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길버트 2

by 엘레강스박

중학생이 된 우리는 아카시아꽃이 흐드러지게 핀 5월의 토요일, 담임선생님과 소풍을 갔다.

중학교도 인근의 다른 학교에서 온 몇 명과 함께 초등학교 친구들이 그대로 진학한 상태였다.

담임선생님은 사춘기에 들어선 우리를 위해 상담도 해주시고, 마니또 게임을 제안하는 등 열의를 보이셨다.

선생님과 평소 학교에서 못하던 말도 해가며, 삼삼오오 짝을 지어 산책 겸 걸어 소풍장소에 도착했다.


많이 걸었더니 다리가 아파서 바위에 앉아 쉬고 있었다.

나와 함께 있던 친구는 다른 친구에게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인기척이 느껴져 옆을 봤더니 길버트가 앉아 있었다.

그의 손에는 아카시아 가지 하나가 들려있었다.

"너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했지? 나는 과학자가 꿈인데 우리 점쳐 보자."

'이루어진다,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루어진다......'

아카시아 잎을 떼어내며 중얼거리는 그는 꽤나 진지했다.

교실에서 몰래 의자를 뒤로 빼놓고 내가 바닥에 주저앉기를 기도하던 장난기 많은 소년이 아니었다.

이렇게 바싹 붙어 앉아 둘이서만 대화하는 것도 처음이어서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눈치없이 크고 불규칙하게 뛰는 내 심장이 불편하다고 느낄 때 즈음,

"와, 이우어진댄다."

이 말을 남기고 그는 다시 제 무리로 가버렸다.

그 후의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귀갓길은 어땠는지 기억 속에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다만, 봄을 보내기가 아쉬운 듯 사방에 진동하던 아카시아꽃 향기와 진지했던 그의 눈빛만이 두근거리던 내 가슴속에 남아있을 뿐이었다.


수학이란 놈이 내 중학 인생에 태클을 걸어왔다.

이차함수가 훅 치고 들어오면서 발목을 잡았다.

우리 반장은 똘똘한 얼굴에 야무진 입매로 수학을 참 잘했다.

그 애가 자율학습 시간에 칠판 앞에서 수학 문제 설명하는 것을 보고 있는데, 길버트가 다가와 물었다.

"반장이 너무 멋있어서 넋 놓고 보는 거냐?"

내가 심드렁하게 "응"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다시 자리로 가버렸다.

길버트, 너는 모른다. 네가 그렇게 얼굴을 들이밀고 말 걸어올 때마다 내가 얼마나 설레는지를......

한숨을 내쉬고 다시 수학 문제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머리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초등학교 6학년 때 길버트를 좋아하던 L이 전학 가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뽀얀 얼굴에 오목조목 예쁘게 생긴 여자아이 J가 전학을 왔다.

J는 발랄하고 톡톡 튀어서 친구들이 좋아했다.

그녀는 엄마가 유명 브랜드 아동복을 사주신다고 자랑하곤 했다.

그 말을 증명하듯이 그녀가 입고 오는 옷들은 주인만큼이나 색감도 디자인도 좋았고, 그녀에게 잘 어울렸다.

3인조 남자 댄스그룹 '소방차'가 입었던 승마바지를 입고 와서 라면땅이며, 고무줄놀이를 할 정도로 유행에 뒤처지지 않는 아이였다.


중학교에 와서도 J의 미모는 여전했다.

수학여행지 숙소에서 자다 일어난 부스스한 얼굴도 밉지 않았다.

시력이 좋지 않아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쓰고 엄마가 시장에서 사주는 촌스러운 옷만 입던 나는, 그녀의 모든 것이 부러웠다.

J는 언제나 자신감 있는 말투였다.

그 말투로 어느 날 내게 말했다.

"엘레강스야, 너는 좋아하는 남자 친구 없니?"

내가 그 의도를 파악 못해 꾸물거리자, 그녀가 앵두알같이 반짝이는 입술을 열어 다시 말했다.

"나는 길버트를 좋아해. 엄마에게도 말했어. 우리 엄마는 그런 얘기도 터놓고 하는 게 좋다고 하시거든."

나는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는 느낌을 그때 알았다.

그리곤 곧 체념했다.

그래, 너도 남자 보는 눈이 있구나.

그리고 중졸 우리 엄마는 먹고살기 바빠서 딸이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 신경도 안 쓰는데

여고 졸업하셨다는 너희 엄마는 세련되셔서 딸과 그런 대화도 하시는구나.

좋.겠.다.


길버트와 J가 함께 웃으면서 얘기하는 모습을 보게 될 때마다 가슴이 시렸다.

나도 그와 얘기하고 싶었다.

나는 힘들어하지만 그는 잘하는 수학, 과학 등 학업에 관한 이야기라든지,

중학교 졸업 후의 진로에 관한 이야기라든지 진지하고 성숙한 주제로 대화를 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 누구도 아닌 길.버.트.와 하고 싶었다.


누가 어디서 들여온 이야기인지 2월 14일은 밸런타인데이라고 했다.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주는 날이라고, 시골의 중학교도 며칠 전부터 시끌시끌했다.

그날 아침 나는 어제 하굣길에 구입했던 초콜릿을 계속 떠올렸다.

그리곤 드디어 결심했다.

길버트가 자리를 비운 사이 그의 책상 안에 초콜릿을 넣어두기로 한 것이다.

성공을 하고 나니 마음이 참 얄궂었다.

혹시 내가 넣어둔 것인 걸 알면 창피해서 어쩌지.

아니다, 나의 호감을 알아달라고 한 짓인데 모르면 서운해서 어쩌지.

길버트는 내 초콜릿을 발견했는지 어쨌는지, 발견했어도 내 소행임을 몰랐는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고입 연합고사도 끝난 중3의 12월이 되었다.

길게는 9년까지 함께 한 아이들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방학식날이자 크리스마스 이브인 겨울날,

길버트가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왔다.

[태풍 매미 때 친정집에서 살려낸 쭈글쭈글해진 길버트의 크리스마스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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