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언니와 나의 관계

제일 가까운 경쟁자

by B 비

부모님은 다른 부모님들처럼 우리 삼 남매에게 늘 서로 아끼고 사랑하라고 말했지만, 한편으론 우리 사이에 은근한 경쟁도 붙이셨다. 어릴 때는 성적으로, 나이가 들어서는 돈과 효도로 우리를 비교하곤 하셨다. 그런 환경 속에서 우리 셋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견제하고 때로는 상처 주는 말도 서슴지 않게 되었다.


언니는 나를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 빠진 관심병 환자'라며 놀렸고, 남동생은 철이 없고 제멋대로인 '망나니'로 표현되곤 했다. 나 역시 언니를 '이기적이고 철없는 아기 엄마'라며 깎아내리곤 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서로에게 많은 상처를 주고받으며 자랐다. 그래서인지 가끔은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과연 우리가 주기적으로 서로를 찾아볼까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언니는 자주 내 일기장을 몰래 들춰보고는 가족들 앞에서 내 마음을 이야깃거리로 삼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참기 힘든 모멸감을 느꼈다. 언니는 나보다 세 살이 많은 첫쨰라는 이유로 부모님이 안 계실 때는 회초리를 들거나 벽을 보며 손들기 1시간, 자기 말을 안 들으면 2시간 이런 식으로 마음대로 기준없는 벌을 주곤 했다. 심지어 언니는 부모님이 없을 때 남동생과 함께 나를 왕따 시키기 놀이를 하기도 했다. 둘이서 소파에 앉아 나를 욕하고 괴롭히던 그 순간들은 지금도 내 마음 깊이 남아 있다. 아무리 어린 시절이라 해도 그런 기억은 쉽게 잊히지가 않는다.


내가 부모님께 더 이상 도움을 청하지 않게 된 건, 결국 포기의 결과였다. 전화기를 들고 울며 도움을 청해보려 해도 언니는 그 전화기를 빼앗아 버렸고, 어렵게 연결된 부모님의 목소리 너머로 들려오는 말은 늘 지친 듯한 한 마디뿐이었다.


"언니 말 좀 잘 들어."


그렇게 나는 우리 집 안에서 점점 별난 아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아이가 되어갔다. 누구에게도 온전히 이해받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내 마음이 갈 곳을 잃어버린 건 그때부터였던 거 같다. 그래서 그때부터 글로 내 마음을 다독이고 풀어내기 시작했다. 현실에서는 누구에게도 기대지 못했지만, 글 속에서는 늘 나 자신을 달래며 이렇게 적곤 했다. '괜찮아, 열심히 해서 꼭 성공하자. 내가 우리 가족 중에 제일 잘될 거야.' 그렇게 일기장 안에서 나를 위로하고 북돋우며 버텼다.


글로 다짐했던 그 말들이 내 삶을 조금씩 끌고 왔다. 어디선가 '고통은 인생 총량제이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아마 가족들과 함께 보낸 시간들 안에서 그 총량의 대부분을 채워버린 게 아닐까 생각한다. 앞으로도 조금은 남아 있겠지만, 이제 그 고통은 이전과는 다르게 다루어 넘기고 싶다.


언니는 일찍 선택한 결혼을 후회하며 지금은 혼자 아이를 키우고 있다. 그 힘겨운 결혼 생활과 이혼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다. '아.. 언니의 고통은 지금 채워지고 있는 건 아닐까.'

인생은 누구에게 공평하다. 누구에게나 각자의 시간이 있고, 각자의 몫이 있는 것 같다. 누구도 온전히 행복하거나, 온전히 불행하지 않다는 걸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다. 그래서 이제는 남의 삶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조언이란 말로 충고하지 않는다. 누구나 자기 몫의 고통의 시간을 지나가고 있음을 알았기 때 문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부모님과의 통화