게 와 있었다.

마침 길버트를 좋아하는 내 친구 L이 근처 도시로 이사를 해 전학을 갔다.

다행히 그를 향한 내 마음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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