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살아있다는 것」)
‘이 시간 이후 남은 삶 동안의 기쁨과 즐거움이 지금의 절망과 힘듦에 무너진 것을 후회할 만큼 아깝고 귀중할 것인가’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현재 맞닥뜨린 어려움을, 오지 않은 미래의 희노애락과 저울질하며, 삶을 유지하여야 하는 이유로 밀어붙이고 싶었던 참 어리디어린 마음의 시기였다. ‘예까지 잘 견뎌와 이 순간을 맞이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격정의 십대와 혼란의 이십대, 불안한 삼십대를 거치는 과정에서 내 삶을 견인해 가던 말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어른이 되어간다고 믿어지는 이즈음에 이르러서도 저 말이 주는 위안이 크다. 그러고 보면 적게 살았든, 길게 살았든 삶에 동기부여가 되는 생각의 본질은 같다. 살아있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좋음이다... 십대 시절의 그 생각이 본능이자 직관이었다면, 지긋한 나이가 된 지금의 생각은 경험이자 통찰이다.
다리 난간에 두 팔을 걸치고 고개를 수그린 아이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멀찍이 재킷이 난간의 안과 밖으로 반씩 나뉘어 걸쳐져 있다. 불현듯 아이가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져, 책을 뒤집어 그림을 확인한다. 높은 시선의 위치로 이동한 다리 아래로 시커먼 것이 펼쳐져 있다. 아니 흐르고 있다. 난간엔 아이 대신 새가 앉아 시커멓게 흐르는 물을 지켜보고 있다. 이렇듯 앞표지와 뒤표지 그림 사이엔 급박한 긴장감이 흐른다. 자칫하면 재킷이 반을 넘어와 난간 바깥으로 떨어져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아이의 모습에 전이된다. 흑색의 거친 목탄 스케치에 푸르스름하게 청색이 스며든 자리가 생(生)이면서 사(死)의 낯빛처럼 서늘하다.
아이가 입을 열어 이야기를 시작한다. 난간에 기대어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던 날 저녁, 어디선가 허름한 차림의 아저씨가 나타나 곁에 선다. 강을 좋아하는지, 다리를 좋아하는지 묻는 아저씨에게 떨떠름하게 얼버무리는 아이. 그러면서 속마음은 아까부터 생각해 오던 두 갈래의 길과 갈림길로 아이를 몰아간 어지러운 기억의 조각들이 한데 엉켜 산란하다. 저지르지 않은 잘못의 주범으로 몰린 기억, 아이에게 누명을 씌우려고 사용된 후 쓰레기통에 버려진 재킷. 아이는 생각한다. 자신을 추궁하던 아주머니와 진짜 범인인 아이에 대해서, 오인했던 잘못과 들킬지 모를 두려움에 그들이 사로잡혀 있는지 궁금해한다.
허름한 차림의 아저씨는 아이의 얼버무림 너머에 있는 상심을 알고 있다. 쓰레기통에서 건져진 재킷이 아이에게 입혀지지 않고 난간에 걸쳐졌을 때, 아이는 저지르지 않은 잘못을 인정할 수 없듯이 잘못에 쓰였던 재킷을 품에 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버릴 수도, 입을 수도 없는 재킷은 그렇게 반은 생의 이쪽 편에 반은 생의 저쪽 편에 걸•쳐•있•다. 아이의 마음도 그렇게 갈림길에 걸•쳐•있•다.
훌쩍 뛰어올라 새처럼 날아, 강으로 뛰어드는 생각에 골몰하던 순간, 아저씨는 아이의 생각을 가로지르며 호수 이야기를 꺼낸다. 아이에게로 다가오고 있다는 호수. 시시각각 다가와 아이를 휘감아 싸는 차가운 물은 억울하고 분하고 서러운 고통의 마음을 닮은 것처럼 느껴진다. 두 손으로 귀를 막고 흘러드는 물소리를 들어보라고, "어둠 저편에 있는 오직 하나의 호수, 너만의 호수"라며 아저씨는 투박한 손으로 귀 전체를 넘어 정수리 근처까지 덮은 채 두 눈을 감는다. 깊게 패인 주름과 길게 자란 수염, 산발한 머리가 삶의 매 순간 고통이 닥칠 때마다 행해 왔던 숭고한 의례였음을 말해준다. 아저씨를 따라 귀를 막았다 손을 뗀 아이는, 강물 소리가 이전보다 더 커졌음을 느낀다. 그리곤 서둘러 집으로 향한다.
귀를 막고 물소리를 듣는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현재의 부대낌을 마음 안에서 오롯이 감당해 보는 일이며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는 행위이다. 그리고 귀를 열었을 때, 들리는 세상의 소리에서 새로움을 발견해 보도록 하는 행위이다. 아이를 휘감아 돌던 슬픔과 절망의 심정은 오히려 차가운 심연으로 거침없이 들어갔을 때,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 버림으로써 담담한 마음을 가지게 했고, 그 사이 세상은 이전에 미처 알지 못했던 생명의 활력으로 다가온다. 귀에서 손을 뗐을 때, 물소리가 더 커진 것처럼.
아이는 자라 어른이 되고, 다리와 기대었던 난간과 잿빛 강물은 기억에서 아스라해진 지 오래다. 그러나 때때로 마음 저 깊숙한 곳에서 차갑게 소용돌이치며 물소리가 온몸을 울려댄다.이미 어른이 된 아이는 귀를 지그시 눌러 막고 물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때 강에 뛰어들었다면 지금 만날 수 없었을 사람들을. 아저씨의 의례는 아이에게로 전해져 삶을 견뎌내는 소중한 의식이 되었다. 그렇게 아이는 어른으로 성장하였다.
살아있다는 것. 제목이 주는 무게감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일 것이다. 희노애락이 삶에서 균등하게 거쳐가지는 않을 것이므로, 더 많이 경험한 감정의 빈도가 삶의 가치를 설명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때로 감정의 저울질을 통해 삶에 대한 행복과 만족을 판단하려 든다. 그러다 이것이 생(生)과 사(死)의 저울질로 넘어가는 순간, 우리는 ‘살아있음의 다행스러움’을 잠시 망각한다. 살아서 더 누릴 수 있는 것, 더 가질 수 있는 것들은 부차적인 문제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그 순간 다가오는 감정과 그것을 마주하는 방식의 차이일 것이다.
생(生)이라는 주제는 어린아이가 이해하기에 버거울지 모른다. 거기다 세밀하면서도 거칠게 표현한 흑백의 그림이 무거운 주제를 더 무겁게 아래로 끌어내린다. 그러나 아는가. 심연의 밑바닥까지 끌어 내려졌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위로 올라가는 일뿐이라는 것을. 살아있음의 다행스러움을 이해한 아이에게 강은 이제 잿빛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산책하고 즐기는 푸르름의 장소이다. 그림책은 여기서 단 한 장면의 총천연색 그림을 연출한다.
열심히 살아가느라 잠시 잊고 있던, 살아있음의 새삼스러운 인식이 필요한 당신에게 이 그림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