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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

(그림책: 「제자리를 찾습니다」)

by 안은주

한 손에 지팡이를 짚고 다른 편 어깨엔 양탄자를 걸머진 할아버지가 걸어간다. 할아버지 모습은 초록 들판 한가운데 커다랗게 무언가를 들어낸 자리 위에 그려져 있다. 여기서 ‘제자리를 찾는다’는 제목까지 읽고 나면 할아버지가 지고 가는 양탄자의 놓을 자리 찾기가 이 그림책의 이야기일 것이라 단정 짓게 된다. 그러나 작가는 이야기 단서를 허투루 던지지 않는다.




"옛날에 어떤 할아버지가 연못가에 살고 있었고, 연못을 정성껏 가꾸었다."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연못가를 빽빽이 둘러싼 갈대, 부들 등의 높고 낮은 수생초들, 수면 위를 가득 채운 개구리밥, 부레옥잠, 연꽃류, 그 사이를 비집고 고개를 내미는 개구리들, 낮게 떠서 주위를 배회하는 잠자리, 나비들까지 평화로운 한때의 연못 풍경이 양면펼침면으로 그려진다. 화면 왼편엔 할아버지가 간이의자에 앉아 있다. 개구리에게 밥을 던져주는 듯한 손가락 움직임과 입에 문 풀꽃이 할아버지가 연못 풍경의 일부인 듯한 느낌을 전한다. 세상 중심이 잠시 연못과 할아버지에 멈춘 듯하다. 주변 들판의 모습이나 하늘, 구름은 이 그림에서 제외되어 하얀색 배경으로 처리된다. 앞서서 보았던 표지와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 보도록, 이 그림은 단서를 품고 있지만 이는 첫 읽기에서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연못이 있는 자리에 주차장을 만들기 위해 땅 주인이 할아버지를 내쫓는 장면으로부터 사건이 시작된다. 연못을 걱정하는 할아버지. 그렇게 마음이 쓰이면 가져가라며 주인은 연못을 하찮은 물건 취급한다. 할아버지의 걱정을 비아냥대며 킬킬거리는 주인 무리. 주인과 할아버지가 대비되는 건 글에서만이 아니다. 초록의 연못과 살구색 피부 표현에 색깔의 옷을 입은 할아버지와 달리 주인의 모습은 무채색이다. 한 치의 배려도 없는 무감각의 정서를 가진 사람을 작가는 '색채 없음'으로 표현한다.


연못을 두고 혼자 떠날 수 없었던 할아버지는 결심한 듯 소매를 걷어붙이고 허리를 구부려 연못을 둘둘 말기 시작한다. 그러곤 척하니 어깨에 걸머지고 그 자리를 떠나는 할아버지. 표지에서 보았던 그림이 재현되는 장면이다. 아하! 양탄자가 아니라 연못을 만 거였구나! 연못을 양탄자처럼 둘둘 말 수 있다는 상상에 독자는 흥미로움을 느끼면서 얼른 다음 장을 넘길 것이다. 한편, 첫 장면에서 작가가 던졌던 단서가 섬광처럼 떠오르는 독자도 있으리라!


표지에서 무언가를 들어낸 듯 하얗게 처리된 공간은 연못이 있던 자리였음을 이해할 것이다. 들판 속에서 자연과 어우러져 있었음을 초록 배경으로 표현하였으며, 연못을 말아 걸머지고 가는 그림을 통해 그 자리에 있던 연못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하얀색 공백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첫 장면에서 이와 반대로 흰색 배경에 초록 연못의 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고립된 연못과 할아버지라는 의미이자, 뒤이어 발생할 사건의 전조를 암시한다. 그리고 첫 장면의 그림을 그대로 들어내어 표지의 하얀 공백 속에 넣는다면 딱 들어맞을 것이라는 이미지 상상도 가능하다. 즉, 표지와 첫 장면을 한데 겹쳐놓은 그림이 ‘제자리에 있었던’ 연못의 풍경이자 앞으로 찾아서 ‘제자리에 있게 될’ 연못과 할아버지의 모습이다.




할아버지의 연못 제자리 찾기 여정이 이어진다. 기차를 타고 도시의 여동생네로 향하는 할아버지. 동생은 연못을 반기지 않는다. 이웃 선생님의 소개로 학교의 교실에 펼쳐진 연못은 아이들의 관심을 받고 흥미로운 자연 수업 소재가 되지만 모기가 많이 생긴다는 이유로 다시 둘둘 말리는 처지가 된다. 할아버지는 떠나면서 연못에 마음을 빼앗겼던 아이에게 연못의 귀퉁이를 잘라 나눠주며 정원에 두고 키우라는 배려를 잊지 않는다. 이후 시청에 기증하려는 할아버지의 마음을 직원은 쓰레기통에나 버리라며(연못과 마음 모두) 일축하고, 쇼핑센터에서도 병원에서도 미술관에서도 연못과 할아버지는 환영받지 못한다. 떠도는 사이 연못은 물기가 말라 웅덩이 크기로 쪼그라들고 만다. 연못을 잘라 분양할 수 있다는 표현이 흥미롭고 재미있게 느껴지다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질수록 점점 작아진다는 표현에는 서글프고 안타까워진다. 돌돌 말려진 연못은 이제 할아버지의 한 손에 잡힐 만큼 작고 초라하다.


도시에서 연못의 자리를 찾지 못한 할아버지는 다시 기차를 타고, 멀고 먼, 가장 맨 끝 동네로 향한다.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은 동네의 가장 후미진 끝 한적한 자리에 자그마한 연못을 펼치고 할아버지는 비가 오길 간절히 기도한다. 염원대로 사흘 낮 밤을 내린 비 덕분에 연못은 원래의 크기대로 풍성해지고, 더불어 연못을 아끼고 돌봐줄 사람도 만나게 된다. 그림책의 마지막 장면은 자그마치 4장의 펼침면으로 연못을 그려내고 있다. 대문을 열 듯 양쪽을 열면 그대로 4장이 하나의 장면으로 펼쳐진다. 열 배쯤은 커진 연못에 더 다양한 수생식물과 동물들이 어우러져 그 자체로 수생공원이 된다. 한가롭게 휴식을 즐기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연못이 제자리를 찾았듯, 인생의 마지막 자리에 안착한 고요한 모습이다.




연못의 제자리가 세상 끝, 작은 동네라는 결말이 살짝 아쉽게 느껴진다. 도시에서 환대받지 못하는 자연이라는 의미일까. 그보다는 도시가 원하는 자연의 형태가 아니라는 점이 더 가까운 이유일 것이다. 견고하고 정확한 체계의 시스템인 도시 안에서는 어떻게든 그에 걸맞게 변형된 자연만이 들어맞는다. 사람들의 일상과 업무에 해를 끼치거나 피해를 줄 만한 요소들은 최대한 제거해야 한다. 휴식처로 찾는 공원조차 다듬어진 자연의 조형이라는 점에서 자연 그대로의 자연을 인근에서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자연 그대로의 자연에 흥미를 보이고 보살피고자 하는 의욕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이 그림책에서 작가는 그런 사람들에게 색깔을 입힌다. 자연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작가의 그림표현이자, 작가만의 표현 권리인 셈이다. 그림책을 덮고, 다시 읽을 때쯤 색깔을 입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할아버지를 내쫓은 주인을 비롯하여)이 확연히 눈에 들어올 것이다. 물론 어린아이라면 첫 읽기에서 발견할 수도 있다. 성인은 그림읽기에서 항상 아이에 한 수 뒤진다.


‘자연’ 이외에도 이 그림책은 여러 생각거리를 던진다. ‘제자리’가 대체 무엇이고,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라는 것이 자연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있다면 나의 제자리는 어디인가. 그림책의 할아버지처럼 안착해 있는지, 아직 찾아가는 여정 중인지에 대해, 할아버지가 연못을 귀중하게 여긴 것처럼 삶에서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것들과 그것들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제자리’의 윤곽이 점점 선명해지리라 생각한다. 그림책을 읽고 사유하는 지금의 이 자리가 무형이 아닌 유형의 ‘제자리’를 찾기 위한 과정임을 나 또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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